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38화
“저기, 백작님?”
뭔가, 갈색에 가까운 그을린 그의 구릿빛 피부가, 특히 얼굴이 왠지 하얗게 질린 듯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저 우직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백작님의 새로운 모습이 신기했지만,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다만 주안은 침착하게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혹시 아시는 분이세요?”
주안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바스티아노 백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족이네.”
“예?”
“우리 가문의 가장 큰 어르신인 마누엘 전대 대신관……. 아니, 마누엘 바스티아노 조부님일세.”
이번에는 주안이나 워랜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뭔가 묘하게 닮긴 했는데…….’
저 비정상적으로 잘 어울리는 근육이 왠지 낯이 익다 했더니 딱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몸과 흡사했다.
‘그런데 조부님……? 아, 하긴. 마누엘 전대 대신관님이 거의 백 살이 다 되셨지.’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나이를 생각하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분이 정말 바스티아노 백작가의 어르신이셨어요? 그런 말씀은 전혀 안 하셨는데…….”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대접을 해드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니지. 전대 대신관님 취급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다지 상관없었으려나.’
하지만 이런 주안의 질문에 바스티아노 백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관이 되시고는 가문과 연을 끊으셨으니 어쩔 수 없으셨겠지.”
“으음…… 특이하긴 하시네요.
보통 신관이 된다고 해서 속세와 연을 끊거나 하진 않는다.
단지 제노폴 제국에선 결혼하지 못할 뿐이며, 이미 결혼한 이라면 이 부분에서 역시 자유로웠다.
게다가 다른 왕국에서는 결혼도 허용하는 대신전이 있었으며, 같은 신을 믿는다 해도 지역에 따라 교리 자체도 달랐다.
무엇보다 대신전마다 독립된 부분이 컸기에 교리도 제각각인 부분이 많았다.
“크흠, 이미 돌아가셨을 거라고 다들 생각하였네만…….”
“대체 얼마나 연락을 안 하고 지내신 거예요. 아니, 그보다 바스티아노 백작님보다 훨씬 정정해 보이셨어요. 앞으로 반세기는 더 사셔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거든요.”
“…….”
반세기가 무엇인가. 주안이 보았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앞으로 1세기는 더 살아도 정정할 괴물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신성력을 지닌 신관들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해도 마누엘 신관은 정말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듯 세월을 거슬러도 한참 거스른 몸과 건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전에 기사였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 후로도 꾸준히 몸을 단련해서인지 웬만한 기사, 아니, 눈앞의 바스티아노 백작의 몸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부 대밀림에서 라쿰바의 팔을 부러뜨리고 승리함으로써 손님으로 인정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아니, 잠깐. 그럼 설마 마누엘 신관님도 랭크 7이라 뭐 그런 소리인가……?’
게다가 라쿰바보다 강하다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기, 쓸데없는 질문이긴 한데 한 가지만 해도 되나요? 바스티아노 백작님.”
“하게.”
“혹시 가문에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수련법이라도 있으세요?”
“없네.”
간단한 답에 주안이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가문의 타고난 재능인가 보네요.”
“음? 무엇이 말인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워랜은 뜬금없이 나타난 재능을 지닌 이였다면, 바스티아노 백작가는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육체의 재능인 듯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런 몸인 것을 보니, 선대 가주이자 에드워드 바스티아노 백작의 아버지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주안은 그렇게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후우……. 어쨌든 그분께서 여전히 정정하시다 하니, 한번 인사는 드리러 가야겠네.”
“곁에 귀여운 원주민 친구도 계시거든요. 한번 말씀 잘해보시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어요.”
“원주민과 함께라…….”
주안의 말에 바스티아노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집안과는 연을 끊어버린 조부가 오히려 남부 대밀림을 오가며 그곳의 원주민과 교류하고 친구까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를 통해서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런 바스티아노 백작을 보며 주안이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를 보며 주안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바스티아노 백작님.”
사뭇 진지한 주안의 모습에 바스티아노 백작도 큰할아버지 생각에 복잡하던 것을 정리하고는 주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맑고 투명한 푸른 눈은 오래전에 모셨던 안젤라 공작부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약하고 어리숙하다고 평가받던 주안의 예전 모습은 없었다.
대신 이제 곧 성인이 되는…… 매우 훌륭한 공작가의 후계자의 모습을 보이는 주안의 모습에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그의 입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는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 제가 언급했던 랭크 8의 실력자인 메데아 대족장님을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예요. 아니, 접촉 자체를 하시면 안 된다고 봐요.”
“어째서 그러나. 잘못하면 제국이 아닌 타국에 협력할 수도 있네. 그렇게 된다면 제국에는 큰 위협이 된다네.”
“아니요. 그들은 바깥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관심 자체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약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바깥에 눈을 돌릴 여유도 없고, 바깥 주민들과 연관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아요.”
“여유가 없다니?”
관심을 두지 않고 멀리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여유가 없다는 말에는 바스티아노 백작이 갸웃했다.
그런 그를 보며 주안이 조용히 말했다.
“마수 때문이에요.”
“마수라……. 알고는 있네. 남부 대밀림의 깊숙한 곳에 사는 포악한 동물들…….”
“예, 맞아요. 그리고 그들은 항상 마수들과 생존을 건 전투를 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그런 존재가 나타난 것인가…….”
사실 사이캄 대제의 캄파티아 제국이 무너진 뒤 제노폴 제국의 등장과 함께 서방 대륙의 분쟁은 거의 종식이 되어버렸고 꽤 오랜 시간에 걸쳐 평화를 유지했다.
