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56화
“어이구야, 우리 도련님은 무슨 일을 이렇게 즉흥적으로 진행시키는 거람.”
대충 짐을 싸놓고는 피곤했던 것인지, 아니면 귀찮았던 것인지 쥬도가 자신의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워 작게 중얼거렸다.
올 때는 거의 빈 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사는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지라, 개인적으로 모아둔 돈은 꽤 넉넉했다.
아버지의 지원이 일절 없었어도 생활하기에는 부족함 없다 보니 이곳에 온 후 피터에게 괴롭힘 비슷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틈틈이 여가생활도 즐긴 쥬도인지라 황도의 민감한 유행에 나름 잘 따라갔다.
그 때문인지 쥬도의 방에는 꽤 많은 개인 물품들이 있었고, 작은 사치품도 있었을 정도다.
그저 그것을 다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게 정말 아쉬웠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면서 쥬도가 투덜거렸다.
“이것들을 다 못 가져간다니. 아까워 죽겠네. 발레리 녀석이 보면 아주 부러워 죽었을 텐데.”
“발레리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시겠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근거지인 마를렌에 적을 둔 상단은 쥬도의 아버지인 로닐이 상단주로 있는 홈멜스 상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홈멜스 상단 이상의 거대 상단들도 다수 있었다.
특히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답게 서로 왕래가 활발하였고, 마를렌을 근거지로 두고 같은 동방 무역에 나서는 린델 상단의 후계자, 발레리와는 나이도 비슷하고 행실도 비슷해서 상단 일 외에 따로 만날 정도로 자주 어울렸던 친우이기도 하였다.
“그 자식, 내가 사고 치고, 그거 때문에 황도로 가는 거 알고는 찾아와서 아주 제대로 놀리고 갔다니까.”
하지만 나름 잘 어울려 다니던 발레리를 떠올리자, 쥬도는 잔뜩 찌푸리며 이까지 갈더니 한 소리를 하였다.
다만, 도리안은 그런 발레리가 어떤 의도로 찾아온 것인지 알기에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스완슨 지방에서 한걸음에 달려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마를렌과 스완슨 지방이 하루 거리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야 하루 거리라는 의미였고, 발레리는 쥬도의 일에 대해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도리안은 쥬도의 유일한 벗이라고 할 수 있는 발레리에 대해선 꽤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흥, 걱정은 무슨…….”
쥬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 꼬인 성격 때문에 약간 삐딱하게 투덜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마를렌에 가는 것에 조금 들떴다는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어린아이의 작은 투정처럼 보이기에 도리안이 그저 작게 웃으며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나갔다.
이런 도리안의 차분한 모습에 괜히 자신만 들떠 투덜거리고 있던 게 아닌지, 영 불만스럽다는 듯한 쥬도였다.
그리고 도리안이 짐을 챙겨 드는 모습에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도리안 너도 선물 같은 거 안 챙겨 갈 거야? 그래도 몰리랑 하마르를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무슨 낯으로 그러겠습니까.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닌데…….”
몰리는 도리안의 아내였고, 하마르는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
쥬도와 도리안의 관계만큼 그 가족들과도 친분이 꽤 있었고 특히 쥬도는 하마르를 동생처럼 생각했을 만큼 아끼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리안의 표정을 보고 쥬도는 아차, 싶었다.
괜히 그 두 사람을 언급한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리안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은 막대기 하나를 들고 쥬도에게 말했다.
“선물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작은 것을 하나 준비는 하였습니다.”
“웬 목검이야?”
“토미의 것입니다. 토미에게는 새것을 사주고, 하나 받아 왔지요.”
“왜 그런 걸 받아와? 그냥 하마르한테 새 걸 사주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쥬도가 갸웃하자 도리안이 말했다.
“하마르도 병을 털고 일어나면 토미처럼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
“그건 건강함의 수준을 넘어선 듯한데?”
“예, 그렇긴 하죠. 닮았으면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작은 욕심일 뿐입니다. 그저 지금은 병을 털고 일어나, 토미처럼 이 목검을 들고 기사 놀이라도 하였으면 하는 바람뿐이니까요.”
