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57화
집으로 돌아온 주안은 약속대로 엄마와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낸 뒤 마를렌으로 출발을 서둘렀다.
황성으로 가기 전에 미리 집안 사람들에게 일러두었기에 이미 모두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주안 역시 세라타에게 부탁해 놓은 상태라 자신의 짐만 간단하게 챙겨 들면 끝이었다.
주안이 안젤라와 함께 저택을 나서자 이미 말을 준비해 두고, 많은 이들이 나와 맞이해 주었다.
“이렇게 다들 배웅은 안 해주셔도 괜찮은데……. 좀 부담스럽네요.”
“그게 싫으면 안 가도 되는데…….”
주안의 말에 안젤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리자, 그 행동에 주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 말이 농담인 것을 알지만, 언제 변할지 모를 변덕이 심한 엄마인지라 주안은 잽싸게 엄마의 손을 잡고 이끌어 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따뜻한 손을 느낀 안젤라가 그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금방 올 거지? 약속 지킬 거지?”
“그럼요. 제가 약속을 어긴 일이 있었어요?”
“우음…….”
주안은 엄마와의 약속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엄마를 변화시키고 스스로 변해가면서 가장 우선시한 것이 바로 엄마였으니 말이다.
물론 작은 의견충돌은 있었을지라도 한번 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기에 안젤라도 주안의 이런 당당한 말에 잠시 고민했지만,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마를렌에 가는 길에도 틈틈이 마법 지부에 들려서 연락을 드릴게요.”
“응, 대신 절대 밖에서 자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침대도 있고, 따뜻한 물도 있고, 식사도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만 지내야 해. 알겠지?”
“물론이죠. 이렇게 용돈도 많이 받았는데…….”
그러한 안식처를 돈을 주고 그냥 사도 될 정도의 거금이라는 것이다.
가는 도중 어느 마을,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가장 비싸고 좋은 곳을 빌려 지내는 것도 모자라 마를렌을 왕복해서 갔다 와도 돈은 남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게 극히 일부였다는 사실에 주안은 엄마의 씀씀이가 자신이 연관된다면 다시 엄청나게 많아진다는 사실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엄마도 저 없다고 또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고 그러시면 안 돼요. 마리아 누나랑 소니아 누나한테 다 부탁해 놓고 가는 거니까.”
“소니아 걔는 빼. 흥!”
“……왜 또 싸우신 건데요.”
“안 싸웠거든. 그 속 좁고 엄마 마음도 모르는 노처녀랑 싸울 이유도 없거든!”
“…….”
어쩐지 점심을 먹을 때도,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리고 지금도 소니아를 주시하며 서로 눈싸움을 하는 게 심상치 않다더니, 주안이 모르는 이유로 또 한바탕 싸운 듯했다.
친한 건지 아닌 건지…….
아니, 이건 마치 자매들의 다툼처럼 보일 때도 종종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전 황녀이자 현 공작부인과 대등하게 다투는 사람은 또 없을 거다.
그만큼 두 사람이 친하다고 봐야겠지만, 주안은 어쩐지 두통이 일었다.
“좀 친하게 지내세요. 저 없을 땐 소니아 누나가 엄마를 보살펴 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엄마는 엄마 혼자서도 잘 지내거든? 아니, 마리아랑 귀여운 세라타가 있으니까 소니아는 필요 없어.”
“……소니아 누나가 엄청난 눈으로 노려보시는데요.”
“흥~ 이라니까.”
뒤통수가 따끔따끔하다 싶었더니, 뒤에서 소니아가 엄청난 눈으로 노려보는 바람에 주안은 움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주안의 걱정 어린 말에도 안젤라는 주안을 꼬옥 안아주는 것도 모자라 소니아에게 베~ 하고 혀까지 내민다.
……대체 누가 앤지 모를 정도다.
“에휴, 마리아 누나랑 세라타만 한동안 피곤해지겠네요.”
걱정스럽긴 하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찰싹 달라붙어 수다도 떨고 할 거니까 주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녀올게요, 엄마.”
