공작가의 마마보이 160화
“우응……. 응?”
부스스한 모습으로 주안의 가방에서 느릿하게 나온 세냐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는 주안의 모습에 갸웃했다.
지금의 자신도 매우 흐느적거리며 영 기운이 없었지만, 주안의 얼굴을 보니 세상을 다 잃어버린 사람 같아 보였다.
“솔이라는 돼지 오빠가 간식이라도 빼앗아 먹었어요?”
“……세냐, 일어났네.”
잠시 몸을 풀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리카락도 매만지고, 다시 몸단장한 뒤 작은 날개를 움직여 주안에게로 날아가는 세냐.
하지만 주안은 그런 세냐를 여전히 멍한 눈으로 지켜보며 영 기운 없이 말할 뿐이었다.
이런 주안을 보며 세냐가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러세요? 꼭 음식에서 벌레 반 마리를 본 얼굴이신데.”
“벌레 반 마리? 한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보단 반 마리가 나온 게 더 무섭고 두렵잖아요.”
“…….”
그 말에 잠시 갸웃하던 주안도 순간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주안의 모습을 보고 기운이라도 내라고 세냐가 농담한 것임을 깨닫고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주안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세냐를 보고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세냐는 당연하다는 듯 주안의 손바닥 위에 내려오더니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게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평소와는 달리 악동이라기보단 귀여운 꼬맹이일 뿐인 세냐였다.
“그런데 잠도 되게 오래 자네? 불편하진 않았어?”
“흐흥~ 하나도 안 불편하거든요. 그리고 이 정도는 자야 밤에 열심히 공부하죠.”
“밤에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키가 크지.”
“웃?! 서, 성장기는 다 끝나서 이제 안 크거든요?! 그리고 충분히 크거든요!”
“……벌써 성장기가 끝났다고?”
“흥! 우린 인간이랑 달라서 빨리 크고 천천히 늙는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니까요.”
“부럽긴 한데, 꼬맹이 모습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것도 영…….”
“꼬맹이 아니라고요!”
“아, 아얏! 깨물지 마! 아파!”
버럭 소리를 지른 세냐가 기어코 주안의 엄지손가락을 꽉 깨물어 버린다.
성질 한번 불같은 꼬맹이라 그런지 주안을 깨문 것도 모자라 으르렁거리며 노려보기까지 한다.
그 눈이 무서워서 주안이 움찔 놀라며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대체 밤에 무슨 공부를 그렇게 한다고 잠도 안 자는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는 거야 당연하잖아요. 이게 다 아미엘 님에게 보고 듣고 공부한 모든 것을 알려드려야 할 제 의무거든요?”
“……대단하네.”
정말 대단하고 듬직하다고 할까.
주안의 말에 세냐가 으쓱한 듯 팔짱을 끼며 가슴까지 쭈욱 펴며 쿠후후 하고 웃는다. 그리고 주안을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빤 왜 그렇게 풀이 잔뜩 죽어 있는 거예요? 드디어 돈 다 떨어져서 알거지가 된 거예요?”
“아마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야. 정말 멍청한 짓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마르지 않는 보물 주머니나 마찬가지인 가문인지라, 주안의 말대로 어이없는 짓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평생 돈을 펑펑 써대도 될 정도로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은 돈이 많다.
물론, 그런 짓을 저질러 버린 경험이 있는 주안이긴 했지만, 이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러지 않도록 만들 것이니까.
“그럼 왜 그래요?”
귀엽게 갸웃하는 세냐의 모습에 주안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세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실은, 할아버지를 엄청나게 화나게 한 것 같아서 말이야.”
“할아버지요? 그 이상한 왕관 쓰고 뚱뚱한 분이요?”
세냐의 말에 주안은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외할아버지는 키도 좀 작고 통통하셔서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서방 대륙 최강국이라 할 수 있는 제노폴 제국의 황제라는 이미지보다는 정말 옆집에 사는 마음씨 좋고 옛날이야기를 동네 꼬마들에게 해주실 것만 같은 할아버지 같으신데 말이다.
“그분은 외할아버지. 우리 친할아버지는 좀 더 크시고, 근육도 많으시고, 무서운 분이시거든.”
“헤에…….”
“젊었을 때는 남부의 고릴라라고 불리던 엄청난 기사이셨고, 지금도 수십만 명을 말 한마디로 움직이시는 분이시거든.”
“우와…….”
농담이 아니라, 벡브란 전대 공작의 말 한마디로 전쟁에서 가문의 정병을 십오만이나 끌어낸 인물이었고 여전히 그의 말 한마디면 동부의 모든 가문은 마를렌으로 집결하였다.
지금 역시 벡브란 전대 공작의 부름으로 동부 주요 가문의 가주들이 식솔들까지 이끌고 모조리 마를렌으로 모였으니 말이다.
이런 주안의 말에 세냐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갸웃했다.
“하지만 오빠나 오빠 아빠나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아직 세냐는 주안의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을 마주한 일이 없다 보니, 주안과 주레인 공작 부자만 놓고 보면 주안이 말한 무시무시한 할아버지의 이미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확실히 주안과 주레인 공작 부자를 보고 벡브란 전대 공작을 떠올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닮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외모에서부터 성격이나 성향, 취미나 취향까지.
어디 하나 제대로 맞는 구석이 전혀 없는 게 바로 주안 부자와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다.
“아버지는 할머니랑 많이 닮았다고 하셨고, 나는 또 아버지나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으니까. 게다가, 같이 지낼 시간이 거의 없었거든.”