도리안 역시 그저 아들이 병을 털고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정말 작은 욕심을 부린다면 토미처럼 검을 잡아보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면 하는 게 더 컸지만 말이다.
이런 도리안의 모습을 보니, 영 아닌 척해도 마를렌으로 가서 가족을 보는 것에 자신처럼 잔뜩 들떠 있다는 게 쥬도의 눈에 다 보였다.
물론 자신도 아버지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마주하기가 조금 겁이 났다.
이곳으로 올 때도 배웅조차 오지 않았던 아버지였고,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몰라서 머뭇거리게 되고,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쥬도는 마주하기 겁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아버지 뿐만 아니라 함께 해오던 고향 사람들…… 특히 자신과 함께 엄청난 짓을 벌였던 녀석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우리 애들, 상단을 떠나진 않았겠지?”
“모두 그대로일 것입니다. 다들 도련님이 오시길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아……. 선물이라도 좀 샀어야 했는데.”
그래도 나름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생활해 온 쥬도 자신의 전 호위들은 쥬도를 닮아 많이 껄렁껄렁한 녀석들이 다수였지만 그래도 정이 잔뜩 든 녀석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쥬도에게 구원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도리안과 마찬가지로 거의 맹목적으로 쥬도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시면, 그들에게도 쥬도 도련님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아마 다들 좋아하실 것입니다.”
“부, 부끄럽게 무슨…….”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저는, 정말 도련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우와, 도리안. 너도 나이 먹었다 이거야? 갑자기 왜 그래?”
형 같다고 생각했던 도리안이 마치 아저씨, 아니, 삼촌 같이 느껴졌고 게다가 푸근하게 웃는 그 미소에 쥬도의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사실 걱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요. 마를렌에서 도련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든 저희는 따랐지만,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제지를 하지 못한 것이 항상 후회스러웠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마를렌에 남겨진 그들은 아직도 죄스러움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은인이기에, 구원을 받았기에.
도리안을 포함한 쥬도의 호위들은 쥬도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따라주었다.
그게 화근이 되어 큰일이 벌어졌고, 쥬도와 도리안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도리안은 쥬도가 이곳에 와서 변해가는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마를렌에 남겨진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말을 쥬도에게 해주는 것이었다.
“아직도 쥬도 도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에 후회하는 녀석들이 많을 것입니다. 꼭, 쥬도 도련님이 이곳에 벌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삶의 공부를 하러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어휴, 다들 나이를 먹으면 그렇게 걱정만 많아지나…….”
하지만 쥬도 역시 도리안의 말에 그들이 여전히 자신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괜히 걱정되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라, 괜히 마음만 심란해졌다.
하지만 도리안 역시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재차 강조해서 쥬도에게 말했다.
“꼭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알았다고. 가서 뭐라도 제대로 보여주면 되잖아.”
항복을 선언하듯 쥬도가 두 손을 들고 말하자, 그제야 도리안도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가 있었다.
이 점에서 보면, 도리안은 정말 쥬도의 보호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손을 내리고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던 쥬도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래도 동부의 촌놈들이 참 성공했어. 황도의, 그것도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저택에서 다 지내보고 후계자 도련님이랑 말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니 말이야.”
“하하…….”
쥬도의 농담 같은 그 말에 공감해 버린 도리안은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케세니아 출신의 산골 촌놈이, 어떻게 제노폴 제국까지 흘러와 동부 최대의 항구라는 마를렌에 정착한 나름 성공한 삶을 사는가 싶었더니, 또 일이 꼬여 황도의 중앙귀족들도 어쩌지 못하는, 황가 다음가는 권력을 쥐고 있다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삶이 참 기구하지 않나 싶었다.
* * *
“야, 솔.”
“예?”
낑낑거리며 가방에 짐을 한가득 구겨 넣던 솔은 자신을 부르는 워랜의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워랜을 바라보았다.
뭔가, 참 뚱한 표정으로 테라스 난간 위에 요령 좋게 앉아 있던 워랜이 말했다.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웬 문제요?”
워렌이 좀 게을러서 그렇지 딱히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진 않았다.
적어도 황도 내에서는 말이다.
그렇기에 워랜의 말에 솔이 갸웃하자, 워랜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낀 채 작게 한숨까지 내쉬며 말했다.
