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32화
최근은 링베르가 공작가의 일까지 겹쳐서 그런지 주레인 공작이 황성에서 저택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매우 불규칙적이었다.
오늘은 특히 더 그랬으며,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온 그는 아직 잠들지 않고 자신을 기다리며 단둘이 만남을 요청한 아들의 모습에 의아해하였다.
하지만 피곤하다 해도 아들이 이 시간까지 기다려 준 것이 꽤나 큰 기쁨으로 다가오기에 피곤함도 잊은 채 자신의 서재에서 주안과 마주 앉았다.
“피곤하셨을 텐데, 죄송해요. 아빠.”
얼마 전에는 이런 자리에서 분위기를 잡고 아버지라 부르더니, 다시 아빠라 부르는 그 말이 꽤나 기분 좋게 들려와서 그런지 그런 피곤함도 잊은 채 주레인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괜찮단다. 그런데 할 말이 무엇이냐.”
“실은 낮에 제이미 링베르가를 만나러 치안청에 갔었어요.”
“제이미 링베르가를?”
조금 놀란 듯했지만 주레인 공작은 금세 평정심을 되찾더니 말했다.
“역시 그랬구나.”
“아시고 계셨어요?”
“대충 예상은 하였단다. 오늘 링베르가 공작이 너를 포함해서 나와 자리를 마련해 보자고 먼저 연락을 하더구나.”
“아…….”
“뒤로 중앙 귀족들을 회유하는 게 아니라, 전면에 나선 것을 보니 무언가 있다 생각은 하였단다.”
“링베르가 공작님도 상당히 급하시긴 하셨나 보네요. 전 그래도 사흘 정도는 생각하다 답을 주실 줄 알았는데.”
“결단이 필요할 땐 깊이 생각하는 것보다 일단 행동에 나서는 게 나을 때도 있단다. 링베르가 공작은 신중한 인물이지만, 지금은 이런 결단을 내릴 때라는 소리란다.”
“예…….”
주안이 아무리 생각이 좀 깊어졌다 해도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과도 같은 링베르가 공작에게는 아직 한참이 부족하다.
그것을 일깨워 주듯, 주안에게 가르치는 주레인 공작이었고 그 뜻을 이해하기에 주안도 마음속 깊이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자신의 말을 제대로 깨닫고 생각하는 주안의 모습이 내심 흐뭇한 것인지 주레인 공작의 얼굴에선 피곤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링베르가 공작이 그렇게 급히 나를 찾는 것을 보면, 주안이 네가 무언가 그쪽에 좋은 조건을 제시한 것 같다만, 맞느냐?”
“아직 조건까진 정하지 않았지만, 제이미 공자를 빼내줄 수 있다는 것과 거래해 보자고 먼저 제의했어요. 물론 배상에 관한 부분은 따로 얻을 생각이에요.”
“그렇구나. 하긴, 이대로 시간을 끌면 링베르가 공작가도 곤란하였겠지만, 우리도 조금 곤란하긴 하였지.”
“시간을 계속 끌면 저희 쪽에도 피해가 온다는 부분까지 생각은 못 하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사무엘 경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이런 제의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곳에 사무엘 그리마 경이 있었더냐?”
“예. 아, 그리고…….”
주안이 잠시 머뭇거리다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빠에게 못 한 말이 하나 있어요.”
“못한 말?”
주레인 공작이 갸웃하자, 주안은 더더욱 미안해졌고 뭐라 말을 할지 몰라 매우 곤란해 하였다.
그리고 이런 주안을 다그치기보단 주안이 말을 할 때까지 주레인 공작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실은 워랜 경에 대해서 비밀로 하고 있던 게 있었어요.”
“어디 모르는 아가씨라도 사귀어서 임신이라도 시켰느냐?”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하하, 그러느냐.”
그래도 분위기를 조금 풀고 아들과 친해지기 위한 농담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듯 주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사실 아들과 그리고 아내와 진짜 가족 같은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지라 아직은 익숙지가 않았다.
“그래. 워랜 그 아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느냐?”
“사고는 사고인데, 조금 큰 사고를 치셨어요.”
“허……. 그러면 큰일일 터인데. 잘못하면 가론 공이 황도까지 올라와 워랜 그 아이의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인지라 주레인 공작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리고 주안 역시 워랜 노밀의 아버지인 가론 노밀 자작이 달려오는 모습을 상상한 듯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사고는 사고지만, 조금 다른 사고인지라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실은, 워랜 경이…….”
