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55화
“오빠, 준비 다 됐어?”
“아, 응.”
세라타의 목소리에 토미가 자신의 방에서 짐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긴 하였지만 사실 토미 입장에선 딱히 무언가 준비할 것도 없었기에 그저 간단히 작은 가방에 옷가지 몇 개를 넣고, 작은 상자 하나만 챙겨 들었을 뿐이었다.
방을 나오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세라타가 이런 토미를 맞이하였지만, 토미는 세라타의 모습을 보고는 잠시 갸웃하며 물었다.
“그 짐은 다 뭐야?”
“뭐긴, 도련님 짐이지.”
“아…….”
주안은 아버지를 만나러 황성으로 갔기에 그런 주안의 짐을 직접 챙겨주는 역할을 전적으로 세라타의 몫인 듯했다.
꽤 많은 짐에 놀라긴 했지만, 그보다 앞서 세라타가 토미의 단출한 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빤 아무것도 안 가져가는 거야?”
“그래도 최대한 많이 챙긴 거야.”
“하아…….”
토미가 직접 자신의 가방을 열어 보여주면서 세라타를 안심시켜 주려는 듯했지만, 오히려 세라타의 마음만 더욱 심란하게 만드는 짐의 양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자신을 위해 물건을 참 안 사는 듯하여 세라타는 조금 안쓰럽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런 짐들 속에 낯선 물건이 하나 보여 세라타가 갸웃하며 물었다.
“응? 그런데 그건 뭐야?”
“아, 이거?”
작은 나무 상자였지만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내며 생활하다 보니 번쩍번쩍 한 고급스러운 물건들에 대해 꽤 익숙해져서인지, 오빠의 허름한 가방에 있는 꽤 비싸 보이는 상자는 세라타에게 의문스러운 물건이었다.
이런 세라타의 모습에 토미가 작게 웃으며 상자를 집어 들어 세라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가론 자작님에게 드릴 선물.”
“가론 자작님? ……아.”
잠시 갸웃하던 세라타였지만, 가론 자작이 누구인지 토미에게 들었던 사실을 떠올린 듯했다.
“가론 자작님이 나한테 말을 선물해 주셨었거든. 알지?”
“응, 알지.”
마를렌에서 돌아왔을 때 오빠가 보여준 멋진 말은 여전히 저택의 마구간에 잘 있었고 틈틈이 솔이나 피터와 함께 그 말을 타고 외출을 하였었다.
“더 좋은 것으로 답례해 드리고 싶은데, 아직 큰 선물을 할 정도는 아니라서…….”
주안의 하인으로 지낼 때야 급여를 받고 당당하게 일을 하였지만, 지금의 토미는 돈을 벌고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저택에서 의식주를 책임져 주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토미의 용돈을 책임지는 것은 전적으로 세라타이기도 하였다.
물론 급여는 넉넉하였고, 두 사람 모두 무언가 개인적으로 돈을 쓰는 일도 거의 없다 보니, 모아둔 돈은 꽤 되었다.
게다가 토미는 짧은 시간 주안의 하인을 하며 받은 급여가 있었고,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모은 금액의 많은 부분을 사용해 가론 자작에게 받은 선물에 대한 답례를 준비한 것이었다.
비록 그렇게 많은 돈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 토미는 가론 자작에게 잘 어울린다 생각하였던 브로치를 보고는 고민하다 사두었었고, 올해 마를렌에 다시 갈 때 꼭 선물을 해주고 싶어 하였다.
조금 일찍 선물해 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가론 자작이 이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지 걱정되어 토미의 표정은 썩 좋지는 않았다.
이런 오빠의 심정을 이해한 듯 세라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것도 멋진데……. 설마 나한테 용돈 더 달라고 해서 비싼 걸 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지?”
“아, 아니야.”
그래도 여동생에게 용돈을 받고 산다는 게 좀 많이 부끄러운지, 세라타의 말에 토미가 볼을 발갛게 붉히며 움츠러들었다.
이런 오빠의 모습에 세라타가 쿡쿡거리며 작게 웃어주며 말했다.
“나중에 훌륭한 기사님 되어서 더 멋진 거 선물해 드리면 되잖아. 그리고 그분도 오빠가 이렇게 작지만 멋진 선물을 준비한 걸 알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세라타, 넌 가론 자작님 본 일 없잖아?”
