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58화
주안의 바람대로 일행은 도리안의 안내에 따라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고급 숙박시설로 걸음을 옮겼다.
말을 숙박시설 직원들에게 넘겨준 일행은 모두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이 도시에선 가장 크고 화려한 곳답게 평민은 발도 붙일 수 없을 그런 분위기였다.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복색들로 볼 때, 제노폴 제국 귀족들뿐만이 아니라 먼 동방 대륙의 인물들도 있었고, 북방이나 서부인들 특유의 복장을 한 이들도 다수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서부 변경 도시라 해도 입구나 마찬가지인 곳이었고, 동방 대륙과의 거래가 활발한 탓에 많은 이들이, 많은 인종이 오갔다.
마를렌만큼은 아니지만, 마르티네스 공작가다운 분위기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타 지역만큼 다른 이들을 배척하지 않는 기조가 상당하여 피부가 까맣든 노랗든 하얗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단지 돈이 있는 이들이냐, 없는 이들이냐로 나뉘겠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요.”
“이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거야?”
주안의 말에 워랜이 어이없어했지만, 사실 주안의 그 말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집보다 누추하고, 그동안 주안이 엄마와 다녔던 곳과 비교해도 큰 특색을 자랑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안내인들이 불쾌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주안을 더욱 대단한 인물로 예상하게 만든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주안이 타고 온 말, 입고 있는 복장, 차고 있는 장신구, 그리고 때때로 보이는 마법 처리가 된 물건들까지.
절대 평범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곳에 오래 근무한 경력답게, 주안이 어떤 높은 귀족가의 자제임을 대번에 파악하고 있었기에 도리안이나 쥬도, 토미처럼 평민인 이들과 함께라도 고개를 숙여 극진히 모시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쉴 때는 좀 편하게 쉬어야 하니까 이번에도 그냥 한 층을 다 빌리는 게 낫겠죠?”
“저는 찬성입니다. 찬성!”
솔이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소리 높여 말했고, 워랜과 떨어지고 싶은 그 심정을 알기에 주안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여 있는 것도 좋지만, 주안은 쉬는 시간만큼은 다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편하게 지냈으면 하는 주의였다.
모이는 것은 식사할 때나, 큰 온천이나 목욕탕이 있을 때나, 혹은 찻집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정도면 충분한 것이었다.
이런 주안의 말에 이미 오면서 그렇게 해왔기에 다들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내인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하며, 주안을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 있는 귀족가의 사람이라는 것으로 수정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바로 지배인에게 알려 극진하게 모시는 쪽으로 정하였다.
보통 어디 어디 귀족가의 누구라거나, 어디 거대 상단의 누구라거나, 등등의 자신을 소개하는 귀족들이 많다.
하지만 이처럼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잠시 쉬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이 바로 노련한 직원들의 역할이었다.
이들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이면, 다음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오거나 혹은 주변에 소문을 자연스럽게 내주기에 딱히 홍보를 안 해도 그저 최상의 서비스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많은 효과를 보니 말이다.
“여기 큰 목욕탕이나 그런 것은 있나요?”
“물론입니다. 이곳의 지하수가 매우 좋아서 피부 미용이나 노화방지로도 유명하답니다. 아, 그리고 동방의 약초들을 함께 우려내어 사용하였기에 기미나 주근깨, 작은 상처 치료에도 확실한 효과가 있는 저희 시설의 자랑이지요.”
“호오, 동방의 약초까지……?”
주안은 다른 것은 몰라도 목욕을 정말 좋아했다.
아무 생각 없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채 눈을 감고 있으면, 그만한 휴식 시간도 없었고 피로도 금세 풀리는 것만 같아서 매우 애용하였다.
이런 주안의 취미 때문에 엄마인 안젤라는 저택의 한 부분을 확장하여 주안 전용 거대 목욕 시설까지 만들어주었을 정도였다.
물론 주안 전용이라고 하지만 주안이 모두에게 개방하였기에 거의 공공시설이 되어버렸고, 안젤라는 영 불만스러워 했지만 말이다.
안내인의 말에 주안이 호기심을 가지자, 안내인도 속으로 작게 쾌재를 불렀다.
관심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한 좋은 인상만 각인시켜 주면 이 거대한 고객은 단골이 될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건물의 한 층을 그냥 빌리는 배포가 큰 젊은 인물이, 만약 부모와 함께 온다면 더욱 큰 이득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안내인은 지배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서비스를 확실히 할 수 있도록 말씀드릴 생각까지 하였다.
“일단 그러면 방을 좀 안내해 주시고 저는 바로 목욕을 하고 싶은데 다들 어떠세요?”
주안의 말에 다들 동의해 주었고, 그것은 안내인의 귓속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한 층을 잡고, 방을 정리하고, 곧장 목욕탕…….
빠르게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하면서 조금의 시간 지체도 없도록 만들려는 듯 계산을 하는 듯했다.
“조금 늦으셨네요, 주안 공자님.”
“응?”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목욕 후에는 무엇을 하고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그리고 내일 아침은 먹고 출발할 것인지, 그냥 일찍 일어나 가면서 먹을 것인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에 주안이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어……?”
그리고 자신을 부른 인물의 모습에 주안이 흠칫 놀랐다.
주안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알고 있는, 모두가 다 그랬다.
“……위체니아 양?”
바로 위체니아 소벡이 주안에게 다가오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주안에게 위체니아의 곁에 있던 다른 한 여성이 주안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매우 인상 깊은 늘씬한 여성이었지만, 주안은 이 여성을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꽤 오래전의 일이기도 하고 스쳐지나갔던 인연이라 갸웃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주안이나 워랜은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에 주안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위체니아 양뿐만이 아니라 록산느 양은 왜 또 여기 계세요?!”