주안이 잠시 머뭇거리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랭크 7에 오르셨어요.”
“음?”
잠시 주안이 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주레인 공작이 갸웃했다.
그리고 잠시 주안의 말을 머리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조금 걸린 뒤 조용히 말했다.
“……랭크 7?”
“예, 랭크 7이요. 정확히는 동방의 검을 통해 깨달은, 절정의 영역이라고 보셔도 돼요.”
“에밀리와 같은, 그 경지 말이더냐.”
“예. 같은 경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에밀리 경에게는 안 되실 듯해요.”
“…….”
주안의 담담한 말에 주레인 공작은 할 말을 잊은 듯 그저 멍하니 주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주안 역시 그런 아빠의 심정을 잘 이해하기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주안은 워랜이 전에 말한 대로 그가 스스로 이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말하기 전까진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설령 자신의 아버지이자 현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가주인 주레인 마르티네스 공작이나,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은 물론 워랜의 아버지인 가론 노밀 자작에게도 말이다.
애초에 워랜은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무엘 그리마로 인해서 이러한 비밀이 들통이 나버린 이상 이제 숨길 수가 없어진 것이다.
‘오히려 잘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주안은 이 말을 꺼내기 전, 이미 워랜에게 경지를 밝혀도 될지 물어보았다.
워랜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링베르가 쪽에서 먼저 소문이 나는 것보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먼저 밝히거나 이쪽에서 소문이 나는 게 가문을 위해서라도 더 낫다는 판단에 허락해 준 것이기도 하였다.
“돌아온 뒤로도 별다른 변화는 못 느꼈다만, 혹 아스란 왕국에서 워랜이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은 것이더냐.”
“예, 맞아요. 실은 그곳에서 워랜 경이 스승님을 구하셨어요.”
“그 아이가 스승을?”
“예전에 저희 저택에도 한 번 방문을 해서 아빠도 만나본 일이 있으신 분이세요.”
“내가 말이더냐?”
하지만 그런 대단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 듯 주레인 공작이 갸웃했다.
그리고 주안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우나 공주님의 호위이셨던 풍신 경이세요.”
“설마, 그 동방의 무사가 워랜 그 아이의 스승라고……?”
“네, 맞아요.”
풍신에 대해서 떠오른 듯, 주레인 공작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그가 한쪽 손과 한쪽 눈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처음 마주했을 때도 사정이 어려운 아스란 왕국에서 제대로 된 기사도 구하지 못하여 자국 공주의 호위를 어디서 흘러들어 온 것인지 모르는 무사에게 맡긴 것인지, 안타까워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주안은 아스란 왕국으로 향하면서 풍신이 보여주었던 놀라운 무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그런 풍신의 검에 반해 버린 워랜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것인지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주안의 말을 들으며 때론 미소를, 때론 찌푸림을 보이던 주레인 공작이 주안의 말을 모두 들은 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아이가 조금 무모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무모함이 그저 단순한 무모함이 아닌 대담함이었나 보구나.”
“게으르다 하여도, 워랜 경은 나름 자신의 검에 대해서 매우 크게 고민하셨어요. 서방의 검과는 맞지 않는 것을 처음부터 깨닫고 자신만의 길을 가셨을 정도로, 자신의 검에 자존심도 대단하셨으니까요.”
그렇기에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 직접 찾아와 검을 가르쳤을 때도 그것을 무시하고 도망치기 바빴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 그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려던 게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찍 알아버렸을 것이니…….”
그에 대해선 매우 안타까운 듯 주레인 공작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동부의 천재라고 치켜세워 주었지, 그 어떤 도움조차 주지 못하고 혼자 내버려 둔 것이 바로 동부,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저 역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지만, 지금부터라도 워랜 경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지원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그 아이가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면 가문 내에서 얼마든지 지원해 주고 싶긴 하다만, 솔직히 그 아이가 뭘 필요로 하던 아이는 아니라서 말이다.”
“으음…… 필요한 거라면, 솔을 재미나게 괴롭히는 것 정도뿐이긴 한데…… 그게 아니면 가끔 토미를 괴롭히는 거라던가…….”
“……성격은 썩 좋지는 않나 보구나.”
실제로 워랜의 성격이 이상한 것은 맞기에 편을 들어 주기가 힘들었다.
“일단 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네 할아버지와 가론 공과 함께 나누자꾸나. 그 아이가 랭크 7이 되었다면, 정식으로 폐하에게 소개한 뒤 공표하는 게 낫겠구나.”
