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37화
“랭크 8……?”
바스티아노 백작이 조용히 검을 내리며 작게 중얼거리자, 워랜 역시 움직임을 멈추고 혀를 차며 주안 쪽을 흘겨보았다.
“저 바보 공자님은 뭘 제대로 숨기는 게 없어.”
자신의 경지를 들킨 것도 어떻게 보면 주안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종종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모두를 놀랍게 만들었지만, 가끔 이렇게 어리숙한 모습으로 허점을 보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워랜 경, 주안 공자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주안이 쩔쩔매는 모습에 질문하기 미안했던 것인지 바스티아노 백작은 주안이 아닌 워랜에게 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의 눈빛도 매우 날카로웠지만 이곳에 모인 다른 실력자들의 압박도 상당했다.
그들 역시 랭크 8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듯했다.
무엇보다 이 서방 대륙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못했던 랭크 8이었다.
그나마 가장 근접했다고도 하는, 아니, 어쩌면 랭크 8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는 사이캄 대제가 있었지만 그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다.
동방 대륙과는 달리 이곳, 서방 대륙에서는 도통 나타나지 않는 그 인간 이상의 경지라 일컬어지는 실력자가, 무를 숭상하고 기사도를 숭배하는 제노폴 제국도, 타 왕국도 아닌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 중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듯했다.
아니, 믿을 수 없는 것만이 아니라 일부는 있어선 안 된고 생각하는 듯했다.
워랜은 이들의 압박을 받으면서 지금 이 상황이 주안에게 향한 것이 아닌 자신에게 향한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 느껴졌다.
주안이었으면 주저앉았을 그런 심한 압박이었다.
‘아니, 에밀리 경이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을까.’
뭐가 되었든 지금은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은 다행스러우면서도 주안에게 불평을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상황이긴 했다.
“거긴 저보다, 아니, 백작님이나 서방 대륙의 실력자들도 어찌하지 못 하는 괴물이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
“주안 공자의 명예를 걸지요.”
“자네의 명예가 아니라?”
“제 명예보단 주안 공자의 명예가 더 무겁잖습니까. 뭐, 거기에 제 하찮은 명예도 걸어보도록 하죠. 진실입니다.”
“…….”
처음에는 농담으로 들렸지만, 자신의 명예까지 걸며 진지하게 답하는 워랜의 모습에 바스티아노 백작이 얼굴을 잔뜩 굳히며 물었다.
“적의는 있던가.”
“없습니다.”
“대밀림 바깥으로 나올 가능성은 있나.”
“전혀요.”
진지한 바스티아노 백작과는 달리 워랜은 여유로웠고, 두 사람의 대화를 집중해서 듣는 다른 이들 역시 바스티아노 백작과는 분위기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나 보았다는 것은 교류를 쌓았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자네와는…….”
“딱히 저와는 인연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아쉽군.”
적이 아니라면 아군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으며, 그런 미지의 실력자와 워랜이 만약 호감이라도 쌓고 친분이라도 다졌다면 이는 실로 대단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접점을 전혀 찾지 못하였다는 듯한 워랜의 반응에 바스티아노 백작이 매우 크게 아쉬워하였다.
만약 이런 접점을 새기고 인연을 쌓았다면 제국에서는 매우 큰 힘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이런 바스티아노 백작의 모습에 워랜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주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접점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주안 공자 말인가?”
“예.”
워랜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스티아노 백작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자네, 시간은 더 있겠지?”
“없어도 만들어야 할 판이군요. 주안 공자도 끌고 갈까요.”
“부탁하네.”
이것은 워랜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였기에 단번에 승낙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적어도 바스티아노 백작의 초대에 끼어들어 주안이나 워랜을 납치해 갈 인물은 없을 터이니, 두 사람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결국 링베르가 공작가의 인물인 사무엘 그리마 경 정도였지만, 그 역시 지금의 주안이나 워랜을 붙잡고 무언가를 물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링베르가 공작가에 이 사실이 흘러 들어갈 것을 알기에 조금 찝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저 공자님은 잘하시다 이상한 곳에서 거하게 사고를 치시나 몰라.”
