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18화
주안은 멍하니 처음 아미엘과 대화를 하였던 그 방에서, 그녀를 바라보다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일렁이는 공간 너머로 자신의 방이 보이는 것이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주안의 상식, 그 이상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이게 가능한 것이었군요.”
“후훗. 믿지 못하였나 보구나.”
“어휴, 말도 마세요. 얼마나 의심이 많은지. 이래서 인간들이란……. 쯧쯧.”
혀까지 차는 세냐의 행동에 뭐라 불만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아미엘 님~!”
세냐와는 달리 오랜만에 아미엘을 만나는 것에 기쁜 듯 마냐와 아냐가 아미엘에게 날아가 그 품에 포옥 안겼다.
그리고 다정하게 두 어린 꼬맹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미엘이 말했다.
“고생이 많았구나.”
“냐웅…….”
“헤헷.”
마냐와 아냐가 그런 아미엘의 손길에 기분 좋은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주안과 함께 있을 때도, 안젤라와 함께 있을 때도 보여주지 않은 미소였다.
“별일은 없으셨죠?”
“딱히 변한 것은 없구나. 세계수는 건강하고, 성흔의 빛은 여전하며, 인간의 위협이 없으니, 평온하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하하……. 인간들이 대밀림을 적대하던 시기는 이미 끝났어요. 안심하셔도 괜찮아요.”
“그래…….”
잔잔한 미소를 지어주던 아미엘이 조용히 주안에게 말했다.
“달란트의 아이들을 보러 가겠느냐? 네가 온 것을 알면 무척 기뻐할 것이다.”
“음, 오랜만에 메데아 대족장님을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보다 아미엘 님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에게 부탁을?”
잠시 갸웃하던 아미엘이 이내 허공에 손짓하자,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바닥에서 불쑥 솟아났다.
테이블 위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저게 마법인지, 아니면 다른 이능의 힘인지 주안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법적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그래도 저런 마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앉도록 하자.”
“네…….”
그래도 묻기보다는 일단 아미엘의 말에 따라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아미엘이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주안의 찻잔에 차를 가득 따라주었다.
“이번에 세계수에서 열린 첫 열매를 이용해 만든 차이다. 맛이 괜찮을 것이다.”
“열매요? 세계수에, 열매도 맺혔어요?”
“나는 세계수의 관리자. 그리고 나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계수는 우리의 보금자리이며, 쉴 수 있는 공간과 먹을 수 있는 열매와 입을 수 있는 잎을 제공한단다.”
“헤에, 그렇구나…….”
작은 요정들이라면 확실히 세계수의 나뭇잎을 이용해 옷을 만들어 입어도 전혀 무리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열매라는 말에는 조금 놀랐다.
주안이 처음 보았던 세계수는 확실히 상상 그 이상으로 컸고, 푸르른 잎과 크고 작은 가지들을 지녔던 이 나무는 여전히 건강히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열매를 보지는 못했었다.
이런 주안의 의문에 설명해 주듯, 세냐가 나서서 말했다.
“흐흥~ 우리가 아니면 세계수에 열매를 맺히게 할 수 없거든요. 물론 그걸 제대로 관리하는 건 엘 하임의 엘프들이었지만, 생명의 잉태는 바로 우리의 몫!”
“마냐는 빨간 과일을 잔뜩 만들 수 있어!”
“아, 아냐는 달콤한 과일들을 잔뜩 만들 수 있어요.”
게다가 종류도 다양한 듯했다.
아니, 실제로 다른 요정들이 바구니를 들고 날아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그 바구니에는 색색의 여러 과일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과일이 맺히는 거예요?”
“그러하나.”
“그거참, 신기하긴 하네요.”
하나의 나무에 여러 가지의 과일들이 열리는 나무라니…….
뭐, 애초에 이런 큰 나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였지만 말이다.
주안은 아미엘이 권한 차보다 바구니의 과일에 눈길이 갔고, 그것을 알아차린 아미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과일 하나를 직접 집어 들어 주안에게 권했다.
