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25화
“정당한 제 행동에 아버지가 제게 힘을 실어주세요.”
차분한 주안의 모습과 담담한 그 말에 주레인 공작이 잠시 그런 아들을 지켜보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느냐.”
“링베르가 공작이 치안청에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어주세요.”
꽤나 강경한 주안의 말에 주레인 공작이 조금 놀란 듯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것을 지금의 주안이 매우 싫어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주안이 부탁하는 그 말 속에서, 그 눈에서 느껴지는 잔잔한 분노가 실상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이 갔기에, 주레인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을 이끄는 이가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분노에 이성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자신에게 부탁하고 조언을 바라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였다.
“그들을 압박하여 치안청에 링베르가의 손이 닿지 못하도록 바라는 것이냐.”
“꼭 압박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그들이 제이미 링베르가를 빼내기 위해서 황성, 더 나아가 그들과 인연이 있는 자들과 연계하는 것만 막아주시면 좋겠어요.”
아무리 서부에 틀어박혀 있는 링베르가 공작가라고 해도 황도의 중앙귀족들과 인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서부 국경을 지키는 링베르가 입장에선 이들과 지속적인 연이 필요했고, 그들의 도움을 통해 서부 국경에 도움이 되는 많은 법안이나 지원이 통과되니 말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도 전하니, 서로에게 매우 유익한 거래들일 것이다.
링베르가 공작가가 직접 나서서 손을 쓰기 시작한다면 바로 이 인연이 있는 중앙 귀족들을 포섭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임을 주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레인 공작 역시 예상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반발이 매우 심할 것이란다.”
“반발하라고 하세요. 그들이 제이미 링베르가를 치안청에서 꺼내기 위해서 저희 가문과 맞서고, 치안청과도 마찰을 일으키면 오히려 그들의 가문에 먹칠하는 행동밖에 되지 않을 것이니까요.”
황도에서, 그것도 타 가문의 저택에서 행한 행동은 절대 지지받을 일이 아니었다.
손가락질을 당하고 비난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일.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하고 제이미 링베르가를 빼내려 한다면 마르티네스 공작가도 지켜만 봐선 안 되었다.
가문의 저택에 침범해 그런 일을 벌인 이가 제대로 된 처벌도 없이 그대로 빠져나간다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힘을 의심하는 이들도 생길 것이다.
또한 부당한 일을 당했음에도 조용히 물러나는 것에 대한 조롱도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주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믿고 있는 것도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여론은 저의, 아니, 저희 가문의 편이에요.”
“확실히 그렇긴 하지.”
백성들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다.
작금의 사태가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고, 왜 일어난 일이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는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살을 더해서 입과 입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가게 된다.
다행히 지금의 여론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매우 우호적이다.
물론 여기서 변수는 미네아 링베르가가 주안에게 무릎까지 꿇고 용서를 빌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미네아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거절한 주안의 행동에 대한 비난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변수를 줄이고 여론을 완벽히 마르티네스 공작가로 만들어놓는다면 그 뒤의 일은 링베르가 공작가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라도 그 권력의 힘이 나오는 것은 일반 백성들에게서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특히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이런 백성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소문에 매우 민감하다.
영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영지의 주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면 매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명성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 명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백성들이 한다.
주안 대한 좋지 못한 소문 역시 이들의 입을 통해 오르내렸고, 가문의 명성이 땅에 떨어져 버린 경험도 했지만, 그들을 원망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결국 주안이 올바른 일을 하니, 그런 백성들의 입을 통해 주안의 일들이 손쉽게 퍼져 나갔으니 말이다.
주레인 공작 역시 주안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일을 조금 오래 끌어갈 필요도 있겠구나. 우리 가문과 링베르가 공작가와의 이런 신경전을 벌이는 것에 황제 폐하도 예의주시 중이니,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 지으시려고 중재하실 것이니 말이다.”
