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21화
피터와 담소를 나눈 후 연무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토미는 저택이 조금 소란스럽다는 것에 갸웃했다.
“소니아 누나가 또 워랜 경이랑 싸우시나…….”
요즘은 조금 조용하긴 했지만, 슬슬 다툴 때도 되었기에 소란스러운 저택의 분위기에 그러려니 하였다.
다만 그 사이에 끼여서 또 불행해질 솔을 생각하니,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소란이라 그런지 토미는 그러려니 하며 저택을 나와 그대로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토미! 야, 토미!”
“응?”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채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 바깥으로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한 남자의 모습에 토미가 갸웃하였다.
“쥬도 형?”
예전과는 달리 도련님 티는 다 벗고 건장한 청년이 되어버린 쥬도였지만, 어째 하는 행동은 여전히 버릇없는 도련님이었다.
참 한결같다는 생각에 토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쥬도가 저택을 뛰어다니며 자신을 부른 것에 의아했고 그가 혼자라는 것에 갸우뚱했다.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달려온 쥬도에게 토미가 물었다.
“왜 혼자세요? 도리안 경은 어디 가셨어요?”
“내가 혼자인 게 그렇게 이상하냐?”
“그야 뭐…….”
언제나 도리안이 곁을 지키고 보살피는 탓에 쥬도와 도리안은 마치 한 쌍처럼 움직였던 것이 토미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는 이미지였다.
이런 토미의 말에 쥬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도 마라. 요즘은 체스에 푹 빠져서 그런지 나는 놔두고 이리엄 경이랑 체스만 두고 다닌다니까.”
“우와, 진짜요? 그 이리엄 경이랑……. 도리안 경도 슬슬 쥬도 형한테서 독립하시나 보네요.”
이리엄 경이라면 이곳,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가주인 주레인 공작의 호위이자 책임자인 에밀리 경의 부관이었다.
둘의 관계는 단순히 취미가 비슷해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넘어 있었다.
이리엄 경은 케세니아 출신이자 뛰어난 생존전문가인 도리안을 통해 여러 가지 생존방식에 대한 지식을 얻었고, 도리안은 반대로 이리엄을 통해 피터와는 다른 형태의 검술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얻어갔다.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지식을 교환하는 형태였지만, 도리안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키울 좋은 기회였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뛰어난 기술을 얻을 수 있으니 서로에게 참으로 유익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을 모르는 쥬도였지만, 그럼에도 도리안의 개인적인 시간을 오히려 권장하고 있었다.
“독립은 무슨…….”
하지만 그게 딱히 싫지는 않은 듯 쥬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도리안이 자신과 함께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도리안이 그의 인생을 조금은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곳에 와서 가지게 되었다.
다행히 피터와 자주 어울리며 그런 걱정을 조금씩 덜어주더니, 요즘은 자신의 취미도 가지고 개인적인 시간도 보내는 것을 쥬도는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 생각을 토미에게 해주기에는 솔직히 부끄럽기에 작게 헛기침을 한 쥬도가 토미에게 다른 말을 꺼냈다.
“그보다 너 할 일 없지?”
“연무장에 훈련하러 가는데…….”
“무슨 온종일 훈련이야?!”
“쉬다가 가는 거예요. 저도 쉴 땐 쉬거든요.”
하지만 쥬도가 본 토미는 대부분의 일상이 몸을 혹사시키는 훈련들이었다.
특히 아스란 왕국에 다녀온 뒤로는 그게 더욱 심해진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혹사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토미는 이미 자신만의 틀을 만들어 정해진 훈련을 하였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방법을 이미 체득한 듯했다.
무엇보다 피터에게 그렇게 시달렸음에도 쥬도 자신은 토미와 검을 겨루는 게 매우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체격의 차이 따윈 이미 없어진 듯, 힘에서도 밀렸고, 기술은 말할 것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 해서 토미를 시기하거나 그러지도 않다 보니, 토미를 대하는 것은 예전과는 달리 꽤나 살가웠다.
주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중 귀족이 아닌 것은 쥬도와 함께 온 도리안, 그리고 토미와 그 여동생인 세라타뿐이었으니 묘한 동질감도 좋게 작용한 듯했다.
“어휴, 그래, 그래. 열심히 해라. 아, 그보다 잠깐 시간은 낼 수 있냐?”
“뭐, 잠깐이라면야…….”
“……배려 참 고맙다.”
“시간은 곧 금이라고 하잖아요.”
