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26화
링베르가 공작가의 저택의 분위기는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조용한 곳이라 떠들썩한 것은 제이미 링베르가뿐이었지만, 그 제이미 링베르가가 없으니 적막함이 감돌 정도였다.
그리고 링베르가 공작가의 저택의 서재에는 숨이 턱 막힐 분위기도 모자라 실제로 숨이 막힐 정도로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무거운 분위기의 중심에는 소파에 앉아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워대는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있었다.
“공작님, 이제 담배는 그만 태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런 그의 곁을 지키는 사무엘 그리마였고, 그의 말에도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은 짧아진 시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후 새로운 것을 꺼내 불을 붙였다.
“각하.”
“……페로우.”
“예, 예! 공작님!”
하지만 사무엘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멀찍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페로우를 불렀다.
“네 놈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그것이…….”
“나는 네게 제이미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 하였다.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목욕할 때도, 잠을 잘 때도! 함께 있고 항상 붙어 있으라 명을 내렸다! 그런데 네 놈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공작님!”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의 일갈에 페로우가 무릎을 꿇고, 거듭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곧 예순 살을 바라보는 그는 그 나이와는 달리 벡브란 전대 공작만큼 정정했고, 기사로서의 재능은 별로 없었지만 젊은 시절 꾸준하게 단련하여 그런지 나이보다 열 살은 더 젊어 보일 만큼 건강했다.
분노를 쏟아내며 재떨이까지 집어 들어 페로우에게 던지려고 하는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의 모습에 황급히 사무엘이 나서서 그를 말리며 말했다.
“각하, 진정하십시오. 페로우 경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이미 공자님이 페로우 경과 알베른 경을 대련시켜 놓고 설마 그대로 도망쳤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이미 역시 자신을 따라다니며 지겹게 잔소리를 해대고 하는 일마다 방해하는 페로우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번 일 역시 그런 페로우가 반대를 하며 막아설 게 뻔했기에 제이미 역시 머리를 쓴 것이었지만, 이런 제이미로 인해 엄한 페로우만 야단을 맞고 있으니 사무엘 입장에서도 그를 변호해 줄 수밖에 없었다.
페로우가 진짜 자리를 비웠다면 그 역시 옹호해 주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빌어먹을……!”
그것을 알기에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 역시 페로우에게 호통을 쳐도, 그를 진짜 벌하거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아들 녀석이 점점 영악해지고 제멋대로 군다는 것에 분을 삭이며 담배만 뻑뻑 피워댈 수밖에 없었다.
“미네아는 뭘 하고 있느냐.”
“방에서 나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멍청한 녀석……. 알아서 이어줄 터인데, 거기가 어디라고 기어가서 그 사달을 만들어…….”
“각하…….”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의 그런 험한 말과 반응에 사무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작으로서, 가주로서는 매우 훌륭한 인물이지만, 아버지이자 가족으로서는 결코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자신과 결혼한 링베르가 공작가의 첫째 영애, 현재의 아내인 시마 링베르가가 공작성을 떠나며 보였던 눈물이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었을 정도였다.
재차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사무엘에게 말했다.
“제이미를 빼낼 방법은 있나?”
“보는 눈이 너무나 많아 당장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마르티네스에서 막고 있나 보군.”
“주안 공자가 직접 나선 탓에 치안 청장인 그란디아 남작도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안, 그 아이가 일을 정말 크게 키웠구나.”
“아무래도 제이미 공자님이 다치게 한 사람이 주안 공자가 아끼는 사람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는 없었겠지.”
그의 상식으로는 최측근이 아닌 이상, 이런 일 정도는 서로 조용히 묻어주고 오히려 차후 이것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주안은 오히려 일을 크게 키워 마치 대립을 바란다는 듯 일을 벌였으니,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의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일단 먼저 저희와 연이 있는 중앙 귀족들을 움직여 볼 생각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일이 커진 만큼, 황실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네.”
