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20화
주안은 바구니를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들고 달렸고, 세라타 역시 치마를 붙잡고 앞서가며 주안을 안내했다.
그리고 세라타가 안내한 곳, 응접실의 앞에 저택의 하인과 하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주안이 온 것을 보고는 얼굴이 환해지더니 고개를 숙여 주안에게 인사하였다.
주안이 그들을 지나쳐 가자, 한 사람이 주안의 손에 든 바구니를 대신 받아 들었고, 주안은 여유로워진 손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세라타에게 물었다.
“엄마는 혹시 아셔?”
“아뇨. 모르세요. 하녀장님이 미네아 아가씨를 안내하시고는 그대로 안젤라 님 방으로 오셔서, 저한테 도련님을 얼른 부르라고 하셨거든요…….”
“휴우……. 그나마 다행이네.”
노련한 하녀장이라면 미네아 링베르가 영애가 저택에 온 것을 돌아갈 때까지 숨길 수 있을 것임을 알기에 주안도 안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미네아 링베르 영애가 왜 여기에 있냐는 것이다.
“내가 없다는 거 말씀은 드렸어?”
“잠시 자리를 비우셨다고 하녀장님이 말씀드렸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기다리시겠다고 하셔서…….”
“하아…….”
주안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었지만, 조금 모자란 듯 세라타가 손을 뻗어 옷차림을 수정해 주었고,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주며 좀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주안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일행은? 혹시 그 버릇없던 제이미 링베르가도 왔어?”
“아뇨, 혼자 오셨어요.”
“혼자?! 설마 호위도 없이?!”
세라타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주안이 황당하다는 듯했다.
세상에 어느 귀족 아가씨가 혼자 바깥을 돌아다닌단 말인가.
게다가 이곳은 링베르가 공작가의 근거지도 아니다.
아무리 황도라고 해도 불량한 이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링베르가 공작가의 황도 저택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과도 거리가 꽤 있었다.
“아니, 무슨 아가씨가 혼자 밖을 돌아다니는 거야?!”
“저어…….”
“진짜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러다 큰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당연하…….”
순간,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해지고, 특히 세라타가 당황하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것에 주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특히 자신과 대화하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세라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주안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열린 응접실 문 너머로 제이미 링베르가와 많이 닮은 푸린 머리카락과 연녹색 눈을 가진 여성이, 눈을 깜빡이며 주안을 바라보는 동시에 귀엽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어, 저기…….”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친 주안이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주안만이 아니라 세라타나 이곳에 모여 있던 이들 모두가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주안의 걱정이 담긴 외침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수 있었기에, 잘못하면 모욕으로 듣고 불쾌해하거나 혹은 가문의 문제로 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네아 링베르가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주안에게 말했다.
“주안 공자님은 정말 다정한 분이시네요. 응, 마음에 들었어요.”
“죄, 죄송합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더듬거리며 황급히 사과의 말을 꺼내던 주안의 모습에 미네아 링베르가가 응접실을 나와 주안을 살펴본다.
아니, 주안 역시 그녀를 좀 더 제대로 살펴보았다.
제이미 링베르가와 많이 닮았지만, 제이미와는 달리 좀 더 순진한 얼굴과 눈매를 가져서 그런지, 동갑이라 들었지만 오히려 동생처럼, 세라타의 또래처럼 보일 정도다.
그래도 키는 꽤 큰 듯 주안과 눈높이가 맞을 정도라 얼굴만 본다면 어리숙해도 전체적으로 보면 꽤나 늘씬한 미녀였다.
“얼굴도 잘생기시고 다정하시고 배려심도 많으시고……. 헤헷.”
“저, 저기?”
그리고 슬그머니 주안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 주안이 뒤로 물러나 그 손길을 피하자, 오히려 생글거리며 더욱 다가와 주안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공자님.”
“……예?”
잠시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주안이 갸웃하자, 미네아 링베르가가 방긋 웃으며 재차 말했다.
“저는 꼭 주안 공자님과 결혼하고 싶어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예에에에에?!”
황당한 미네아 링베르가의 선언에 주안의 비명이 저택에 울려 퍼졌다.
* * *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마주 앉게 된 주안과 미네아 링베르가였지만, 방실거리며 웃고 있는 손님인 미네아와는 달리 집주인이나 마찬가지인 주안은 오히려 매우 불편했다.
일단 들어오기 전 링베르가 저택에 연락을 보내라 부탁하였고, 그들이 올 때까진 이곳에서 미네아 링베르가와 함께 있어 주어야만 하였다.
불편하고 함께 있는 것조차 가시방석인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손님으로서 대해주기 위해 주안이 조용히 말을 먼저 꺼내었다.
“정말 혼자 오신 것입니까?”
“네.”
“…….”
방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미네아 링베르가의 모습에 주안은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어졌다.
그때, 제이미 링베르가가 호위도 없이 혼자 다니는 주안을 보고 그딴 귀족이 어디 있냐고 소리치던 그 심정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갔다.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쉰 주안의 모습에 미네아 링베르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보다 주안 공자님은 좋아하는 게 뭐예요? 저는 빵 먹는 것도 좋아하고 빵 만드는 것도 좋아해요.”
“예? 저는 남부 과일을 좋아합니다.”
“어머, 정말요? 그러면 다음에 남부 과일들을 이용한 케이크를 만들어 드릴게요.”
“아, 아니, 그럴 필요는…….”
“그런데 여긴 정말 다 반짝반짝한 게 너무 깨끗해 보여요. 청소 잘하는 비법이라도 있나요?”
“아, 그건…….”
