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23화
“나, 나, 나는…….”
페로우가 자리를 비운 틈에 제멋대로 뛰쳐나온 게 화근이었을까.
제이미의 권위적이고도 제멋대로인 그 행동을 말려줄 사람이 없으니, 영지에서 하던 것처럼 행동한 것이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제이미를 따르는 호위들은 말 그대로 제이미의 비위를 잘 맞춰주던, 그런 이들뿐이었고 제이미의 곁에서 적당히 그 권력을 함께 누리는 이들일 뿐이었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잘못된다 해도 결국 링베르가 공작가의 권력이 있기에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황도다.
그들이 있던 링베르가 영지가 아니었으며 서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이 장소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서부에 너무나 오래 틀어박혀 있던 그들, 그중에서도 생각이 없는 후계자와 그 후계자 곁만 지키던 이들이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기보단 자신들의 권력의 강함에만 빠져있는 듯했다.
다행히 이들 중 혼란에 빠지지 않은 이는 단 한 사람, 미네아 링베르가 영애만이 이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침착하게 말했다.
“모두 검을 허리에서 풀고 물러나세요.”
미네아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호위들이 하나둘 허리에 매어져 있던 검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뒤 역시 저택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그들이 이곳을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지금은 눈앞의 주안과 그 주변의 호위 기사들의 흉흉함에 잔뜩 주눅이 들었기에 피하고 싶은 심정이 더욱 커 보였다.
그리고 미네아는 제이미를 다독이면서도 차분하게 주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안 공자님, 제 동생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을 내놓는 주안의 모습에 제이미뿐만이 아니라 미네아 역시 안색이 무척이나 나빠졌다.
“이대로 가면 일이 너무나 커져요. 동생의 버릇없는 행동에 대해선 제가,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링베르가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사죄하겠습니다.”
“거절합니다.”
“공자님…….”
냉정할 정도로 차가운 주안의 말과 그 모습에, 미네아는 이 사람이 응접실에서 함께 웃고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주안을 설득시켜야만 하였다.
제이미가 저지른 행동은 정말 심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이미가 이렇게 행동을 한 것도 다 저의 잘못이 큽니다. 그 대가는 저 역시 같이 짊어질 것이니, 저와 제이미에게 벌을 내려주시면 안 되겠나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안 됩니다. 그것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링베르가 공작가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링베르가 공작 가문에서 치러야 할 일입니다.”
주안 역시 그랬다.
자신도 자신의 잘못을 가문이 짊어졌다. 그 처절한 대가를 치렀고, 그 후회를 장장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였다.
아니, 그 후회는 지금도 여전히 하고 있었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주의하며 노력하였다.
가문을 짊어질 후계자의 행동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힘들어지고 불행해지는 것인지 주안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안은 지금 이 상황을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제이미는 언제고 주안처럼 될 수 있는, 그런 인물이었다.
‘이전 삶 속에선, 그래도 나름 잘 성장하였다지만…….’
지금의 이 행동들을 보면 제이미를 제대로 가르친 이가 이후에 나타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이대로 큰다면 주안 이상으로 가문을 망쳐놓을 인물이었지만, 이전 삶 속에서의 제이미는 특별한 능력은 없었어도 나름 가문을 잘 이끌어갔던 가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페로우 경일까, 아니면 사무엘 경일까.’
아무래도 여기 없는 페로우 경이 아닐까 싶었다.
노점구역에서 만났던 제이미의 그 당돌한 행동을 제지하고 일이 크게 번질 수 있었음에도 함께 있던 호위기사인 페로우 경이 나서서 상황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였었다.
만약 그가 이후에도 계속 제이미의 곁에 있고 호위이자 조력자로 남았다면, 확실히 제이미가 별 탈 없이 가주에 올라 가문을 제대로 이끌어갔다는 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그 페로우 경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없었기에 제이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것이니 말이다.
“당신들을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무장을 한 채 침범하고, 가문의 사람을 다치게 한 죄를 물어 모두 체포합니다. 그에 대한 죄는 황도 치안청으로 인계한 뒤, 법에 따라 처리할 것입니다.”
“공자님,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누, 누나!”
미네아 링베르가가 주안의 앞에 무릎을 꿇자, 제이미뿐만이 아니라 다들 놀란 눈으로 미네아를 바라본다.
그리고 주안 역시 놀라긴 하지였지만, 그런 놀라움보단 아직까지 분노로 인한 침착함이 더욱 컸다.
다만, 귀족가의 영애가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는 이야기가 사교계에 돌게 된다면, 그녀의 혼담은 앞으로 꽤나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동생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기에 다들 착잡한 듯, 미네아 영애를 바라보았다.
“아직 너무나 모자란 아이입니다. 법이 아니라도, 꾸짖음과 충분한 벌을 내려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아니요. 단순한 꾸짖음으로는 절대 고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제이미는 자신의 누나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는 것에 주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그리고 그 잘못 때문에 자신의 누나가 왜 이러는 것인지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누나가 주안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것, 그 하나로 주안에게 분노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꾸짖음과 용서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가문과 가문의 일이며,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명성과 제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는 주안이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늘 한발 물러났다 해도, 이번 일까지 그렇게 넘어간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의 신뢰를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뢰를 잃어버린 가문의 후계자, 그리고 앞으로 가주가 될 주안에겐 그보다 더 큰 손실도 없을 것이다.
가문이 유지되는 근간은 권력도, 재력도 아니다.
바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이 사람들을 통해 가문의 힘이 나타나고 재력도 권력도 뒤따르는 것이다.