바로 현 로마니아 백작가의 가주인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의 손녀인 록산느 로마니아 영애였다.
그리고 안내인은 자신이 안내하던 사람이 이 공작령의 주인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임을 깨닫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버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 * *
자리를 옮긴 주안 일행은, 이곳 지배인의 극진한 모심을 받으며 내부에 설치된 고급 카페로 안내되었다.
주안과 워랜 그리고 위체니아와 록산느만이 같은 자리에 마주 앉았으며 다른 일행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위체니아 양과 록산느 양이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주안의 말에 위체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술을 축인 뒤 말했다.
“공작 부인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주안 공자님이 마를렌으로 급히 가신다고, 잘 지켜봐 달라고 말이지요.”
“으…….”
“물론 제가 아니라 로마니아 백작가와 마를렌으로 향하는 길의 모든 가신의 가문에 일괄적으로 전달된 긴급사항입니다, 공자님.”
“기, 긴급…….”
위체니아가 생긋 웃으며 하는 그 말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워랜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것인지 웃음까지 터뜨렸다.
“이거, 가는 길에 한 번씩 다 들러서 얼굴 비쳐야겠는데? 주안 공자.”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아니, 빨리 갔다 와야 하는 일인데…….”
주안이 앓는 소리를 내든 말든 워랜은 그저 즐겁게 웃을 뿐이었다.
그 경박스러운 행동에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던 주안이 문득 이상함에 위체니아와 록산느를 번갈아가며 보다 말했다.
“응? 그런데 위체니아 양은 그럼 로마니아 백작가에 계셨던 거예요?”
“예.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다른 곳은 몰라도 로마니아 백작님은 만나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니까요.”
대부분 공작령 남부 귀족들이었고, 유일하게 북부 귀족이었던 소벡 백작 가문의 위체니아 소벡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랐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위체니아 소벡은 3대 백작가를 대표해서 주안을 지켜보기 위해 아스란 왕국 사절단에 합류해서 함께 갔던 인물인지라, 그녀는 자신이 보고 겪은 주안에 대한 이야기를 3대 백작가에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로마니아 백작가에 있었던 것인지, 그 이유도 알기에 이해했다는 듯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는 록산느 로마니아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위체니아 양이나 록산느 양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
주안의 말에 록산느 로마니아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주안을 지켜보았다.
그 눈빛이 매우 따끔거리고 차가워서 그런지 주안은 흠칫 놀랐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더니 잽싸게 말을 바꿨다.
“……록산느, 경이라고 불러 드려야겠죠?”
“예, 오랜만입니다. 주안 공자님.”
그제야 주안의 말이 마음에 든다는 듯 록산느 로마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런 록산느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여타 귀족가의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는다면 마법의 길에 발을 들이는 것과는 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검을 잡은 인물이었다.
애초에 그년는 남자, 여자를 구분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 여자가 남자보다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도 정면으로 거부한, 어떻게 보면 여장부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스타크 로마니아 경도 기사였고 무장이었지만, 이런 그녀의 행동을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단지 집안 내의 가장 큰 권력자이자 그녀의 할아버지인 미첼로티 로마니아 노 백작이 그녀를 지지해 주기에 아무도 그녀에게 검을 내려놓고 시집을 가라는 말을 못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물론 그에 맞는 실력도 있었기에 현재 동부에서 가장 뛰어난 여기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 어쨌든 두 분이 여기까지 나오신 이유는 대체 뭔가요. 연락을 받으셨다면 기다리시면 되셨을 텐데.”
“정말로 방문하실 생각이셨나요?”
“예? 그야…….”
……방문할지 말지 크게 고민 중이었다.
이런 주안의 머뭇거림에 마치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위체니아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안 공자님의 성격이라면, 이 시기에 갑자기 마를렌으로 향한다는 것 자체가 무슨 큰일이 있어서 빠르게 가는 것일 텐데……. 그런 상황에서 과연 가신들의 영지들을 하나하나 방문해서 얼굴을 비칠 리가 없잖아요.”
“…….”
귀신이 따로 없었다.
과연 동부 제일의 천재 마법사 불릴 만큼 똑똑한 여성이었다.
“공작 부인에게 부탁을 받은 이상, 저희도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 혼나지 않으니까 공자님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소벡 백작가는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어머, 저희 소벡 백작 가문이나 록산느의 로마니아 백작가, 여기 없는 헥사빌 백작 가문은 한 몸이나 다름이 없는 걸요.”
“으…….”
“하지만, 뭐, 아쉽게도 공작 부인에게 받은 명은 사실 지켜질 수 없는 것이라 그것과는 크게 상관은 없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위체니아의 말에 주안이 갸웃하자 위체니아가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다시 마시며 말했다.
“저희는 공작 부인의 명령 때문만이 아니라, 벡브란 전대 공작님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주안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할아버지가요?”
주안이 갸웃하자 위체니아가 찻잔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 치며 말했다.
“링베르가.”
그리고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 번 톡톡 치며 말했다.
“워랜 노밀.”
세 번 톡톡톡 치며 위체니아가 미소를 지었다.
“의문의 남부 원주민.”
주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창백하게 변했지만, 위체니아는 이런 주안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와 모두 연결된 주안 공자님.”
“…….”
“저희가 왜 여기서 주안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이제는 좀 아시겠죠?”
벡브란 전대 공작은 주안을 맞이해주라고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잡아 오라는 말씀이셨군요.”
“네.”
상큼하게 미소를 짓는 위체니아와는 달리 주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말 그대로 주안을 얼른 마를렌으로 잡아 오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동부로. 마를렌으로. 그리고 할아버지의 귀에 다 들어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