“잘 먹겠습니다.”
그것을 받아 든 주안 역시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아미엘에게 인사해 준 후 작은 분홍빛 과일을 껍질 채로 입에 쏙 집어넣었다.
과일을 좋아하는, 특히 남부에서 나오는 과일들을 좋아하는 주안이기에 내심 기대하는 것도 컸다.
“…….”
그리고 과일을 한 입 깨물자, 순식간에 입안 가득 향긋함과 달콤함이 퍼져 나갔다.
얼마나 강렬한 단맛인지, 주안의 볼이 금세 발갛게 변하며 작은 과일에서 터져 나온 과즙이 혹시라도 흐를까, 손으로 입까지 막은 채 오물거리며 금세 삼켜 버렸다.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맛이었고, 이런 주안이 모습에 세 요정 꼬맹이뿐만이 아니라 아미엘마저 장난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세계수의 과일이니라. 맛이 괜찮지 않으냐?”
“괘, 괜찮은 것 정도가 아니라……. 이건 진짜 대단한데요?”
빈말이 아니라 이 과일이 대밀림 바깥의 세상으로 흘러간다면, 금화를 주어서라도 이 작은 과일 하나를 사려고 귀족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미사여구 따위 필요 없이, 그저 그 감정 그대로 한 말에 아미엘이 만족한 듯했다.
“달란트의 아이들에게도 가져다주니, 아주 좋아하더구나.”
“으……. 그건 좀 부러운데요.”
“후훗, 그러하느냐. 갈 때 넉넉하게 바구니에 담아주도록 하마.”
“정말요? 고마워요, 아미엘 님.”
가족들, 특히 엄마에게 이 과일을 주고 싶었던 주안이었기에 아미엘의 배려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주안의 순수한 이런 모습에 아미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지 맛으로 먹는 것도 있으며, 몸이 허할 때, 아플 때, 상처가 났을 때……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으니, 세냐에게 물어보면 알려줄 것이다.”
세계수에서 나오는 것들은 버릴 게 없는, 다양한 쓰임새를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과일들은 그 종류가 다양한 만큼 다양한 효과들을 냈으며 잎은 상처 치료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세계수의 뿌리가 잠겨 있는 물 역시, 세계수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껍질을 이 물에 달여 먹거나 목욕을 하면 피부가 매우 좋아진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혀 모르던 달란트 부족이나 인간들에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주안 역시 그러한 사실 자체를 몰랐기에, 그저 몸에 좋은 과일 정도로 받아들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내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이더냐.”
“아,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이 워프 게이트를 다른 장소에도 설치해도 괜찮을까 싶어서요.”
“워프 게이트를?”
“실은 황도의 저희 집과 말씀드렸던 저희 가문의 근거지인 마를렌의 공작성을 연결할 필요가 있거든요.”
“마를렌에 대한 조사 때문이더냐?”
“예, 그 부분은 세냐의 판단으로도 가능하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아미엘 님의 허락을 구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주안의 행동에 세냐가 조금 뾰로통해졌지만, 아미엘은 주안의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바깥에서 세냐의 판단은 곧 나의 의지가 이어진 것. 세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허락을 한 것이니 마음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
아미엘이 괜히 세 요정 꼬맹이를, 특히 세냐를 보내준 것이 아닌 듯 그녀는 세냐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세냐가 히죽 웃으며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주안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주안은 그런 세냐를 무시한 채 말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조금 더 다양한 장소에 이 워프 게이트가 필요할 수가 있어요.”
“다양한 장소라…….”
“아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미엘 님이 계셨던 시대와 저희가 있는 이 시대는 무언가 많이 달라요. 특히 이 워프 게이트를 이용한 이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시대죠.”
집으로 돌아와 주안은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틈틈이 역사, 특히 마법에 관한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해 읽었지만, ‘워프는 간간이 있었다’ 정도의 자료는 존재했지만, 워프 게이트와 그것을 이용하던 시대에 관한 자료는 전혀 없었다.