국가 간의 전쟁 자체가 매우 드물었으며, 그나마 가장 최근 일어난 전쟁도 아스란 왕국과의 전쟁이지만 그것은 전쟁이라기 보는 제국민은 얼마 없었다.
그것은 징벌일 뿐이니 말이다.
어쨌든 꽤 오랜 시간을 분쟁 없이 지낸 점은 분명 다행스럽지만, 그만큼 기사들의 실력도 전쟁이 있던 당시보단 매우 떨어져 있었다.
자고로 실력자란 평화로운 때보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많이 등장한다.
실제로 동방 대륙은 현재도 분쟁이 상당하였고, 꽤나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서방 대륙 내에서는 남부 대밀림의 깊숙한 곳에서만 나타난다는 미지의 동물, 마수들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요물들이 동방 대륙 내에 나타나 난동을 피웠다.
그 때문에 국가 기관에서 버거운 일들을 민간의 무사들이 나서서 일을 해결해야 할 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혼란스러움 때문인지 무사들의 실력이나 질적인 우위가 점차 서방 대륙을 넘어서고 있었고 그것을 제국이나 서방 대륙의 국가들도 이미 파악하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민을 해봐야 해결되는 일은 없었으니, 그저 그들의 분쟁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랄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주안 공자, 내가 머뭇거린다 하여도 황제 폐하께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네.”
“외할아버지, 아니, 황제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외할아버지라는 말에 주안이 황급히 말을 바꾸었지만, 이런 주안의 실수에도 바스티아노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 어디에도 황제 폐하에게 편하게 할아버지라 부르는 이는 없었다.
현재의 황자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으며, 황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안젤라 공작부인과 주안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족적이고 인간적인 부분은 황제도 매우 좋아하고, 이들 모자가 찾아 왔을 땐 제국의 황제가 아닌 그저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가 되는 기분이라는 것은 곁에서 늘 지켜보던 바스티아노 백작도 잘 아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었고, 오히려 그렇게 권하고 싶어 하였다.
“적어도 자신할 수 있는 건, 메데아 대족장님은 절대 다른 왕국과도 손을 잡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에요.”
“그러면 다행이네만…….”
바스티아노 백작이 걱정하는 것은 타 왕국이나 동방 대륙의 이들과 손을 잡고 제국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것만 해결이 된다면 꼭 제국의 편에 서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을 마뜩잖아하는 이들도 다수 있을 것이고, 괜히 끌어들이면 제국 내에서 분쟁만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면 어찌할 생각인가.”
“…….”
주안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그분을 초대해서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볼게요.”
“초대? 진정 그게 가능한가?”
“어차피 한번 집으로 초대할 생각이었어요. 약속도 했었거든요.”
“허허…….”
서방 대륙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그것도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을 마치 친한 친구를 집으로 부르는 것처럼 하는 주안의 모습에 바스티아노 백작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손님으로 초대할 뿐이지, 제국의 편에 서달라는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어요. 이 부분은 제가 외할아버지, 아니, 황제 폐하에게도 말씀을 드려볼게요.”
“그것만으로도 되었네.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어.”
바스티아노 백작이 가장 크게 걱정하는 것은 메데아 대족장이 타국과 연결되는 것이지, 꼭 제국과 연결됨을 바라는 것은 아니니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는 한 가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다른 가문들이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을 더욱 경계할 수가 있네. 괜찮겠나?”
“어쩔 수 없죠. 제 실수 때문에 일어난 일인걸요. 제가, 아니, 저희 가문이 해결해야죠.”
담담하게 말을 하는 주안을 보며 바스티아노 백작은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사실 그만한 실력자와 연이 있다면 어떻게든 그 힘을 빌려 무언가를 하려는 이들이 대다수일 것인데, 주안에겐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의 사정이 더 중요한 듯, 이렇게 말을 나누어 보니 주안의 성격이 어떤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이전까지 그렇게 속을 썩이고 걱정을 하게 만든 아이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런 건 아무렴 어떠냐는 듯, 바스티아노 백작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면 그 부분은 맡기겠네.”
바스티아노 백작의 말에 주안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할게요. 그리고 백작님.”
그리고 주안이 조심스레 말을 이으며 바스티아노 백작에게 말했다.
“그렇다 해도 마누엘 신관님을 한 번 만나봐 주세요. 사실 전 마누엘 신관님에게 가족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
주안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바스티아노 백작이었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바스티아노 백작가에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누엘 신관이 살아 있었던 것인지 죽었던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매우 소원한 관계라는 것을 듣자, 괜한 참견일 수도 있으나 그의 등을 조심스레 떠밀어 주었다.
사실 좀 껄끄러운 관계였다면 이러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눈앞의 이 덩치 큰 백작님과 더욱 큰 노신관의 관계는 그렇게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저 서로 데면데면한 느낌뿐이었다.
그것은 자주 만나다 보면 조금씩 가까워지는 부분이니, 주안의 참견은 이런 두 사람이 만나는 것까지가 끝이었다.
그리고 바스티아노 백작 역시 딱히 싫은 것만은 아닌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답례로 황성에서 대신전으로 가는 길까진 함께해 주도록 하겠네. 아마 자네를 보려고 꽤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꼭 부탁드립니다.”
주안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부탁하자, 바스티아노 백작도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무리 봐도 참 이상한 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