“외할아버지에겐 죄송하지만, 그 중재를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안 돼요.”
“그래……. 네 뜻이 무엇인지는 나 역시 잘 알겠구나.”
두 거대 가문이 서로 불쾌감을 가진 채 마무리 짓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만, 일이 더 커진다면 문제가 되기에 황급히 봉합시키려고 중재에 나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주안은 넙죽, 그 중재를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였다.
주레인 공작 역시 주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안아, 너는 링베르가에게 무엇을 받아내고 싶은 것이냐.”
“혼담 거절에 대한 사과의 선물을 우리가 아닌 그쪽에서 내놓게 만들어야죠.”
애초에 선물을 주려고 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후계자를 통해 선물을 시원하게 걷어차 버렸다.
그 차버린 선물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사람이 맞아 다쳤으니, 치료비 정도는 되려 받아내야 하였다.
“가능한 큰 것을,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떨어진 위신을 바로 잡을 만큼 좋은 것을 받아야 할 거예요.”
“좋은 것이라…… 허허, 상황도 좋지 않다 들었는데 링베르가 공작가에서 무엇을 내놓을 것인지 걱정이로구나.”
그들이 혼담을 제의한 이유 역시 서부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선택했고, 그것을 위해 이 먼 길을 찾아 왔을 것인데, 도리어 얻는 것 없이 주게 생겼으니 주레인 공작 입장에선 그들도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내놓지 않으려 들겠지만, 황제 폐하와 잘 이야기를 나눈다면 꽤 좋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거예요. 외할아버지도 골치 아프실 것이니까, 정당성은 저희에게 있고 저희가 물러서지 않는다면 결국 링베르가 공작가를 저희 대신 압박해 주실 거예요.”
황제가 되어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주어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편을 들어준다 하여도 다들 이해할 상황이니, 링베르가 공작가의 반발이야 조금 걱정스럽겠지만 크게 손해는 아니다.
게다가 링베르가 공작가는 제이미 링베르가를 어떻게든 치안청에서 빼내고 싶어 할 것이니, 무엇이든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도울 것은 외할아버지이자 황제 폐하가 될 것이니, 그들이 작정하고 버틸 수도 없는 이유가 된다.
“황제 폐하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구나.”
물론 얻어낸 것을 모두 다 가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황가에 좋은 선물로 준다면 마르티네스는 가문의 명성에 먹칠한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큰 벌을 내린 것으로 유명해질 것이며, 황가는 반대로 중재를 하고 충분한 이득도 생길 터이니, 이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손해를 보는 것은 전적으로 링베르가 공작가가 되겠지만, 황가는 그런 그들과 완전히 척을 지지도 않을 것이니, 결국 다른 것을 이유로 들어 링베르가 공작가에게 적당한 당근을 제시할 것이다.
결국 마지막은 정치적인 방법으로 서로가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않는 쪽으로 나설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적 생각을 하는 주레인 공작과는 달리 주안은 여기서 받을 것만 받고 끝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받을 건 받더라도 벌은 제대로 주어야겠지요.”
“주안아…….”
아들의 스산한 그 말에 주레인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벌을 줄 생각이더냐?”
“당연하지요. 그 아이가 아직 어리고, 링베르가 공작가의 후계자라 목을 자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만 할 거예요.”
“…….”
섬뜩한 말이긴 했지만, 주안의 말은 틀린 것도 아니다.
타 가문의 저택에 검을 들고 와서 그 가문의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다는 것은 영지전 정도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말도 없이,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아스란 왕국의 행태와도 매우 비슷했다.
제국에는 아직도 아스란 왕국의 그 행동을 혐오하고 싫어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기사도를 신봉하는 마초적인 성격들을 가진 기사들과 거기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굉장히 많은 나라인지라, 정당하지 못한 일, 불의를 저지르는 일 등을 정말 싫어한다.