“……응.”
엄마가 꼬옥 안아주는 김에, 주안도 그런 엄마를 안아주었다.
볼록 나온 배가 아직 주안에게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 안에 자신의 동생이 있다는 것이 마냥 새롭기만 하였다.
마치, 지금도 동생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한 정도였다.
주안은 그렇게 한동안 엄마의 품에서 엄마의 향기를, 엄마의 온도를, 그리고 동생의 작은 심장 소리를 듣다 조심스레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엄마를 잠시 바라보다 그저 미소를 싱긋 지어준 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토미와 세라타, 피터가 주안을 보며 인사해 준다.
세 사람은 늘 그렇듯 가족 같은 친밀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 곁에 있는 워랜과 솔은 오늘 유독 많이 다툰 것인지 솔의 볼때기가 새빨개져서는 워랜과 두 걸음이나 떨어져 있다.
게다가 뭔가 잔뜩 불만스러운 듯 워랜을 보는 시선도 날카로웠지만, 워랜은 그런 솔을 무시하며 팔짱을 낀 채 하품만 할 따름이다.
그 모습에 주안이 작게 웃어 주었고, 부지런히 말들을 살피고 있는 도리안과 그 곁에서 돕고 있는 쥬도의 모습이 정말 새롭게 보일 정도다.
주안이 떠날 준비를 하자, 근처에 있던 세냐도 조심스레 날아오며 뒤따라오던 두 여동생, 마냐와 아냐에게 말했다.
“양치는 하루에 세 번씩, 밥은 꼭꼭 열 번씩 씹어 먹고, 간식 너무 먹지 말고 알겠지?”
“응!”
“네!”
저쪽도 세냐가 마치 엄마처럼 두 동생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 그러면.”
주안은 엄마에게서 조심스레 떨어져 말들이 있는 곳으로 자신의 가방만 가지고 걸어갔다.
그리고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오르자 도리안이나 쥬도, 워랜과 솔, 그리고 토미도 자신들의 말에 올랐다.
어느새 날아온 세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주안의 가방 주머니에 쏙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다 주안은 미소를 지으며 엄마를,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올게요!”
매우 간단한 인사였지만,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집이었기에 주안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도, 그리고 다른 가족과 가문의 사람들에게도.
주안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것이니 말이다.
* * *
황도를 벗어나 마를렌으로 향하는 중앙 가도를 따라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산골의 울퉁불퉁한 길도 아닌 반듯한 길이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다지만 길이 넓어 매우 쾌적했다.
때문에 빠른 속도로 달리는 주안 일행들은 멈춤 없이 그렇게 달려 나갔다.
하지만 주안은 아직 말을 타는 게 다른 사람들보다 미숙하였다.
이런 주안을 배려해서 길을 잘 알기에 일행들을 이끄는 도리안이 속도를 적절하게 조절하였다.
쉴 때쯤이 되면 마을이든 도시든 들어서 주안이 피곤하지 않도록 하는 게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지리에 밝고 이동과 도착 시점을 예상하며 사람들을 이끄는 그 솜씨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며칠을 달리고 달려 마르티네스 공작가 서부 변경 도시인 프로키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도 참 오랜만이네.”
주안은 프로키온에 들어선 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작년에는 마차를 타고 오간다고 제대로 못 봤죠?”
“응, 그렇지. 게다가 머물지도 않고 그대로 통과했잖아.”
황도에서 마를렌에 갈 때도, 마를렌에서 다시 황도로 돌아올 때도 지나쳤던 프로키온이었지만 이곳에서 머물고 가지는 않았다.
조금 더 가면 가신들의 영지 중 한 곳인 드류버 자작령이 있었기에 휴식은 그곳에서 취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안은 드류버 자작령에서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곳을 지나치긴 할 것이지만, 방문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다.
괜히 들러봐야 시간만 잡아먹는지라, 마를렌까지 빠르게 가야 하는 주안의 입장에서 쓸데없는 시간만 소모하는 격이었다.