“……나, 우리 아버지한테 랭크 오른 거 말 안 했어.”
“…….”
“화내겠지?”
워랜의 그 말에 솔이 짐을 가방에 꾹꾹 눌러 담던 손에 힘을 풀자, 해방된 옷가지들이 터져 나와 방 안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솔의 시선은 여전히 워랜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잠시 그런 워랜을 지켜보다 소리쳤다.
“그걸 아직도 말씀 안 드리고 있으셨어요?!”
“응.”
간단한 그 대답에 솔은 처음으로 워랜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대체 왜 그 중요한 걸 알려드리지 않으신 건데요!”
“말했잖아. 까먹었다고.”
“까먹을 게 따로 있죠! 그런 걸 까먹으면 어떻게 해요?!”
솔이 통통한 볼때기가 푸들거릴 정도로 소리치는 것에, 워랜은 확실히 지금의 일이 좀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솔이 이렇게 반항을 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아, 진짜 어쩌지. 그냥 솔 너한테 알리라고 시켰는데, 까먹고 못 알렸다고 할까?”
“나한테요?! 아니, 그래 봐야 도련님이 혼나는 건 마찬가지라고요.”
“그래도 둘이 같이 혼나면 조금은 덜 혼날 거 아니야.”
“완전 몰상식해! 어쩜 이렇게 악당인 거야?!”
키득거리는 워랜의 모습에 솔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누가 보면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겠지만, 솔은 워랜의 저 말이 진담인 것을 알기에 진심으로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워랜과 솔의 방에서 투탁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늘상 있는 일인지라 방의 앞을 오가는 저택의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 * *
요란한 워랜과 솔과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그에 잘 어울리는 너무나 단출한 방 안에서는 피터와 토미가 마주 앉아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가면 가론 자작님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단다.”
“예, 가장 먼저 가론 자작님에게 인사를 드릴게요.”
피터는 가론 자작이 토미에게 얼마나 엄청난 선물을 안겨준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단단히 일러두었고 토미 역시 피터의 이런 반응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후계자에게만 알려준다는 노밀 자작가의 마상술을 배운 외지인이 바로 토미였고, 말까지 선물을 받았다.
가론 자작이 토미를 얼마나 아끼는 것인지, 이미 마를렌에 가서 피터와 크게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느꼈던 부분이었다.
“그분께서 네 성장한 모습을 보면 크게 놀라실 거란다.”
“에이, 설마요. 아직 많이 부족한 걸요.”
피터의 말에도 토미는 그가 그저 칭찬 한마디 해준 것이라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만한 실력으로 성장한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이만한 실력 향상을 보인 이들은 하나같이 이후 대단한 기사로서, 대륙에 이름을 떨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말까지는 해주지 않는 것은 이런 말을 듣고 자만심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토미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어도 만에 하나라도 있으니 말이다.
“가서 주안 공자님이 하시려는 일을 네가 잘 도와주도록 하거라. 그래도 공자님은 너를 참 많이 믿으시고 가까이 두시려는 것도, 네가 단순히 나이가 같아서 그런 게 아님을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네……. 가끔은, 부담스러워도 그게 목표가 돼요. 지금은 모자라지만, 언젠가 정말 도련님 곁에 서도 모자라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목표가 있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곳에 닿고 싶었기에 힘들어도 참아낼 수 있었다.
토미의 그런 목표와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에 피터는 잘 짓지 않는 그런 미소도 토미의 앞에서는 매우 자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토미의 앞으로 슬며시 밀며 말했다.
“먹거라. 공자님의 말을 들어 보니 가는 길은 매우 급할 듯하니, 한동안 제대로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예, 잘 먹을게요.”
차도 꽤 달콤하였고, 토미의 입맛에 맞는 쿠키들도 잔뜩이다.
아니, 이 목석같은 기사님의 유일한 취미이자 귀여운 취향인 단 것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그것이 토미에게도 조금 전해진 듯, 토미 역시 요즘은 이런 단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누군가를 닮고 싶어 하는 만큼, 조금씩 닮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곁에 서고 싶은 사람은 주안일지라도, 토미가 닮고 싶은 사람은 마치 아버지 같은 피터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