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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마마보이-128화 (128/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128화

“워랜 경, 워랜 경.”

“우, 음……?”

워랜은 자신을 거칠게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주안 공자?”

“아니, 왜 또 다 벗고 자고 있으신 건데요?!”

“내 방에서 내가 벗고 자는데 누구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그, 그건 아니지만…….”

주안이 당황하든 말든 워랜은 길게 하품을 하며 크게 기지개도 쭈욱 켰다.

상의는 완전히 다 벗어 던져놓은 탓에 워랜이 기지개를 켜자 여러 사람을 부럽게 만드는 근육이 꿈틀거리며 제 할 일을 하려는 듯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

그리고 주안은 자신의 가냘픈 팔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워랜에게 말했다.

“오늘은 쉬는 날이시죠?”

“응, 쉬는 날. 그래서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부탁이 아니라 협박 아니에요? 솔까지 쫓아냈잖아요.”

“쫓아낸 게 아니라 나가서 놀라고 엉덩이를 걷어차 준 것뿐이야.”

“솔이 참 불쌍하네요.”

그래도 그런 솔이 쥬도나 토미와 어울려 말을 타고 바깥 외출을 했다는 것을 알기에, 아주 많이 불쌍하고 안쓰럽지는 않았다.

“어휴……. 그보다 좀 일어나서 씻으세요.”

“으…… 잔소리…….”

“잔소리가 아니라 당연한 소리거든요! 빨리 일어나셔서 저랑 어디 좀 가요”

“어딜 가는데 왜 날 끌고 가려는 거야? 다른 사람들 데리고 가.”

“토미랑 쥬도 씨는 솔이랑 놀러 나갔고, 피터 아저씨는 도리안 경이랑 체스 중. 소니아 누나랑 세라타는 엄마랑 같이 있거든요. 팽팽 노는 건 워랜 경뿐이라서요.”

“팽팽 노는 거라니…….”

주안이 잔소리하며 워랜이 제멋대로 벗어 던진 옷가지들을 직접 챙겨 워랜의 품에 안겨주었다.

“갈 곳이 있어요. 무서운 곳이라 호위 좀 해주세요.”

“웬 무서운 곳?”

주안의 말에 갸웃하면서도 워랜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범죄자들이 아주 많은 곳에 갈 거예요.”

“범죄자? 주안 공자, 설마…….”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던 워랜도 이내 주안의 말을 이해한 듯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이런 워랜에게 주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범죄자, 제이미 링베르가에게 면회나 좀 가죠. 할 말이 있거든요.”

“그 멍청한 녀석은 왜 만나려고?”

“그냥 어떻게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링베르가 공작가가 지나치게 조용히 움직이는 게 이상해서요.”

주안이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키며 말을 이었다.

“제이미 링베르가를 조금 건드려 보면, 자기 입으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술술 불 것 같거든요.”

“설마 그러려고.”

“후훗, 저랑 내기하실래요? 제이미 링베르가가 제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를 치며 달려올지 안 올지.”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설마…….”

“그 설마가 사람을 여럿 잡았죠.”

주안의 묘하게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에 워랜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일반적인 귀족가의 상식을 아는 이였기에 주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 * *

“주안 마르티네스!”

주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제이미 링베르가가 미네아의 손에서 벗어나 주안에게 달려갔다.

“멈추십시오, 공자님.”

“사, 사무엘 경! 하지만……!”

하지만 역시나 그래 봐야 열 살짜리 어린아이일 뿐이다.

아무리 기사 훈련을 받는다 해도 성장기도 덜 끝난 아이의 걸음 따윈 고랭크의 기사의 한 걸음으로도 따라 잡는다.

사무엘 경이 제이미 링베르가를 붙잡자,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 제이미 링베르가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그의 누나인 미네아 링베르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제가 이겼죠?”

“쳇.”

주안이 곁에 있는 워랜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펼쳐 내밀자, 워랜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주안의 손바닥 위에 은화를 하나 올려주었다.

이 두 사람의 이런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링베르가 공작가의 사람들이 그저 의아한 듯 갸웃했지만 말이다.

다행히 씩씩거리던 제이미는 미네아가 다시 다독여 주자 주안에게 더 이상 소리치고 달려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저희 공자님의 무례를 대신 사과드립니다,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님. 링베르가 공작가의 사무엘 그리마라고 합니다.”