“대륙은 크고 넓은데, 사람들은 이 대륙을 이동하는 시간이 굉장히 길어요. 불편한 것도 너무 많죠. 하지만 이 워프 게이트만 제대로 활성화된다면…….”
“……하나 인간은 영악한 존재다. 이것을 쥐고 어떤 일을 벌일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두렵구나.”
“아미엘 님…….”
과거에 인간들에게 어떤 일을 당한 것인지, 주안으로선 알 수 없지만 상상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는 아미엘이 이토록 인간을 경계하고 두려움까지 가지는 것에 주안도 마음이 쓰렸다.
그녀는 주안을 엘 하임 마를렌이라는 엘프의 후손이라 칭하지만, 주안의 정신은 인간 그 자체이고 인간 사회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명 간악하고 잔인하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사람의 목숨을 너무나 쉽게 빼앗아가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은 매우 이기적이고 이기적인 만큼 악한 이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었고 본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어요. 아미엘 님이 걱정하는 일을 일으키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그것을 반드시 막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그래도 사람은 그 본능만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양심이라는 것을 가졌으며, 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주안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막고자 하는 이들이라 믿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길이 어긋나더라도 반드시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많은 이들이 있을 것이니 말이다.
“대암흑기 때의 그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낸 것도 결국 인간이었어요. 실수를 하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도 결국 인간이니까요.”
“너는 그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느냐?”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모두와 함께 그 가능성을 믿고 같이 이겨내야 하는 것이죠.”
“애초에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 터인데?”
“이 일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어요. 결국 이리저리 반복하는 게, 인간이거든요.”
멍청한 짓으로 세상을 어지럽혔다가도 또 어느샌가 정상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서 세상을 바로잡는 것, 그것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게 인간이었고 그 반복 속에서 발전하는 게 바로 세상인 것이다.
“참으로 멍청하지만, 그 멍청함도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어요.”
“결국 이것을 하나 안 하나, 인간은 비뚤어진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구나.”
“그리고 또 되돌아오게 되는 거죠.
“정말 인간이란 참으로 멍청하구나…….”
“하하…….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 욕망으로 인해서 그토록 발전하고 강성하며, 세상을 차지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결국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욕망이 없는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이니 말이다.
“워프 게이트는 분명 현재의 세상을 급속도로 발전시켜 줄 대단한 것이에요. 부작용도 크겠지만, 그것을 이겨내지 않으면 이 세상은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 한다고 생각해요.”
대암흑기 때 소실된 자료들은 너무나 많았고, 문명은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난 뒤 정체되어 버린 상태였다.
주안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자료를 보면 볼수록,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
세상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으면 고이게 되고 고인 것은 결국 썩어 없어지는 것, 이 세상도 점점, 그 고이고 썩고 없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듯했다.
“너는 그 변화의 중심에 서고 싶은 것이냐.”
“아니요. 제가 중심이 되는 게 아니에요. 모두가 다 같이 변화를 이끌어야 하죠. 세상은 혼자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존재는 아니잖아요.”
아무리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강성하다 해도 그 위에 황실이 있었으며, 대륙에는 많은 국가도 있다.
바다 건너 동방 대륙에는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도 존재하며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가문 역시 존재한다.
주안이 가주가 되어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움직인다 해도 혼자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은 하지 못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제국의 힘도 필요하고, 때론 다른 가문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다른 국가와 협력도 해야 하고, 대밀림의 달란트 부족과 아미엘 님의 요정들의 힘도 필요할 수 있을 거예요. 위험도 있을 것이고, 넘어지고 다칠 때도 있겠죠.”
“그래도 하려는 것이구나.”
“예, 워프 게이트는 그런 것을 감안해서라도 현재의 세상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요.”
워프 게이트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그동안 들였던 수십, 수백 시간을 그저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신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상에 시간이라는 이능을 부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