“저 역시 그게 옳다고 봐요.”
“허허……. 이거 참, 링베르가와 이상하게 엮여 황도가 떠들썩해졌는데, 그 아이로 인해서 이젠 제국이…… 아니, 대륙이 떠들썩해지겠구나.”
게다가 그 떠들썩함의 중심에는 결국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있을 것이니, 가주로서 조금 피곤해지는 일이 벌어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득이 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기에 가주로서는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러면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하기로 하고 일단 링베르가 공작가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해 두는 게 좋겠구나.”
“일단 일정을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오늘 바로 아빠에게 연락한 것을 보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보자는 의미 같은데.”
“너는 어찌하였으면 좋겠느냐? 시간을 끌었으면 하느냐, 아니면 빠르게 만나 주었으면 하느냐.”
이미 머릿속으로는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만날 것인지 생각을 끝낸 주레인 공작이었지만 주안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주안이 아스란 왕국을 갔다 오고, 착실하게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후계자 수업까지 자청해서 받으려고 하니 일상적인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일에서도 하나하나 시험을 하듯 질문을 하며 주안이 어떤 답을 하는 것인지 듣고 거기에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이런 아버지의 의도를 알기에, 주안도 조금 고민하였지만 이내 금세 자신의 답을 찾아 말해주었다.
“저는 일단 빠르게 만났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거래를 제안한 것은 어쨌든 저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인 입장이니까요. 괜히 시간을 끌어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더 심어줄 필요는 없겠죠. 더군다나 링베르가 공작가가 오늘 급하게 아빠에게 제의한 것을 보면, 황실에도 이미 알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 그렇지.”
“그렇다면 더더욱 시간을 끌면 안 되겠죠. 이틀, 아니, 사흘 뒤에 만나면 적당할 거 같아요.”
주레인 공작이 그런 주안의 생각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네 말이 맞단다. 이런 일에 시간을 끌 필요는 없지. 하지만 사흘은 꽤 길단다.”
“네? 사흘이, 길어요?”
“그래.”
주레인 공작이 그래도 나름 훌륭한 답을 내준 주안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워랜, 그 아이의 경지를 들키지 않았다면 네 말은 정답에 가까웠단다. 하지만 워랜의 이야기를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황제 폐하에게 고하고 공표하여야 하니, 내일 그 자리에 링베르가 공작을 초대한 후 바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맞단다.”
“아…….”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리가 마련이 될 것이고 다른 이들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워랜이라는 훌륭한 먹잇감을 던져놓아 주의를 끌고 뒤로는 링베르가 공작가와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워랜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매우 좋은 생각이었다.
“링베르가 공작도 우리와 거래를 하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을 것이니, 황제 폐하에게 말씀드린 후 황성 내의 조용한 장소를 빌려 만나면 되겠구나.”
어차피 황제도 이 두 공작 가문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다투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을 터이니, 이런 부탁은 하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자리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주안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있었다.
“예. 부탁드릴게요, 아빠.”
“그래, 그러자꾸나.”
그래도 나름 정답에 가까운 답을 그렇게 빠르게 내놓으니, 주레인 공작의 입장에서도 매우 뿌듯한 일이었다.
그리고 심각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여 그런지 주레인 공작이 넌지시 일상적인 질문 한 가지를 주안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 엄마는 오늘도 그 작은 아이들과 자느냐?”
“요즘은 계속 그렇게 하세요. 뭐, 일주일에 한 번은 저랑 주무시지만.”
뭐라고 할까, 계속해서 돌아가며 안젤라와 함께 자는 사람들이 바뀌고 있었다.
세 요정 꼬맹이나, 소니아 그리고 세라타와 주안까지 서로 바꾸어가며 자고 있지만, 거기에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은 없었다.
“왜 나랑은 안 자려는 것인지…….”
우울해 하는 아버지의 추욱 처진 모습을 보니 참 측은했다.
그래서 주안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저랑 주무실래요?”
“응? 주안이 너랑?”
“네, 어차피 저도 엄마가 요정 꼬맹이들이랑 자서 오늘은 혼자 자야 하거든요.”
“그, 그러면 그럴까?”
생각해 보면 주안은 단 한 번도 아버지와 단둘이서 자본 일이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니, 오늘은 아버지를 늦게까지 기다린 기념으로 한 번쯤 같이 자드리는 것도 효도라는 생각에 주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말에 주레인 공작은 정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주안이었다.
요즘 엄마가 조금 어른스러워졌다 싶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아빠가 팔불출이 되어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