대신 사무엘이 이런 주안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니, 그 이름을 들은 주안이 흠칫 놀랐을 정도다.

링베르가 공작가 역시 황도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제이미 링베르가를 만나러 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설마 오늘, 그것도 사무엘 그리마가 직접 이곳에 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주안의 놀람도 잠시였다.

어차피 과거의 사람이며 주안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인물임을 상기한 뒤 짧은 심호흡 후 사무엘 그리마에게 인사해 주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주안 마르티네스라고 합니다. 서부 제일 검이라는 사무엘 그리마 경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울 따름입니다.”

양대 공작가의 후계자가 모두 이곳에 있지만, 너무나 비교되는 상황인지라 사무엘 그리마도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곁에 있는 워랜의 모습에 사무엘 그리마의 시선이 가자, 워랜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해 주었다.

“노밀 자작가의 워랜 노밀이라고 합니다.”

“워랜 노밀…….”

사무엘 그리마는 워랜이 누구인지 안다는 듯했고, 워랜 역시 이런 사무엘 그리마에게 예의를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연장자이기도 했고 더욱이 검을 든 사람 치고 이 제국에서 사무엘 그리마를 모르는 이도 없다 보니, 나름 선배로서 대우해 주고 싶은 워랜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비록 이곳에는 없지만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에 대한 죄송스러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마찬가지로 먼 곳에 있는 스승인 풍신으로 인해서 검을 든 선배들에 대한 예절 교육은 나름 철저하게 받은 탓도 있었다.

이런 워랜의 행동에 사무엘 그리마 역시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대한, 특히 주안에 대한 조사는 미네아 링베르가와의 혼담이 결정됐을 때 자세하게 알아보았던 사항이긴 하였지만, 그 이전까지 돌던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흠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하나같이 변해 있었다.

자신이 모시는, 그리고 앞으로도 모셔야 할 제이미 링베르가 그 이상으로 좋지 않은 악명을 떨치던 주안 마르티네스.

그리고 그 천재성은 유명했지만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천재, 워랜 노밀.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는 좋지 않은 소문만 무성한 이들이 아닌, 동부 제일 가문의 후계자였고 미래의 제일 검이라 평가를 받는 젊은 천재의 모습이었다.

“반갑네, 워랜 경.”

“반갑습니다.”

사무엘 그리마는 솔직히 주안에 대해서도 적잖이 놀랐지만, 그 역시 검을 쓰는 인물인지라 젊은 천재라 불리는 워랜에게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 동부를 이끌어갈 동부 제일 검으로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워랜 노밀이기도 했다.

현재의 동부 제일 검은 마르티네스 공작령 서부의 관문이라고도 불리는 미첼로티 로마니아 백작이긴 하였지만, 사실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랭크 7의 젊은 인재라고는 에밀리 펜버뿐인 상황이지만, 그는 현재 동부를 떠나 황도에 머물며 주레인 공작의 호위로 있었기에 동부는 현재 이러한 젊은 인재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기도 했다.

동부의 사람들은 여전히 게으른 워랜에 대해서 크게 실망을 하고 있었지만, 사무엘 그리마가 본 워랜은 머지않아 정말 동부 제일 검으로 명성을 떨칠 것으로 보였다.

“정말,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그런 것을 믿는 게 멍청하다는 걸 실감하는군.”

“그 정도로 제가 별로인가 봅니다?”

“아니네, 아니야. 매우 뛰어나서 놀랐다네. 자네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이룩한 이는 대륙에서도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님 외에는 없으셨어.”

워랜은 여전히 랭크 6에 올라있다 알려져 있었지만, 그만한 성취라도 정말 대단한 것이다.

나이는 아직 20대 중반으로 젊었고, 잘 단련된 몸이나 뛰어난 신체 능력은 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판단이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랭크 7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국만이 아니라 서방 대륙 전체가 뒤집어질 것이다.

서방 대륙의 역사 속에서도 20대의 젊은 나이로 랭크 7에 오른 인물은 단둘밖에 없었다.

짧지만 한때 대륙 전체를 지배했던 캄파니아 제국의 정점에 올랐던 인물, 사이캄 대제.

그리고 검귀라고도 불리던 제노폴 제국 황실근위대 단장이던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

적어도 서방 대륙에서는 이들뿐이었다.