“예, 그래서 황실과도 접촉해 볼 생각입니다. 적당한 거래를 이끌어 낸다면, 황실은 저희 편을 들어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우리와 마르티네스가 다투면 가장 큰 손해를 입는 것이 황실이니까. 어떻게든 빨리 이 일을 수습하려고 우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게야.”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새로운 시가 담배를 꺼내 끝을 잘라낸 뒤 마법 부싯돌로 불을 붙인 후 입에 물었다.
사무엘의 걱정에도 그는 담배를 매우 애용하였고, 이렇게 줄담배를 피울 때는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외에는 없었다.
담배를 깊이 한 모금 빨아들인 후 하얀 연기를 토해낸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정리한 생각을 사무엘에게 말해주었다.
“벡브란 전대 공작에게도 손을 써봐야겠어.”
“확실히 그분을 움직일 수 있다면 주레인 공작님과 주안 공자도 한발 물러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영감이 좀 무섭기는 하지.”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어내며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나이로 보면 벡브란 전대 공작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은 후계자를 늦게 봤다 뿐이며, 아직 그 아들에게 이 자리를 물려 줄 수 없는 입장이었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젊은 나이에 후계를 보고 일찍 은퇴를 했다의 차이뿐이다.
“그래도 말로만 물러났다, 은퇴했다 할 뿐이지…… 누구도 그 영감탱이가 뒤로 물러났다고 생각 안 하지.”
“아무래도 현 공작이신 주레인 공작님이 황도에서 재상의 업무를 보시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선으로 복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지, 지금은 그게 더 무섭다네.”
“예?”
갸웃하는 사무엘의 모습에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들 녀석은 재상의 자리에 앉아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있고, 말만 은퇴했다고 하지 실상은 여전히 가주의 자리에 앉아 동부를 틀어쥐고 좌지우지 하고 있는 괴물 영감이 버티고 있으니 말이야”
하나만 가져도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과 마찬가지인데, 마르티네스는 무려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전 황녀이자 황제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딸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공작부인이기까지 하였다.
세인들은 단지 공작가라는 이유로 마르티네스를 최고로 치는 것이 아니다.
현세대의 마르티네스는 권력이면 권력, 재력이면 재력, 무력이면 무력, 거기다 가장 고귀한 황가의 피까지 이어져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기에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을 최고로 치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은 마르티네스의 그런 부분이 너무나 탐났다.
“그 영감의 손자 녀석도 매우 잘 크고 있어. 그 이상한 마마보이라는 소문 따위, 이미 잊힐 만큼 말이야. 나는 그게 정말 두렵고, 부럽고, 질투가 난다네, 사무엘.”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까. 제이미 공자님이 조금 제멋대로인 부분이 있으시지만, 매우 총명하십니다. 후계자로는 절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래, 내 아들이 똑똑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돼.”
그 행동 자체가 조금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커가면서 충분히 바로 잡을 수 있는 것들이다.
적어도 어렸을 때의 치기 정도일 뿐, 성년이 된 순간 지옥 같은 후계자 수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어릴 때 충분히 즐기게 놔두는 것이 바로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의 훈육 방법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지금도 놀게만 놔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사이 제이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모자란 자신과는 달리 여유로웠던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그 자손들을 너무나 잘 키웠다.
한때 마르티네스 가문도 손자로 인해서 망할 것이라는 소리가 지배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평가가 완벽히 뒤바뀐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벡브란 전대 공작이 그랬던 것처럼, 주레인 공작이 만약 일찍 은퇴하고 그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다면 삼대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젊을 때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남은 그 시간을 움켜쥔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힘을 크게 키웠으니 말이다.
“동부를 지키는 괴물 영감에, 나라를 움켜쥐는 젊은 재상에, 젊고 남다른 재능을 가진 후계자가 새로운 공작으로 탄생하는 것이지. 삼대에 걸쳐서 인물을 내는 것이란 말이야.”