“오빠한테 귀가 따갑도록 들었거든? 콧수염이 멋진 분이시라며?”
“그건 그렇지만…….”
여전히 기억하는 가론 자작의 작은 버릇인 콧수염을 매만지는 그것을 생생히 기억하는 토미였다.
마를렌에 가서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보았던 것인지 세라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었다.
그땐 몸이 아파서 가지 못 하였던 세라타였고, 이번 역시 말을 타지 못하는 세라타인지라 함께 가지 못하는 게 토미에겐 못내 아쉬웠다.
이런 오빠의 표정만 봐도 다 알 수 있다는 듯 세라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음에 가면 된다니까. 이번 전대 공작님 생신 때는 다 같이 갈 수 있잖아.”
“……응.”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닌, 마음도 그만큼 강해지고 성장한 그 모습이 정말로 다행스러웠고 그만큼 미안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도련님 짐들이 꽤 많네?”
“응! 안젤라 님이 도련님이 뭘 가져가시는지 보고 싶다고 가져와 달라고 부탁하셨어.”
“아…….”
한가득 든 짐이 주안의 것임을 대충 예상하였지만, 안젤라가 직접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고 싶어 한다는 것에 토미도 조금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반대하지 않으실까, 조마조마했었는데 그것은 단지 토미의 기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짐들 속에서 세라타가 낯이 익은 허리띠를 집어 들고 토미에게 불쑥 내밀며 방긋 웃으며 말했다.
“짜잔~ 여기 마법의 허리띠도 챙겼어. 잘했지?”
“……그거 도련님이 버린 건데.”
허리에 차기 무섭다고 버려둔 것을 챙겨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가져온 것에 토미가 식은땀을 흘렸다.
저것을 본 주안이 경기를 일으킬 수 있었기에, 괜히 걱정되었다.
왜 그런지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참 꺼려진다는 것만은 토미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세라타는 오빠의 모습에 그저 갸웃할 뿐이었다.
“그, 저기, 그건 두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왜에? 세냐가 특별이 신경 써서 고쳐놓았다고 나한테 자랑도 했던 거야. 남자한테 엄청 좋다고 하던데?”
“……그게 문제 같은데.”
남자에게 어떤 형태로 좋은 것인지에 대해선 설명해 주지 않은 듯했지만, 세라타 입장에선 도련님의 몸을 좋게 한다고 하니 그저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토미 역시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 여동생과 괴로워할 도련님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다 결정을 내린 듯 조심스레 세라타에게 말했다.
“……자, 잘했어.”
“응!”
이렇게 좋아하는데, 버려두고 가자는 말을 토미는 차마 세라타에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주안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이 커져만 갔다.
* * *
“안젤라 님.”
“응? 왜?”
뒤뚱거리며 방을 돌아다니고, 무언가 잔뜩 챙겨 들어 가방에 집어넣고, 세라타가 가져온 주안의 짐을 다시 꼼꼼히 살피던 안젤라를 본 소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보석이랑 금덩이는 대체 다 뭐예요?”
“우리 애 용돈.”
“……용돈이 아니라 어디 영지라도 사려고 주는 돈 같은데요?”
수북하게 쌓인 보석들은 안젤라가 예뻐서 모아둔 것도 있지만 사실 주안을 위해서 준비해 둔 비상금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많은 보석과 금덩이들을 챙겨두면서도 안젤라는 영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지금 현금이 별로 없단 말이야. 이걸 돈으로 바꿔 오면 좋을 텐데…….”
“아무리 황도 보석상이 크다 해도 그걸 다 어떻게 사요? 어디 거대 상단에서 몰래 숨겨둔 비자금으로도 다 못 살 거예요.”
“흥, 이게 얼마나 한다고 그러니.”
“……금전 감각도 참 없으시네요.”
“넌 잔소리만 많거든?!”
소니아의 말에 안젤라가 발끈하며 노려보자, 소니아는 정말 안젤라가 못 말리겠다는 듯 이마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여기, 이 돈주머니는 또 뭐예요? 이것만 가져가도 한 달은 호화 휴양지 전체를 빌려서 흥청망청 쓴다 해도 반도 못 쓸 거 같은데…….”
