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19화
세상에는 억만금을 주어도 얻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사람들은 시간이라고 한다.
한정적이지만 이 시간을 살 수 있는 이능을 지닌 워프 게이트는, 그것을 보급하는 순간 문명을 몇 단계나 뛰어오르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따른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다.
정체된 이 세상을 반강제로 움직이는 이상, 그 반대급부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아미엘은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고, 주안 역시 그것을 이해하고 자신이 너무 나섰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아미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였다.
“죄송해요, 아미엘 님.”
“무엇이 말이더냐.”
“너무 제 입장, 인간의 입장으로 부탁을 드려서요. 아미엘 님이, 인간을 신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미엘의 시대에 인간들이 어떤 적대적인 행위를 취하고 피해를 끼친 것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내비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런 주안의 행동에 살포시 미소를 지은 아미엘이 말했다.
“괜찮다. 적어도 지금의 이 시대가 인간을 증오하던 그 시대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이해하도록 하마.”
“아미엘 님에게 바깥의 세상, 인간들이 어떻게 변한 것인지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적어도 함께했던 세냐와 마냐, 아냐는 알 거예요. 세상은, 인간들은 더 이상 아미엘 님의 요정들이나 이종족들을 적대시하는 그런 존재들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이런 종족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다.
주안의 말에 아미엘이 고개를 돌려 세 요정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아미엘의 눈길에 세냐와 마냐, 아냐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아미엘은 이해했다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아미엘에게 주안이 재차 말했다.
“물론 여전히 악행을 일삼고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마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 남의 것을 탐하고 취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본성이니,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 맞아요. 욕망으로 살아온 인간들이니까요. 다만, 그 욕망을 억누를 법과 질서라는 게 있어요. 헛된 망상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만들, 그런 힘이 있는 세상이죠.”
주안이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이 워프 게이트가 현재의 제국. 그리고 자신의 가문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있다는 점이다.
그 이점을 최대한 살린다면 헛된 욕망에 이 워프 게이트를 탐하는 이들에게 징벌을 가할 힘 정도는 있었다.
물론 혼자의 힘이 아닌,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들 역시 적당한 욕망을 채워줄 당근을 쥐여준다면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힘을 보탤 것이 뻔했다.
힘이 없었다면 금세 휩쓸렸겠지만, 마르티네스 공작가엔 충분한 능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이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폭주하는 것이지, 다른 이들이 아니었다.
“너의 말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나의 판단이 곧 내 아이들과 이곳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니, 쉽게 답을 줄 수는 없구나.”
“이해하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구나.”
당장 거절해도 주안은 원망할 수도 없었기에 생각을 해본다는 말조차도 너무나 기뻤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너의 가문의 땅이자 엘 하임 마를렌이 머무른 장소와 통하는 길은 허락하겠다.”
“감사해요, 아미엘 님.”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도움이 되기에, 주안은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며 아미엘에게 재차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해주었다.
이런 주안의 행동에 아미엘에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고개를 든 주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를 보면 자꾸 그 아이가 떠오르는구나.”
“엘 하임 마를렌이라는 분이요?”
“그래.”
아미엘에게 엘 하임 마를렌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솔직히 주안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이나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전해져 왔다.
“인간과 섞였다고는 하나, 너를 보면 자꾸 그 아이가 생각이 난단다. 이곳에는 이미 내가 알던 아이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너에겐 그 흔적이 있어…….”
“메데아 대족장님도 있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달란트와 그 아이는 많이 닮지는 않구나. 이런 말을 하긴 미안하지만, 달란트 그 아이는 매우 무섭게 생겨서 말이다. 메데아라는 아이는 무척이나 예쁘지 않더냐.”
“하하……. 메데아 대족장님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하면 엄청 화내실 걸요.”
“어이해서?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은 좋은 말로 기억한다만…… 이제는 아니더냐?”
“그런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는 남자, 여자로 구분하지 않고 오직 전사로만 불리는 대밀림의 원주민들에게, 특히 메데아 대족장에게 여성으로 대하는 것은 매우 큰 모욕과도 같을 것이다.
주안이 뭐라 설명할까 고민하였지만, 아미엘은 그저 귀엽게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그런 아미엘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주며 주안이 말했다.
“어쨌든, 그분의 대신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 찾아와서 아미엘 님이랑 이렇게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어 드릴게요.”
“후훗…… 그거참 고마운 말이로구나.”
“그리고 아미엘 님도 가끔 저희 집에 놀러 오셔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찾아와 주세요.”
“음? 그래도 되겠느냐?”
“당연히 되죠. 메데아 대족장 님도 초대할 생각인걸요. 부모님에게, 할아버지에게 꼭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호오…….”
이미 쿠단을 통해서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이라 해도, 제이미 링베르가라는 버릇없는 녀석의 시비만 없었다면 다른 이들과 섞여서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보았기에 주안은 안심하고 메데아 대족장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초대할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받은 배려와 도움에 대한 답례를 꼭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미엘 님도 오실 때, 직접 인간 세상이 어떤지, 어떻게 바뀐 것인지 보셨으면 좋겠어요.”
“흐음? 내가 말이더냐.”
“네.”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해드리는 이야기에 거짓이 섞여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 거짓이 없다 해도 인간의 관점에서 알려 드리는 것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으니……. 아미엘 님이 보시고 인간들을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최대한 사실 그대로를 알려주고 싶어도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또 주안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의 편에 서서 좋은 말만 해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주안은 자신의 말뿐만이 아니라 아미엘이 직접 보고 느끼고 판단하였으면 했다.