사절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주안에 대해 조사를 해보며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은 주안을 정말 자신의 사람,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피로 이어진 혈연관계로 반드시 맺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서부, 더 나아가 자신의 아들인 제이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으면 하였다.
그는 확실히 마르티네스 공작이 부럽고 질투가 날 정도였으며 시기심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가문과 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더러운 감정 따윈 치워 버리고 득이 되는 것을 찾아 나섰으며 그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혼담이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대립하며 억지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권력과 부를 적당히 공유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듯,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마르티네스에게 틀어 막혀, 그들의 도움을 바라야 하는 입장이라니……. 내 꼴이 참 우습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공작님. 핌 벨 강의 농토가 그 꼴만 되지 않았어도, 저희 링베르가도 충분히 도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 어쩌겠나. 빌어먹을 냉해에, 가뭄에, 이젠 벌레 떼까지 창궐하니……. 핌 벨 강 일대만 초토화된 게 아니라 서부와 그 너머의 멍청한 삼국동맹 녀석들마저 난리가 난 상황인데.”
재작년에 일어난 냉해에 작황이 매우 좋지 않았고, 그것은 작년까지 이어진 것도 모자라 가뭄까지 발생하였다.
극심한 가뭄은 아니지만 안 그래도 자급자족이 힘든 서부에서는 꽤나 고생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 가뭄이 올해 또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게 제국 서부에 한정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그 너머의 삼국동맹이라 불리는 라캄, 테베나, 조슈아까지 이 불길한 일이 덮치는 바람에 작년의 수확량이 매우 떨어진 것도 모자라, 올해는 아주 지옥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그들도 예상하는 듯 식량의 수출량을 급격하게 줄여 버린 것이다.
그들도 살기 위해 한 행동임을 알기에 뭐라 제재를 가할 방도도 없었고 수입되는 것이 줄어버리니 여러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부 국경을 담당하는 가문이고 지역이었기에 황가에서 직접 군량미를 챙겨주고 여러 세금 혜택을 주었지만, 문제는 일반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올해까진 어떻게든 버틸 수야 있겠지만, 정작 내년이 문제로군.”
“삼국동맹에서의 식량 수출 제한을 풀지 않는다면 남겨진 저희의 비축 분으론 올해는 어찌 넘긴다 해도 내년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황가도 한계가 있어. 남부 놈들은 우리에게 절대 식량을 팔지 않을 것이니…….”
제국의 곡창지대는 남부와 동부, 두 곳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중부에도 어느 정도 규모가 큰 곡창지대가 있다지만, 황실 직할령에 포함된 지역은 많지가 않았다.
때문에 세수로 올라오는 게 대부분이었고, 그 역시 남부와 서부, 북부의 국경을 지키는 군에 지급되는 군량미로 쓰인다.
특히 서부는 삼국과 맞닿는 국경이었고 가장 넓고 긴 탓에 정규군의 규모도 남달랐다.
이런 정규군과 링베르가 공작가를 위시한 영지군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그들을 먹일 군량미는 황가로서도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그나마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일정 부분 부담해 주었기에 다행이지, 올해는 이 일로 남부군의 군량미는 맥도넬 후작가에게도 분담시키기 위한 의논이 오갈 정도였다.
“후우……. 혼사는 이미 끝났다 봐야 하고, 제이미를 빼내기 위해서 오히려 황가나 마르티네스에 무언가를 전해주어야 한다니……. 허허, 거래하러 왔다가 위약금만 잔뜩 물게 생겼군.”
“최대한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래,, 방법이 있으면 좋겠군. 빈손으로 돌아가면 우린 다 굶어 죽는 거야. 그 전에 이 사달을 내고 제이미를 못 말린 놈들의 목이 먼저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넌지시 던지는 블라드 링베르가 공작이었지만, 듣고 있는 사무엘 경이나 페로우 경은 그게 농담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서늘한 그의 말에 사무엘과 페로우는 그저 식은땀을 흘리며 블라드 링베르가의 눈치만 살펴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