시원스럽게 웃는 토미의 모습에 쥬도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스란 왕국에 가기 전에도 종종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젠 정말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해도 모자라지 않아 보였다.
“그보다 갑자기 시간은 왜요?”
“아, 너 그 소식 못 들었어? 지금 저택에 그거 때문에 난리인데.”
“그 소식이요? ……소니아 누나랑 워랜 경 진짜 또 다투고 계세요?”
“그건 이제 별로 시끄러운 일도 아니거든.”
“……일상이 되었나 보네요.”
저택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끼게 만든 소니아와 워랜도 참 대단하다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런데 그거 외에 다른 일이 있나요?”
“있지. 그것도 엄청 큰일이 터졌지.”
“……?”
뭔가 참 재미난 일이라도 생긴 듯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쥬도의 모습에 토미는 더더욱 의문이 들었다.
“주안 공자님이랑 혼담이 오가는 아가씨가 직접 쳐들어 오셨다, 이 말씀이지.”
“……예?”
잠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쥬도를 바라보다 토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 그 링, 링베르가 공작가의 아가씨요?!”
“그래, 그 아가씨. 그것도 혼자 쳐들어 오셔서 완전 난리가 났다니까.”
“혼자?!”
아무리 평민이라 해도 귀족들의, 그것도 귀족가의 영애가 혼자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안다.
거기다 혼담이 오가는 집안으로 쳐들어 왔다는 것에 토미가 매우 혼란스러운 듯 어버버거리며 당황했다.
이런 토미의 모습에 큭큭거리며 웃던 쥬도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구경 안 갈래?”
“갑자기 웬 구경?!”
“그야 궁금하잖아. 공자님을 찾아 직접 혼자 올 정도인 아가씨도 궁금한데, 그런 아가씨를 대하고 있을 공자님의 당황한 모습도 볼 만할 것 아니야?”
“……도련님한테 맺힌 게 아직 있으셨어요?”
“서얼마아~ 내가 대체 뭐라고 공작가의 후계자이신 주안 공자님에게 그런 마음을 품겠어. 아무리 방치되어 피터 경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알아보지도 못하시는 그 공자님에게 불만이 어디 있다고.”
“…….”
불만이 매우 많아 보였지만, 지금의 쥬도에게 뭐라 말을 하면 쥬도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할 것 같아 토미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어쨌든 그 정도로 강단 있는 아가씨라는 게 신기하잖아?”
“흠…….”
확실히 쥬도의 말이 끌리긴 하였다.
자신의 도련님을 보러 홀로 찾아올 정도의 여성이라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그렇지? 잠깐만 보고, 주안 도련님 놀릴 거리나 찾…… 아니, 응원이나 해주러 가자고.”
“……피터 스승님한테 진짜 많이 시달리셨나 보네요. 그러다 도련님한테 혼나시겠어요.”
주안이 쥬도의 이런 음흉한 생각을 알게 되면, 웃으면서 피터에게 명령을 내려 쥬도를 괴롭힐 것 같아서 영 불안했다.
하지만 쥬도는 뒤의 일을 걱정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즐거움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조금 고민이 되긴 했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괴롭힘을 당해도 쥬도가 당할 것이니 조금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토미가 동의해 주자, 쥬도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았어, 그럼 가…….”
“……잠깐만요, 쥬도 형.”
토미가 갑자기 인상을 쓰자 쥬도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되짚어 보는 시간을 잠시 가졌지만, 그것은 아닌 듯했다.
토미의 시선은 쥬도가 아닌, 저택의 정문 쪽으로 향해 있었다.
“왜 그래?”
거리가 꽤 되어 있었기에 쥬도도 갸웃하며 토미의 시선을 따라갔다.
“경비들이 왜 저래?”
그리고 쥬도가 본 것은 정문을 지키는 경비들의 움직임이 매우 부산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왜 그런지는 알 수도 없었고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싸우고 있어요. 저 바깥사람들이 억지로 안으로 들어오려 해서, 경비 아저씨들이 막아 세우고 있어요.”
“……너, 설마 저게 제대로 보이고 들리는 거야?”
쥬도의 말에 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토미의 행동에 쥬도는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도 열심히 몸을 만들고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지만, 그래 봐야 이제 검을 좀 잡는 단계였을 뿐이다.
물론 토미가 자신보다 일찍 검을 잡고 피터에게 정식으로 훈련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성년자의 훈련일 뿐이며 성인의 훈련을 받은 자신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 그런 것이었다.