주안은 벡브란 전대 공작의 곁에서 보고 배우고 조금이라도 닮아갈 그런 시간이 없었다.
그것은 주레인 공작도 마찬가지였고, 애초에 주레인 공작은 아버지를 닮기 싫어서 황도로 떠나온 이유가 커서 그런지, 그런 경향은 더욱 심했다.
물론 주레인 공작도 지금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지만, 여전히 무서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할아버지를 화나게 하셨다고요?”
“으응……. 그렇지.”
세냐도 인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과거와 현재의 세상의 차이가 무엇인지 여전히 공부 중이었지만 인간들의 성향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특히 권력자들이나 위에 올라선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리고 세냐는 그런 권력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거의 근접한 인물이, 아니, 가문이 주안의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임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런 가문의 모든 것을 틀어쥔 무시무시한 할아버지를 화나게 했다는 것은…….
“……가문에서 쫓겨나시는 거 아니에요?”
“아, 아냐. 그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다고 무엇보다…….”
주안은 세냐의 말에 깜짝 놀랐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우리 가문은 자손이 귀해서, 날 쫓아낼 수도 없어.”
“하지만 곧 동생이 태어나면 상관없잖아요.”
“…….”
세냐의 담담한 그 말에 주안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지만, 창백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그, 그럴 리 없어. 그래도 할아버지가 날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확신하지는 못하시네요.”
“으…….”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와 친밀하게 된 것도 작년의 생신 파티 때의 며칠뿐이었지, 그 후로는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언제 또 주안에게 실망하고 화를 내셔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아스란 왕국에서 돌아온 후 마법통신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는 여전히 주안은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이번 일이 주안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 왜 화나신 건지…….”
“무슨 잘못을 하셨기에 화가 나셨겠죠.”
“그렇게 큰일 같지는 않았어. 나나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건 순전히 오빠나 오빠네 아빠의 생각일 뿐이잖아요.”
“그야…….”
세냐의 말대로 주안은 이 일들을 모두 황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라 생각했고 몇 가지는 마를렌의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려 일을 해결해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그것도 동부의 마르티네스 공작가문의 가신들을 모조리 마를렌으로 불러들여야 할 중대 사항으로 생각하고 계신다.
주안은 그것이 고민스럽고, 할아버지를 어떻게 마주할지 솔직히 겁까지 났다.
“또…… 할아버지를 실망시킨 걸까.”
“응? 예전에도 큰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으셨어요?”
“있었어.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러서, 평생을 할아버지에게 효도하고 가문에 봉사해야 할 큰일을 저질렀었어.”
“우와, 완전 불효자셨네.”
“하하…….”
세냐의 말대로 주안은 불효자였다.
그리고 죄인이었기에 평생을 가문에 봉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 또다시 큰 잘못을 저지른 듯했다.
할아버지를 실망시키고, 가문에 피해를 준 것이다.
“그게 그렇게 걱정이 돼서 이렇게 있으셨던 거예요?”
“응, 그렇지…….”
무엇을 잘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아버지의 화를 풀어드릴지 몰라 주안은 계속 고민하였다.
위체니아나 록산느에게 물어보아도 그녀들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 잘 몰랐다.
벡브란 전대 공작의 권한을 이용해 가신들을 모조리 마를렌으로 불러 모았고 주안이 도착하면 대 회의를 연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안은 어떻게 보면 죄인의 입장으로 그곳에 서야 할지도 몰랐다.
“오빠는 자신이 뭘 잘못한 것인지 모르시는 거죠?”
세냐의 말에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야 뭐, 오빠가 뭘 하려 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 할아버지가 뭘 문제 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오빤 오빠가 올바르다고 판단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된 거잖아요. 오빠 성격에 나쁜 마음을 먹고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을걸요. 그 답답하고 고지식하고 착한 척만 하는 이상한 성격 때문에 말이에요.
“착한 척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만 세냐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가셔서, 제대로 마주하고 말씀드리세요. 오빠가 하려던 일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가려 했던 것인지 말이에요.”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실망시켜 드렸다고 주눅 들지 말란 말이에요. 마주하세요. 그리고 말씀드리고 대화를 나누고, 잘못된 부분을 깨달으면 그때 사과하세요.”
그리고 세냐는 주안을 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고민하고 피하고 힘들어해 봐야 소용없어요. 결국,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
주안은 세냐의 어른스러운 그 말에 조금 놀란 눈으로 세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냐는 마치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가장 기본은 대화하는 것. 그리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공감할 부분을 찾는 것. 아시겠어요?”
그리고 주안은 그런 세냐의 말과 미소에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세냐.”
“흐흥~ 고마우면 맛있는 거나 사줘요. 온종일 잠만 잤더니 배고프잖아요.”
“응, 뭐든 다 사줄게. 먹고 싶은 거 뭐든지 말이야.”
“히히, 이래서 돈 많은 호구, 아니, 사람이 참 좋다니까요.”
“…….”
저 말투만 좀 고치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그게 세냐답기에 주안도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냐의 말대로 마냥 고민만 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자.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호통을 듣고 따끔하게 혼이 난다고 해도 당당하게 마주하는 것이다.
잘못을 깨닫고, 그리고 고쳐 나가면 되는 것이다.
예전처럼 엄마 품에 숨어서 피하는 게 아니다.
이젠, 할아버지의 앞에 서서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에 맞는 그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주안은 그제야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작게 다짐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똑바로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