이런 주안의 마음을 이해한 듯 아미엘이 싱긋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도록 하마. 그리고 나 역시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을 좀 해도 되겠느냐.”
“말만 하세요. 제가 의외로 해드릴 수 있는 게 많은 집의 아들이거든요.”
히죽 웃으며 당당하게 말하는 주안의 모습에 아미엘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 세상의 책들을 좀 부탁하마.”
“책이요?”
“그래, 꼭 역사적인 기록을 한 책이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 다양한 시선으로 보고 판단한 책들이면 좋겠구나.”
“황도의 가장 큰 서점에서 모든 책을 다 사서 보내드릴게요.”
“후훗, 그럼 부탁하도록 하마.”
반쯤 농담이긴 하였지만, 절반은 진심이었고, 황도에서 가장 큰 서점에 비치된 책 중 엄한 책을 제외한 모든 책을 사서 아미엘에게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안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아미엘이 작게 웃었다.
* * *
생각 같아서는 조금 더 오래 머물고, 더 나아가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주안이었지만, 약속을 잡고 온 것이 아니라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만, 언제든 이쪽으로 올 수 있고 주안 역시 아미엘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으니 아쉬움이 큰 것은 아니었다.
대신 오늘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세 요정 꼬맹이는 오랜만에 아미엘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주안은 그런 아미엘과 세 요정 꼬맹이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음…….”
왠지 작지만, 집안 가득 그 존재감을 뽐내던 세냐와 마냐, 아냐가 없어 조금 허전하긴 했다.
주안은 아미엘이 선물로 준 양손에 든 큰 바구니와 그것에 담긴 다양한 과일들, 그리고 세계수의 수액이 담긴 병을 들고 방을 나섰다.
아미엘은 주안의 엄마의 임신 소식을 세냐로부터 전해 듣고는 세계수의 수액을 직접 채취해 주었다.
세계수의 꽃과 열매, 아미엘의 축복까지 더해진 것이기도 했다.
몸에 좋다고 해서 감사하게 받아 오긴 했지만, 그 수액의 정체가 죽은 사람도 되살린다는 전설의 엘릭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아미엘 역시 알려주지 않았으니 주안으로선 별 부담도 없었다.
“과일은 넉넉하니 다 같이 먹기로 하고, 이 물은 많지 않으니 엄마랑 아빠만 드려야 하나…….”
어차피 다음에 갈 때도 받아올 수 있을 것이니, 그땐 할아버지들에게도 드리기로 하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주안은 그대로 저택의 식당 쪽으로 향했다.
과일은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여러 가지 요리로 만들어 먹으면 그만큼 다양한 맛이 났기에 부탁하고자 하였다.
특히 슬슬 여름이 다가오기에 살짝 얼린 셔벗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조용하지?”
복도를 걸으며 이상하게 조용한 저택 안의 분위기에 주안이 갸웃했다.
사절단에서 함께했던 이들이 모두 돌아갔다고 하지만, 그래도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았다.
항시 작은 부분도 세심하게 관리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임을 알기에 지나치게 조용한 주변 상황이 영 찜찜했던 것이다.
‘설마 동화책처럼 그렇게 된 건 아니겠지?’
동화책의 단골 소재인 요정과 관련된 이야기 중 ‘요정의 나라에 갔다 돌아온 사람은 그 짧은 시간을 보냈을 뿐임에도 돌아왔을 땐 수십 년이 지나 있었다’라는 이야기들이 있으니 말이다.
‘에이, 아니겠지.’
이미 세계수에 있는 아미엘의 보금자리에 갔다 온 경험이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던 것인지 주안이 잠시 바구니를 내려놓고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하지만 워프 게이트를 넘기 전 보았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은 겨우 한 시간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주안은 다시 바구니를 집어 들고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복도의 끝 모퉁이에서 익숙한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나더니 주안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앗?! 도련님!”
“아, 세라타!”
세라타의 목소리에 주안의 표정이 꽤나 밝아졌고, 복도의 끝에서 도도도 달려오는 세라타에게 뛰어다니다 넘어진다는 주의를 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주안과는 달리 달려오는 세라타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평소와는 달리 달려오는 것도 그렇고 다급한 표정도 의아했다.
그리고 이내 주안의 앞까지 달려온 세라타가 헥헥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자 주안은 자신도 모르게 엘릭서가 담긴 유리병을 세라타에게 건네줄 뻔했다.
그런 세라타에게 주안이 물었다.
“엄마랑 같이 안 있었어?”
“그, 그, 그것보다 지금 큰일 났어요!”
“웬 큰일?”
“그, 그게 그러니까…….”
허둥거리던 세라타를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양손에 짐이 가득이었다.
대신 알아서 심호흡하던 세라타가 이내 긴장하며 주안에게 말했다.
“오, 오셨어요.”
“오셔? 누가?”
“……그 아가씨요.”
“……?”
갸웃하는 주안에게 세라타가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듯 허공에 손짓까지 하며 말했다.
“그, 있잖아요. 성격 나쁜 이상한 공자님의…… 주안 도련님이랑 혼담이 오가는, 그 집의 아가씨 말이에요.”
“설마…….”
그 말을 이해해 버린 주안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세라타 역시 주안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말을 해주었다.
“미네아 링베르가 아가씨가, 직접 찾아오셨어요, 도련님.”
순간 주안은 아미엘에게 받은 소중한 과일과 엘릭서가 담긴 병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