그래도 그런 허점투성이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기에 워랜이 미소를 지으며 주안과 에밀리 펜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뭐가 되었든 이 일은 주안이 알아서 할 일이다.
자신은 저택에 있거나 아스란 왕국으로 떠나면 완벽한 자유이기에 꽤나 여유로웠다.
* * *
주안과 워랜 그리고 에밀리 펜버는 바스티아노 백작을 따라 그의 개인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몇몇 사람들이 따라오는 듯했지만, 그것도 황실근위대가 머무는 곳까지는 무리인 듯했다.
“앉지.”
이전까지는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의 집무실이었지만, 사람이 바뀌었다 해서 내부도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전대 단장이나 현 단장이나, 두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이 정반대일지라도 화려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지라 방을 꾸민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때문에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 있을 당시의 방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그저 바스티아노 백작 그의 개인 물품 몇 개만 더 놓았을 뿐이었다.
바스티아노 백작의 권유로 주안과 워랜 그리고 얼떨결에 따라온 집안사람인 에밀리 펜버도 자리에 앉자, 바스티아노 백작 역시 소파에 앉았다.
“주안 공자, 사실인가?”
황실근위대에 들어가면 다들 이렇게 직설적으로 변하는 것인지, 피터와 분위기가 매우 비슷한 바스티아노 백작의 모습에 주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랭크 8이라는 분 말씀이세요?”
바스티아노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말씀을 드린다면, 단순한 제 느낌일 뿐이에요.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에겐 저희처럼 체계적으로 힘의 등급을 나누지 않았으니까요.”
“단순한 느낌이라고 보기에는 꽤 확신에 찬 모습으로 보이네만.”
“…….”
그야, 주안은 이전 삶 속에서 서방 대륙의 등급으로 절대자에 올랐던 토미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까지 말을 하지 못하였기에 주안은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이런 주안의 모습에 바스티아노 백작은 워랜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워랜 경, 그대의 판단은 어떤가.”
“제 판단이라…….”
바스티아노 백작은, 주안이 검을 쓰지 못하는, 애초에 검을 배우지도 못하는 일반적인 귀족가의 아이기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함께 있었다는 워랜에게 답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런 바스티아노 백작의 질문에 워랜이 팔짱을 낀 채 무언가 곰곰이 생각을 한참 하다가 입을 열었다.
“검을 꺼내기도 전에 살의를 품는 순간 죽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
“뭐, 실제로 싸운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길 방도가 떠오르진 않았습니다.”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메데아 대족장에 대해선 도통 공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워랜이었다.
자신의 스승인 풍신과도 몇 번이나 검을 나누었고, 자신이 아직 확실히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아스란 왕국으로 가서 제대로 검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긴 하여도 보는 눈까지 미숙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스승인 풍신과 함께 검을 들고 덤빈다 해도 메데아 대족장을 이기기는 어렵다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여 메데아 대족장을 공략해보려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워랜의 모습과 말과 그 행동에서 바스티아노 백작은 매우 복잡한 듯했지만, 그의 표정 자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실력을 보았나?”
“제대로 본 것은 아니지만, 제 검을…… 검기가 실린 제 검을 맨손으로 잡아버리더군요.”
“……확실하다는 말이군.”
바스티아노 백작도 검기가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검기가 실린 검을 맨손으로 잡았다는 것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단순한 검이라면 미칠 듯한 육체의 능력을 지닌 서방의 기사들도 가끔 맨몸으로 튕겨내기도 하고 붙잡아 버리기도 한다.
바스티아노 백작이 심심찮게 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동방 대륙의 무사들이 이런 미친 행동들을 하는 서방 대륙의 기사들에게 하나같이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평가하는 이유였고, 검기를 다루지 못하는 무사들이 서방 대륙의 기사들에게 밀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검기를 다루는 이들에겐 매우 취약하여 최고수로 분류되는 이들에겐 오히려 서방 대륙의 기사들이 밀렸기에 그나마 양 대륙의 균형이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동방 대륙의 검의 절정이라 불리는 게 바로 검기였고, 이 검기를 통해 잘라내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도 알려졌다.