재능이 남다른 것도 알고, 겪어봤기에 피부로도 느꼈지만…….
‘이, 이 자식 설마, 벌써 육체 능력이 강화되고 있는 거야?’
서방 대륙 검술의 특징은 몸을 강화하는 것이며, 단지 육체가 단단해지고 힘이 세지는 것만이 아니라 육체의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반사 신경이 좋아진다거나, 청각이나 후각이 예민해진다거나, 시각이 좋아져 좀 더 멀리 있는 물체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그 예다.
그리고 토미는 이미 그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쥬도가 놀라는 것은 토미가 검을 배운 것이 채 1년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벌써 육체 강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랭크 3에 접어들었다는 말과 같았다.
‘이 미친 재능……!’
아무리 서방의 검술이 배우기 쉽고 단계에 빠르게 오른다 해도 정도가 있다.
이 육체 강화를 위한 훈련을 제대로 받지도 않았을 아이가 스스로 거기에 맞춰 능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해질 수밖에 없었다.
괜히 워랜과 검을 나누고, 피터가 즐겁게 가르치며, 저택의 기사들에게 귀여움을 받는 게 아닌 듯했다.
토미가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지만, 쥬도에겐 이젠 무서움이 더 컸다.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무슨 일인 거람…….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일으키는 거야.”
“그러게요.”
황도에서, 아니, 제국에서도 황실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이었고, 대신전의 신관들도 와서 기도를 드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웬만한 귀족들조차 방문하기 어려운 곳을 찾아와 정문에서 경비들과 실랑이를 벌인다는 게 꽤나 황당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신종 자살 방법인가…….”
“설마요.”
쥬도의 농담에 토미가 웃어주며 정문 쪽으로 향했다.
“응? 가보려고?”
“아저씨들이 많이 곤란해하는 거 같아서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려야죠. 저도 여기 사람이잖아요.”
“……그래, 뭐. 너도 주안 도련님의 사람이긴 하지.”
쥬도, 자신과는 달리 토미는 확실히 이 집안의 사람이 맞았다.
이름뿐인 호위인 자신과는 다르게 주안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 여동생 역시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좀 부럽긴 하네.’
그리고 이 감정이 질투라는 것을 깨닫고는 쥬도가 쓴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악연이기도 했고, 자신의 실수로 일어난 일로 인해서 벌을 받는 것이긴 했지만,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조금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현재의 생활이 딱히 싫지도 않았다.
물론 피터에게 받는 훈련은 매우 엄하고 힘들었지만, 점점 몸이 좋아지고 강해진다는 느낌이 들기에 요즘은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상단을 물려받아 상가에 몸을 담는 것보다 기사가 되고 싶기도 하였다.
‘아니, 이 몸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 되는 게 낫겠는데.’
그렇게 모질게 당하면서 만든 몸인데, 내버려 두기에는 솔직히 너무 아까웠다.
이러나저러나 상인 가문의 피가 흐르는 탓인지 손해 보는 짓은 절대 하기 싫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가보자. 어떤 정신 나간 얼간이인지 구경이나 좀 하자.”
“아하하…….”
험하고 거친 말을 일삼는 쥬도였지만, 토미도 그런 그가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쥬도와 함께 정문 쪽으로 향했고, 점점 다가갈수록 소란스러움이 쥬도에게도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토미와 쥬도가 다가가는 사이, 개방된 저택의 정문을 넘어 들어온 일단의 무리와 저택의 경비를 담당하는 병사들이 대치하며 소란스러움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낯이 익은 기사의 모습에 토미가 달려가며 그에게 말했다.
“아르센 기사님.”
저택의 경비담당 책임자인 아르센 경이 토미의 말에 고개를 돌렸지만, 평소 반갑게 인사해 주던 것과는 달리 그는 지금은 매우 곤란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이나 병사들도 지금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려는 이들을 상대하느라 매우 곤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 사람들은 대체 뭐야?”
토미도 궁금했지만, 함께 온 쥬도 역시 이들을 보며 황당해한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십여 명에 가까운 이들이 무장을 한 채 남의 집 정문을 넘은 것도 모자라 아주 당당하기까지 하다.
아니, 그 당당함의 중심에는 열 살 남짓한 남자애가 있었다.
바로 제이미 링베르가, 그가 자신들의 호위를 이끌고 마르티네스 공작가로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당당하게 정문을 넘어 발을 디디며 소리쳤다.
“우리 누나 내놔!”
그의 외침이 저택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