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17화
축제가 끝나고 그 여운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확실히 사절단이 돌아간 뒤로는 서서히 원래의 황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북적였고 활기찼지만, 밤이 되어도 불이 환하게 비추던 야시장은 사라졌다.
그 많던 공연과 음유시인들, 떠들썩하던 이들이 사라지니 조금 어색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곧 다시 일상에 익숙해져 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함께 해오던 사절단의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끼는 것은 바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이었고, 한산해진 것에 어색함을 느낄 시간도 없이 주안의 일상은 오히려 더욱 바빠졌다.
특히 지금은 저택의 정원 한쪽에서 주안은 말에 올라탄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말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혹여 떨어진다 하여도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말을 곁에서 만져보고 쓰다듬어 주는 것과 말 위에 올라타는 것은 정말 달랐다.
그 순하고 귀여운 말의 등 위에 올라타니, 세상이 갑자기 커져 버린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높은 곳에 다른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오롯이 말의 안장에 앉아, 자신의 손에 쥐 고삐만이 유일한 안전줄이라는 점은 주안에게 더욱 큰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주안의 모습에 피터가 작게 한숨을 그리고 곁에 있던 토미와 세라타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주안을 바라보았다.
“자, 이렇게 허리를 세우시고 말의 움직임에 따라 엉덩이를 들어보십시오. 한결 편하실 것입니다.”
“으음…….”
피터가 직접 주안에게 말고삐 잡는 법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손으로 주안의 엉덩이를 들게 만들었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 행동에 따라 주안이 허리를 세우고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바른 자세로 교정한 뒤 엉덩이를 안장에 앉게 만든 피터가 직접 말의 얼굴을 쓰다듬어 준 뒤에 조심스레 이끌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주었다.
“가장 먼저 떨쳐내야 할 것은 두려움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선 두려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것을 먼저 벗어 던지십시오.”
“네…….”
느릿느릿 움직이는 말 위에서 새파랗게 질린 주안의 모습은 피터를 안쓰럽게 만들었지만, 토미나 세라타에겐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그런 두 남매의 행동에 주안이 입술을 샐쭉 내민 채 투덜거리며 노려보았지만, 이전 같았으면 금세 웃음을 멈추고 시선을 피할 두 녀석이, 이제는 주안을 똑바로 보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으…….”
생각 같아서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지만, 말이 놀랄까 그럴 수도 없었고, 내려가 토미에게 꿀밤도 먹이고 싶었지만 내려가는 것도 무섭다.
그것을 알기에, 저 밉살 남매가 주안을 보며 놀리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피터의 손에 이끌려 여유롭게 움직이는 말 위에 있던 주안은 조금씩 적응이 되는 듯했다.
빠르게 달리는 것은 한참 뒤에나 가능할 것이고, 피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에 오르는 것도 힘들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주안은 충분히 만족했다.
“나중에 황실 마탑에서 넘어지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 마법 도구가 있는지 좀 알아보면 더욱 잘 탈 수 있겠어요.”
“도구에 의지하는 것은 좀…….”
“있는 걸 쓰는 게 범죄는 아니잖아요.”
“후우…….”
몸을 쓰는 기사의 입장에서 너무 도구에만 의지하려는 주안이 좋게 보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직접 말까지 타려는 노력이라도 한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러워 반대도 하지 못했다.
“그보다 도련님. 내일 황성에서 링베르가 공작가와 만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사실입니까?”
“예, 내일 일정을 잡고 황성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혼담이 제대로 오가겠군요.”
“그거 때문에 만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서로 기분 나쁘지 않게 정중히 거절도 해야 하겠지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마르티네스와 링베르가의 혼담은 황도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
주안의 엄마인 안젤라만이 모두의 노력으로 다행히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좀 늦긴 했어요. 무슨 절차가 그리 많은지…….”
“귀족가의 혼담이니 어쩔 수 없지요.”
주안의 투덜거림에 피터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일반적인 귀족가라면 거절하는 절차도 간단했겠지만,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그 상대방이 링베르가 공작가 정도 된다면 단계가 여러 차례로 복잡해진다.
다행히 그 부분은 아빠인 주레인 공작이 할 일이었고, 주안은 그저 마지막으로 사과의 뜻을 밝힐 때 얼굴 정도만 내비쳐서 인사해 주면 되었다.
서로에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일이고, 혼담 거절에 대한 의미로 링베르가 공작가에 필요한 적당한 선물도 줄 생각이니 서로에게 나쁘지 않을 것이다.
“혼담이라……. 도련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에이, 혼담 정도 가지고……. 이젠 엄청 몰려와서 걱정될 거예요.”
“그렇긴 하겠군요…….”
피터 역시 이전의 주안이라면 안젤라 때문에라도 혼담조차 있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주안의 저 자신감대로 앞으로 혼담은 무수히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링베르가 공작가처럼 복잡한 거절조차 필요 없을 가문들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안과의 혼인을 생각해 볼 것이니, 결혼의 일로 참 복잡해질 듯했다.