서방의 기사들이 검에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겨우 동방의 검기에 맞설 수 있었으며, 극한으로 단련한 몸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니, 오히려 실력의 절반밖에 내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검기를 맨손으로 붙잡았다는 것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아도 확실하다고밖에 보이지 않기에 바스티아노 백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폐하께서 들으신다면, 아니, 대륙에 이 사실이 퍼진다면 남부 대밀림에 수많은 이들이 사신으로, 그자를 회유하러 가겠군.”
“으으음……. 그건 진짜 큰일인데요.”
이런 바스티아노 백작의 한숨 섞인 말에 주안이 매우 곤란한 듯 말했다.
“큰일? 아, 하긴……. 남부 원주민들이니, 대륙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겠지…….”
지금의 세대야 모르는 이들이 다수이겠지만 이런 군사 쪽에 몸담은 이들은 여전히 남부 대밀림과 대륙의 관계가 껄끄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과 대륙의 사람들은 친하게 지낼 수 없었고, 분쟁도 매우 컸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연을 넣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갈 것이 뻔하다네. 하지만…….”
눈앞에 거대한 황금 덩어리가 있는 이상, 그것을 줍기 위해서 너도나도 달려들 것이니, 바스티아노 백작이 생각하는 제국도 멍하니 있을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다만 이런 제국은 다른 이들보다 한 발자국 앞서 있다는 것에 안심을 하며 주안에게 말했다.
“그나마 우리 제국에는 주안 공자,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지 싶군.”
“예? 저요?”
“워랜 경에게 들었네. 랭크 8과 동급인 그 실력자와 주안 공자, 자네가 연이 있다지?”
“으음,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데리고 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예상이 갔기에 주안은 조금 곤란해졌다.
바스티아노 백작은 주안을 통해서 메데아 대족장의 영입, 혹은 제국과의 친분을 쌓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을 주안은 들어줄 수 없었기에 고민을 하다 말을 꺼냈다.
“사실 저보다 더 인연이 깊은 분이 계세요. 애초에 남부 대밀림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도움이 컸고, 손님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도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이셨어요.”
“음? 다른 사람이 있었나?”
주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바스티아노 백작은 오히려 다행스러워 하였다.
이미 한 번 남부의 아스란 왕국을 다녀온 주안이었는데, 다시 이런 부탁을 하기에는 굉장히 곤란하였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를 사신으로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임신 중인 안젤라 공작부인이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떠올라 쉽게 할 수 있는 부탁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있을 수 없는 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되면 모르는 것이며, 황제의 부탁이라면 주안도 마지못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있다면 주안에게 이런 억지스러운 부탁을 할 필요도 없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혹 제국의 사람인가.”
바스티아노 백작의 물음에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다행히 아직 제국에, 황도에 머물고 계시지만, 그분에게 부탁하셔도 사실 소용이 없을 거예요.”
“괜찮네. 만나보는 것은 내가 할 것이고 부탁 역시 내가 하겠네.”
아무리 바스티아노 백작이라도 소용이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곁에 있던 워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워랜과 눈빛을 교환하던 주안은 워랜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주안이 바스티아노 백작에게 말했다.
“현재 대신전에 머물고 계시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님이세요. 그분은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분들에게 손님으로 대접을 받으셨고, 저희도 그분을 통해서 그곳으로 갔어요.”
“……마누엘?”
하지만 주안의 말에 바스티아노 백작이 흠칫 놀라더니 몸을 잔뜩 굳혔다.
“바스티아노 백작님?”
주안의 물음에 바스티아노 백작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니, 오히려 안색이 조금 나빠진 것이 보였고 왜 그런지 몰라 주안은 그저 갸웃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