뭐라 설명을 할 방법이 없어 우물쭈물거리는 주안의 모습을 보던 미네아가 배시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그 행동에 주안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네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척이나 오래된 동방의 명인이 만든 도자기를 보며 미네아 링베르가 영애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아~ 이게 동방의 도자기라는 거죠? 처음 봐요……. 역시 마르티네스 공작가라 그런지 동방의 물건들이 많네요.”
도자기만이 아니라 동방의 장식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매우 신기한 물건들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좋아하는 미네아 링베르가 영애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주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네아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부 새것처럼 보여요. 얼마 전에 구매하신 건가 봐요?”
“꽤 오래된 겁니다. 구매한 것은 15년쯤 됐나……. 만들어진 것은 백여 년 전이라 들었습니다.”
“정말요? 그런데 정말 새것 같아요. 청소하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나요?”
“그런 건 딱히…….”
저택의 많은 부분은 예전 낭비벽이 무척 심하던 때의 안젤라가 주기적으로 바꾸어 늘 새것이 되었지만, 응접실이나 주레인 공작의 방, 그의 서재 정도는 처음 이곳에 지낼 때의 것 그대로의 가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것 그 이상의 반짝임과 깨끗함을 지니고 있어 처음 본 사람들 모두가 미네아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보다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어머나? 말씀드렸는데…….”
“저와 결혼을 하고 싶다, 이 말씀 말입니까?”
“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하는 미네아 링베르가의 모습에 주안은 대체 이 아가씨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다양한 이들과 알고 지냈던 주안이다.
그중에서도 미네아 링베르가 영애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 혼담은 양가 부모님들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아쉽지만 저에게 말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없을까요?”
“예?”
이 어리숙하고 헐렁해 보이는 아가씨가 주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레인 공작님께서 이미 거절의 의사를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정말 주레인 공작님의 의사일까요?”
“…….”
그 투명한 연녹색의 눈은 무언가를 안다는 듯, 주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안 공자님의 마음에 따라, 이 혼담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그건…….”
생긋 웃고 있는 미네아에게 주안은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냥 확실하게 ‘예, 맞습니다. 저는 결혼 의사가 없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저와의 혼담을 이루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까?”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예요.”
“가족?”
“예,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하는 것, 가족과 가문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야 하잖아요. 이왕이면 다정하고 따뜻하고, 돈도 많고 잘생기면 더더욱 좋죠.”
반쯤 농담으로 들리긴 하였지만, 그녀가 가족을 생각하는 것은 진심이라는 사실은 주안에게 전해져 왔다.
이런 분을 이전에도 만나본 일이 있었기에, 그 마음이 어떤지 너무나 잘 알았다.
마치…….
‘유우나 공주님 같잖아.’
유우나 공주 역시 가족을 위해, 자신을 거금을 들여 사줄 제국으로 왔었고, 지금의 미네아 링베르가 역시 매우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스란 왕국과 링베르가 공작가의 사정은 전혀 비슷하지 않다는 점이다.
식량의 자급자족에 문제가 있을 뿐, 금전적인 여유로움, 치안, 군사력 등등만 놓고 보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링베르가 공작가인 것이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군요.”
“무엇이 말인가요?”
미네아 링베르가가 작은 도자기 인형을 매만지다 주안의 말에 갸웃했다.
“미네아 영애께서 어째서 혼담에 이렇게 집착하시는 것입니까? 오히려 서부 가문들과의 혼담이 링베르가 공작가에 더욱 큰 이득을 안겨주는 것 아닌가요?”
주안 역시 혼담에 대해서 고민할 때라면 동부의 가문에 우선권을 두고 진지하게 생각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황가와의 결합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생각하겠지만, 사실 황가와의 결합은 황가에게 이득이지, 맺어진 가문 자체에는 큰 득이 없다.
오히려 지배하에 있는 지역의 가문, 가신들의 가문과의 결합이 더욱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주안의 말뜻을 이해한 미네아 링베르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의 말이 확실히 올바른 귀족가의 결합이긴 하죠. 하지만 세상에는 정론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변수가 생기면 그 변수에 맞게 움직일 수밖에 없답니다.”
“변수라……. 마치 링베르가 공작가에 큰 변수가 생겼다고 들립니다만?”
“네, 조금 큰 변수가 생겼어요. 가문의 힘으로도, 서부의 힘만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커다란 변수가 생겨 버린 것이죠.”
“……그거 숨겨야 하는 사실 아닌가요?”
“글쎄요. 언제고 밝혀질 일이라, 크게 상관은 없어요. 그래도 비밀이니까, 소문은 내지 말아주세요.”
“흠…….”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비밀을 당부하는 미네아 링베르가의 귀여운 모습에 주안은 자신도 모르게 볼이 발갛게 붉어졌다.
동갑이라고 들었고 그 외모는 키 때문인지 오히려 연상으로도 느껴지지만, 하는 행동과 말투는 정말 어린아이 같은, 상반된 매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하지만 어떤 변수가 있고, 그것을 위하신다고 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너무 냉정하세요…….”
“냉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동방의 말로 결혼은 인륜지대사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무엇보다 설령 결혼한다 해도 제가 가문을 움직일 만큼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제 뜻대로 링베르가 공작 가문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힘이라면 적어도…….”
무어라 말을 하려던 미네아 링베르가였지만, 응접실 문에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열리더니 세라타가 안으로 들어왔다.
“도, 도, 도련님! 큰일 났어요!”
“큰일?”
혼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으로 쳐들어온 미네아 링베르가보다 더 큰일이라는 게 있을까, 하였지만 세라타가 다급한 듯 소리쳤다.
“제이미 링베르가 공자님이 쳐들어오셨어요!”
“…….”
그 말에 주안만이 아니라 미네아 링베르가마저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던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다.
확실히 이보다 더 큰일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