결국 가문은 사람으로 인해 유지되고 이어지며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에 대한 제이미 공자의 무례함은 아이의 투정 정도로 이해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사람을, 제 가문의 사람을 다치게 한 이를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다, 미네아 영애.”
“…….”
“이것은 언젠가 이 가문을 이어받고 이들을 보호해야 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인 저, 주안 마르티네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후계자의 의무, 그리고 가주의 의무에 대해서 여성이라 하여도 거대한 가문의 사람인 미네아 링베르가가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미네아 링베르가의 표정은 너무나 어두웠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지금의 이 일의 시작, 제이미가 이곳으로 와서 난동을 피운 이유가 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리엄 경. 이들이 제압된 후 피터 경과 워랜 경이 오시면, 아버지에게 가셔서 이 일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려주십시오.”
“예, 공자님.”
이리엄 경은 주안의 아버지인 주레인 공작의 측근 중 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에밀리 경의 부관이라 황성의 출입은 나름 쉬운 편이었다.
당연히 재상부에 있는 주레인 공작을 만나는 것도 굉장히 용이하다.
그 점을 감안해 피터와 워랜이 올 때까진 이곳을 지휘하고, 그들이 온 뒤에는 황성으로 가서 주레인 공작을 만나 주안의 말과 이곳의 상황을 전해야 하는 게 그의 임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링베르가 공작가에서 먼저 이 일을 알고 손을 쓰기 전에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나서서 이 일에 대한 정당성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주안은 이들이, 제이미가 링베르가가 자신의 가문의 권력을 등에 업고 빠져나가게 놔둘 생각은 절대 없었다.
이리엄 역시 그런 주안의 생각을 아는 듯, 주변 호위들을 인솔해 제이미 일행들을 구속하였다.
그들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단지 주안은 자신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미네아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보다 쥬도 씨.”
“아, 예. 공자님.”
“얼굴 좀 내밀어보세요.”
“예? 아…….”
주안의 말에 갸웃하던 쥬도였지만, 이내 주안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주안에게 자신의 볼을 보여주었다.
파란 멍 주변으로 발갛게 부은 볼을 보니, 주안도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그래도 홈멜스 상단의 상단주인 로닐의 유일한 아들이었고 거의 반강제로 데리고 온 것이지만,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다치게 만든 것에 자책감이 들었다.
“죄송해요, 쥬도 씨. 괜히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하고…….”
“아, 아닙니다. 공자님.”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쥬도가 애써 웃어주며 말했다.
“저도,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으로 해야 할 일을 한 거잖습니까.”
볼이 퉁퉁 붓고도 시원스러운 미소를 짓는 쥬도의 모습에 주안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내 기분 좋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에게 대들고, 엄마를 모욕하던 그때의 그 모습은 사라졌다. 더 이상 건방진 도련님이 아니라 나름 유쾌한 도련님으로 변한 듯했다.
“그렇지요. 쥬도 씨도 저희 사람이었죠. 피터 아저씨의 두 번째 제자이기도 하잖아요.”
“제자라기보단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입장입니다.”
“하하……. 그런가요.”
이건 농담이 아닌 듯, 조금은 싫은 티를 내며 말하는 쥬도를 보니 이 솔직하고 건방진 모습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가식이 없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는 이들이 마를렌에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이 버릇없는 도련님이 그래도 자기 사람들을 정말 잘 돌봐준다는 것을 주안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쥬도가 자신을,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어려워하지만, 미워하거나 싫어한다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것에 주안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조금 더 듬직해졌고, 여전히 건방지지만 솔직하였으며 나름 불평을 투덜거려도 끝까지 피터의 훈련을 따르는 근성까지.
쥬도가 확실히 많이 변한 것에 주안이 결심한 듯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고 할아버지 생신 때 마를렌으로 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드릴게요.”
“예?”
“……예, 라니요? 집에 갈 수 있게 해드린다고요.”
“으음……. 그건 좀…….”
“……왜요?”
어째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여서 그런지 오히려 주안이 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쥬도가 장난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를렌도 좋긴 한데, 솔직히 황도가 더 낫더라고요. 바다 냄새도 별로고, 시끄럽기만 하지, 황도는 깨끗하고 예쁜 여자들도 많고 꿍쳐놓은 용돈도 많아서 생활하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 피터 경만 뺀다면 놀고먹는 건 여기가 정말 최고잖아요.”
“……완전 날라리이시네요.”
“뭐 어떻습니까. 젊을 때 이런 생활을 하면 좀 놀았구나, 생각해 주지 나이 먹고 그러면 욕먹잖아요. 놀 수 있을 때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놀아줘야지요.”
“피터 아저씨한테 훈련을 더 열심히 시키라고 해버릴까 봐요.”
“에이, 농담도 참 살벌하게 하십니다.”
“……농담 아닌데요.”
“…….”
실실 웃던 쥬도의 표정이 잔뜩 굳었지만, 주안은 조용히 쥬도의 볼에 신성력의 치료를 마저 해준 후 손을 떼었다.
“어쨌든 마를렌으로 데리고 갈 거니까, 선택은 쥬도 씨가 하세요. 로닐 상단주님을 뵙고도 여전히 황도 생각이 나시면 함께 다시 오는 것이고 아니면 남으셔도 아무 말 안 할 거니까요.”
“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쥬도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기쁘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를렌에 그대로 남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주안을 따라 황도로 오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있던 유일한 선택지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재미없는 상단 운영이나 할 것이었겠지만, 지금의 쥬도에겐 새로운 선택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좀 더 다양한 것을 보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자신의 길을 찾고 싶다는 그러한 생각을 하니, 조금은 어른이 되지 않았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