때문에 주안은 마를렌까지 가는 길에 그 어느 가신들의 저택에도 들릴 생각은 없었다.
아니, 단 한 곳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로마니아 백작령에는 가봐야 하나, 고민인데…….”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중추 역할을 하는 3대 백작 가문이자 공작령 서부에 자리를 잡은 로마니아 백작가는 주안으로서도 그냥 지나치기가 조금 힘든 곳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드류버 자작령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기에 주안의 고민이 꽤 깊었다.
하지만 이런 주안과 마찬가지인 듯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냥 지나치면 좋겠는데…….”
“응? 왜요, 워랜 경.”
“괜히 피곤해질 거 같거든.”
“피곤? ……아.”
워랜의 말뜻을 이해한 주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밝혀진 워랜의 실력이기에, 동부 유이한 랭크 7의 노 기사가 과연 워랜을 보고 그냥 둘까?
주안은 당당히 아니라고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인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었지만 젊은 시절에는 현재의 벡브란 전대 공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맹장 중의 맹장이었다.
벡브란 전대 공작이 고릴라로 불렸다면,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성난 멧돼지에 종종 비유되었다.
다만, 주안이 기억하던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은 주안이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이어받고 1년 뒤 등을 돌렸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때 내가 무슨 짓을 했더라……. 아니, 엄마랑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거지…….’
그가 왜 떠나갔는지 주안은 그 결정적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결국 뭐가 되었든 엄마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가문이 쪼개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그도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떠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씁쓸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은 전혀 달랐고 앞으로가 중요하기에 주안이 애써 웃으며 워랜에게 말했다.
“로마니아 백작님이 분명 워랜 경을 그냥 두지 않으시겠죠.”
“내 말이. 그 영감님도 마리우스 영감님만큼이나 우악스러웠다니까.”
“헤에, 워랜 경은 그분을 보신 일이 있으셨어요?”
“봤지. 아니, 강제로 볼 수밖에 없었지. 벡브란 전대 공작님 때문에 억지로 봐야만 했으니까.”
“아하하…….”
왜 억지로 봐야 한 것인지, 주안도 대충 알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아니, 여전하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진 워랜은 정말 동부의 게으름뱅이로 정말 유명했었고 그 재능이 너무나 아까운 나머지 여러 사람이 나서서 워랜을 설득, 호통,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이 중에서 설득의 역할은 워랜의 어머니가, 협박의 역할은 아버지인 가론 노밀 자작이 담당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그리고 호통의 역할은 다름 아닌 벡브란 전대 공작의 역할이었다.
인재가, 동부에서 재능이 넘치는 기사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던 워랜이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며 재능을 낭비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던 벡브란 전대 공작은 이런 워랜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정말 많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말 그대로 호통도 쳤고, 가론 노밀 자작을 이용하기도 했으며, 워랜의 어머니를 내세우기도 했고 돈이면 돈, 여자면 여자, 작위면 작위, 뭐든 다 사용하여 회유하려고 하였다.
특히 벡브란 전대 공작은 거대한 두 인물을 끌어들여 워랜을 움직여보려 하였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바로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과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 이 두 사람이었다.
물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벡브란 전대 공작도 손을 털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냥 지나치긴 좀 그래요. 얼굴 정도만 비추고, 사정을 이야기한 뒤에 발을 빼는 게 나을 거예요.”
“하아……. 뭐, 어쩔 수 없나.”
워랜 역시 3대 백작가의 입지를 잘 알기에 주안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서 쉬면 좋으려나.”
“그야 당연히…….”
“……제일 비싼 곳이겠군. 도리안 경, 어딘지는 알아요?”
주안이 말을 안 해도 대충 알겠다는 듯, 이미 오면서 들리는 마을과 도시마다 그곳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곳에서 쉬었기에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주안 역시 호기심에 어디 허름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그곳에서 지내던 다른 이들이 더욱 불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랜의 말에 도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고, 주안이나 워랜, 그리고 다른 이들도 도리안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