하물며 기사 대 기사의 대련과 대결에도 매우 복잡한 절차와 참관인이 있어야만 하였고, 서로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게 될 정도다.
“제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정도 선뿐이에요. 목숨을 취하지 않는 대신, 충분한 처벌. 확실한 변상. 그리고 진심 어린 사과. 이게 없다면 저는 그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주안의 단호한 그 말에 주레인 공작이 조용히 차로 목을 축였다.
주안 역시 그런 아버지가 말을 하기 전까지 차를 홀짝였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주안 마르티네스로서 하는 생각인 것이더냐.”
“예. 가문을 위해서, 저희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라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요.”
잘못하면 정말 링베르가 공작가와 완전히 틀어질 수가 있었다.
사과와 변상은 그들도 수용할 가능성이 높은 일이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처벌을 강행한다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의지를 알게 된다면 그들 역시 작정하고 대립할 수 있었다.
단순히 정치를 생각한다면, 받을 것만 받고 한발 물러나 주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주안은 이것을 단순한 정치적으로 보는 게 아니다.
가문을 이끌어가는 후계자로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의지가 느껴졌다.
마르티네스는 가족을, 자신의 사람들을 다치게 한 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유독 가신들의 가문과의 유대감을 중요시하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특이한 성향이었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에겐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주레인 공작은 이런 아들을 모습을 보며 오래전, 자신의 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 젊었을 때와 묘하게 겹쳐 보였다.
“아버지가,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앞장선 것인지…… 너를 보니 조금은 알겠구나.”
아스란 왕국과의 전쟁에서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그토록 분노하고 많은 군사를 이끌고 최전선에 섰던 것, 어렸던 주레인 공작은 이해할 수 없던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주안을 보니 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당시의 남부군 역시,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벡브란 전대 공작이 이끄는 사람들이었고 소중한 부하들이었고, 보호해야 할 가족들이었으니…….
‘떠나간 가문의 사람들을 보며 슬퍼하지도 않고, 그런 전쟁에 앞장을 선 아버지가 참으로 이해가 안 되어 원망만 하였는데…….’
그래서 아버지와 소원해졌고,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동부를 떠나 황도로 와서는 지금껏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주안의 분노에는 단지 제이미 링베르가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자신의 안일함에 대한 분노도 꽤나 컸다.
그리고 주레인 공작은 주안의 이 모습에서 벡브란 전대 공작의 아스란 왕국 전쟁 당시의 모습과 겹쳐 보여 씁쓸했지만, 이제 와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그렇기에 늦게나마 알게 되어 이런 아들의 행동이 과해 보이지 않고 정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주안아.”
“네…….”
주레인 공작이 조용히 주안을 지켜보았다.
어렸을 땐 아내를 무척 많이 닮았었지만, 성인에 가까워지니 자신의 모습도 많이 닮아가는 아들이었다.
게다가 그 분위기는 무섭고도 두렵던, 가까이하기 힘들던 주레인 공작, 자신의 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과도 비슷해져 갔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하니, 가문의, 가족의 모든 것을 닮아가는 이런 아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주레인 공작은 그런 아들의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자랑스러운 그 모습에 흐뭇해하며 말했다.
“네 생각을 아버지이자 가주로서 끝까지 지지해 주도록 하마. 이번 일은 네 뜻대로 이끌어 가보도록 하거라.”
“제가, 말이에요?”
“그래. 뒤는 이 아버지가, 네 외할아버지와 네 엄마, 너의 가족들이 너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도록 하마.”
“감사해요, 아버지.”
주레인 공작은 처음의 당혹감은 어느새 사라진 채, 자신을 보며 아이처럼 즐겁게 웃어주는 이런 아들을 보며 든든한 기분을 맛봐야만 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마를렌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연락을 먼저 해드리고 싶었다.
이번 일을 알려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저 얼굴을 보고 주안에 대해 담소를 나누며 조용히 함께 차를 마시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