“겨우 그걸로?”
“겨우, 가 아니라고요.”
보석만이나 금덩이만으로는 확실히 좀 모자라고 급히 쓰기에는 무리라 판단하여 금화들도 모아서 준비하긴 했지만, 소니아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들기도 힘들 정도로 묵직한 돈주머니는 그녀의 말대로 어디 호화 휴양지 전체를 다 빌려서 쓰기에도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만약 이런 걸 주안 도련님에게 쥐여주었다는 걸 공작님이 아시면 절대 가만 안 두실 걸요.”
“흥~ 이다, 뭐. 하나도 안 무섭거든?”
“주레인 공작님 말고요. 벡브란 전대 공작님이요.”
“윽……!”
남편은 하나도 안 무섭지만, 시아버님은 좀 무섭기에 안젤라도 움찔 놀란다.
그녀가 공작령에 내려가 살지 않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시아버님 때문이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이 묵직한 돈주머니를 이렇게 조금 덜어내서 가져가라고 하세요. 모자라면 그냥 공작령 내의 가신들 가문에 들러서 돈 좀 융통하면 되잖아요.”
“쳇, 우리 애가 뭐가 아쉽다고 가서 손을 벌려야 한다는 거야.”
안젤라가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소니아는 돈주머니에서 금화를 한 움큼 꺼내 다른 주머니에 담았지만, 사실 이만큼 옮겨 담아도 정말 흥청망청 써대도 상관없을 금액이었다.
이만큼 담은 이유도 안젤라 때문이었지만, 정말 마음먹고 돈을 덜어낸다면 금화 열 닢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소니아 때문에 입술까지 삐죽이며 툴툴거리던 안젤라는 고풍스러운 상자를 꺼내었다.
그것을 본 소니아가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그건 또 뭐에요?”
“흐흥~ 놀라지 마시라.”
싱글거리는 안젤라의 모습에 소니아는 심각한 두통을 느꼈고, 이런 소니아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젤라가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 소니아에게 자랑하듯 소리쳤다.
“짜잔~! 이거 봐. 방금 급하게 황립마탑에 의뢰해서 가져온 우리 주안이를 보호해 줄 마법 도구!”
“그거 설마…….”
안젤라가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고풍스러운 장갑 한 쌍을 어루만지며 소니아에게 자랑하였다.
그리고 그 장갑을 보고 소니아는 흠칫 놀랐다.
그래도 소니아 역시 마법사이고 황립마탑 소속이자 마이스터 모레노의 수많은 제자 중 한 사람인지라, 안젤라가 들고 있는 마법 도구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용히 손을 뻗어 안젤라의 손을 붙잡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살인 도구는 아니 되옵니다.”
소니아가 처음으로 안젤라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였다.
안젤라가 들고 있는 마법장갑은, 닿는 존재를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마법도구이다.
참고로 너무나 잔인한 마법도구로 취급이 극도로 중요시되었기에 아무에게 파는 물건도 아니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이것을 빼내 온 것인지, 그것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이 자리에 가져오게 한 것인지 소니아로서는 정말 이해도 안 되었고 안젤라의 그 쓸데없는 능력이 참 대단하기도 하였지만 황립 마탑이 아주 타락을 해버렸다는 절망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이런 소니아의 주의에도 안젤라가 볼을 잔뜩 부풀리며 소리쳤다.
“우리 애한테 몹쓸 짓을 하면 3대를 멸해도 괜찮거든?!”
이런 안젤라의 말에 소니아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나도 안 괜찮잖아요! 아니, 곧 출산하실 아기 어머님께서 이런 험한 생각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태교에 하나도 안 좋잖아요?!”
“흥! 우리 작은 애도 형이자 오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잔뜩 키우면 좋잖니.”
“아니, 이젠 마마보이도 모자라 브라더 콤플렉스라도 심어줄 생각이세요?!”
“어머, 동생이 형이자 오빠를 좋아하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잖니.”
“완전 이상해!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행동에 소니아는 상상 그 이상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안젤라의 황당함에 치를 떨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서로 투탁거리며 다투는 공작부인과 나름 이름 높은 가문 여식의 다툼을 본 평민, 마리아와 세라타는 정말 다른 세계 사람들의 이상한 모습에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