게다가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은 20대의 후반, 그것도 서른이 되기 직전에 랭크 7에 올랐던 인물이었으며 워랜은 그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사무엘 그리마가 직접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워랜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그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기사로서도 선배였고, 명성으로는 비교 불가하며 실력으로도 뛰어난 사무엘 그리마의 악수 요청은 사실 매우 이례적인 것임을 주안이나 워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워랜을 대우해 주고 높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

“예?”

하지만 워랜과 악수를 한 사무엘 그리마가 흠칫 놀라며 워랜을 바라보았다.

그 행동에 워랜이 갸웃했지만, 사무엘 그리마가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그보다 주안 공자님, 이곳까진 어쩐 일이신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조용히 제이미 링베르가 공자와 대화나 좀 나눌까 하고 왔습니다만, 선약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요.”

주안이 그렇게 말을 하며 제이미, 그리고 미네아를 흘겨보았다.

제이미는 미네아로 인해서 그 행동 자체는 얌전해졌지만, 주안을 노려보는 눈이 보통은 아니었다.

‘아주 철천지원수가 되었다는 게 이런 건가 싶네.’

겨우 열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것도 참 씁쓸했다.

적어도 그 나이대의 아이가 가져야 할 감정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 너랑 할 이야기 없어! 당장 꺼……!”

“제이미!”

“우읍!”

주안의 말에 기어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제이미 링베르가였지만, 그런 행동을 미네아가 손까지 써가며 제이미의 입을 틀어 막아버렸다.

“대화라…….”

대화라는 것에 사무엘이 조금 고민이 되었다.

그가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에게 받은 명령은 자신의 말을 전해준 후 미네아 링베르가를 이용해 조금 달래고 돌아오라는 것이 전부였다.

주안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랬겠지만…….

“어떤 대화인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글쎄요. 딱히 이야기를 정해서 온 것은 아니라서 말이죠. 그저 조금 유익한 대화가 되었으면 할 뿐입니다. 적어도 이곳에 싸우러 온 것은 아니니까요.”

“…….”

잠시 주안을 빤히 지켜보던 사무엘 그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저희 대화는 링베르가 공작님에게도 전해주실 수 있길 바라거든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안이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사무엘 그리마를 지나쳐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며 한 그 말에 사무엘은 살짝 긴장해 버렸다.

무방비함에도 주안에겐 빈틈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당당한 그 모습에서는 모시고 있는 주군인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의 분위기도 느껴졌다.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타이틀로 가질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지배자, 누군가의 위에 올라설 수 있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미네아 영애도 그만 그 손을 놓고 앉으세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설마 물기야 하겠습니까?”

의자에 앉아 싱긋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주안의 행동에 미네아도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조심스레 제이미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면서도 제이미가 소리를 지르면 언제든지 다시 입을 막으려는 준비도 하였지만 말이다.

“너, 대체 여기 왜 온 거야?”

“조용히 이야기나 좀 나눌까 싶어서. 너도 앉도록 해.”

“아주 집 주인이시네.”

“아, 미안. 네가 여기 주인이셨지? 손님이 왔는데 차는 없어? 대접이 참 형편없네.”

“…….”

으르렁거리는 제이미를 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주안.

그 행동도 여유롭고 느긋하였지만, 보는 지켜보는 링베르가 공작가의 사람들에겐 매우 초조하게 만드는 행동들이다.

“왜 온 거냐니까. 빨리 말하고 꺼져!”

기어이 거친 소리를 내뱉는 제이미로 인해서 미네아가 화들짝 놀라 주안의 눈치를 살폈지만, 주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미를 보며 미소를 짓고는 한마디 해주었다.

“정신 차려, 제이미 링베르가. 어린 너 때문에 네 가문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모르고, 외면한 채 이런 행동을 계속한다면…….”

주안이 조용히 제이미 링베르가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너만이 아니라 네 가문도 망하는 거, 한순간이야.”

이것은 경험자로서의 걱정이었다.

아무리 과거이자 미래의 제이미 링베르가는 달랐다 해도, 이미 주안으로 변해 버린 현재에선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제이미 링베르가의 이런 행동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정말로 가문을 폭삭 말아먹어도 열 번은 더 말아 먹을 것이니 말이다.

한 번 가문을 말아먹어 본 주안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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