그래도 그게 싫지는 않은 듯 피터의 눈은 주안이 매우 자랑스럽다는 듯 비치고 있었다.
“피터 아저씨,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아닙니다. 그저, 많이 듬직해지셨다 생각하여서…….”
“그렇죠? 저 요즘 토미한테 체력 단련 훈련도 받고 있다니까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워랜 경이 말을 타려면 체력을 좀 키울 필요가 있다고 하셔서요.”
“확실히 그 말이 맞습니다. 워랜 경이 오랜만에 참으로 올바른 소리를 다 하였군요.”
예전 같았으면 그저 엄마의 품에서 조금은 벗어나 공부를 조금이라도 하였으면 하던 바람이, 주안이 조금씩 변하는 만큼 그 바람도 점차 바뀌며 커져만 갔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생각하며, 영지 경영이나 후계자 수업, 더 나아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몸을 만드는 것까지…….
걱정은 기대가 되었고, 기대는 희망이 되었으며, 그 희망은 현실이 되어가니, 피터는 지금으로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듯했다.
“정말 장하십니다.”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제가 좀 대단하긴 해요.”
그런 농담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정도로 밝아진 주안을 보니 피터나 토미, 세라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 그런데 피터 아저씨.”
“예, 도련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요, 피터 아저씨는 왜 저희 엄마를 따라오신 거예요? 황실 근위대라면, 지금쯤 준남작위는 받으셨을 텐데.”
예전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여유로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참 이상했다.
이미 노년의 나이로 은퇴하여도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마르티네스의 평판은 최악으로 갔으며, 마지막에는 신왕조에 정복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피터 몰디나는 당연하다는 듯 안젤라의 곁을 지켜주었다.
황실 근위대에 지금까지 버티고만 있었어도 랭크는 더 올랐을 것이고 분대장, 혹은 한 개 조의 조장 정도도 되었을 것이며, 작위도 받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 이곳에, 앞으로도 이곳에 있을 피터의 그 모습은 주안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이상하십니까?”
“그야…….”
머뭇거리는 주안의 모습에 피터가 미소를 지었다.
“그저…….”
“됐다!”
피터가 뭐라 말을 하려 하였지만, 허공에서 들려온 큰 목소리와 함께 주안의 방 테라스 문이 벌컥 열리며 작은 무언가가 쌩하니 나와 주안에게 돌진하였다.
순간 피터가 손을 뻗어 날아오는 그것을 막아 세우려 하였지만, 잽싼 몸놀림으로 피터의 손을 피해 주안의 얼굴로 날아와 찰싹 달라붙었다.
“우엑?!”
“됐다! 완성!”
세냐가 주안의 얼굴에 달라붙는 바람에 휘청거리며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토미와 세라타가 주안을 잡아주어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뭐, 뭐가. 왜 그래, 세냐.”
“됐어! 됐다니까!”
“그러니까 뭐가?”
주안이 조심스레 세냐의 옷깃을 붙잡고 자신의 얼굴에서 떼어내자, 잔뜩 흥분한 듯 눈을 반짝이며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있는 세냐가 눈에 들어온다.
뒤이어 그 너머에서 마냐와 아냐도 주안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세냐가 왜 이러는 것인지 몰라 갸웃하는 주안의 모습에 오히려 잔뜩 뿔이 난 듯 볼을 부풀리며 세냐가 소리쳤다.
“뭐긴 뭐야. 워프 게이트지!”
“진짜?!”
“응!”
그제야 주안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세냐가 히죽 웃어주었다.
“피, 피터 아저씨! 저 좀 내려주세요!”
“아, 예…….”
말에 오르는 것도 피터가 도와주었고 피터의 도움 없이는 말에 내리는 것 역시 불가능하였다.
주안의 말에 피터가 조심스레 주안을 내려주자 주안은 황급히 저택 안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피터 아저씨, 말 타는 건 내일 다시 할게요!”
“그렇게 하십시오…….”
뭐가 저리 급한 것인지 갸우뚱한 피터를 뒤로한 채 주안이 빠르게 저택으로 달려갔고, 뒤이어 세라타 역시 허겁지겁 달려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금세 주안을 따라잡은 세라타였다.
아직 한참 어린 여자아이에게도 따라잡힐 정도로 운동신경이 영 별로인 주안의 모습에 피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곁에 남아 있는 토미를 보며 말했다.
“너는 안 가느냐?”
“저는 피터 스승님이랑 같이 좀 더 있고 싶어서요.”
“크흠…….”
싱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토미의 모습에 피터가 조금 부끄러운 듯 작게 헛기침을 하였다.
토미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 씀씀이가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곧 아스란 왕국으로 다시 가야 할 토미는 남는 시간을 주안도, 세라타도 아닌 피터와 더 많이 보내고 싶다는 듯 훈련 외의 개인적인 시간 대부분을 피터와 함께하고 있었다.
“말을 마구간에 넣어놓고 차라도 마시지 않겠느냐? 동방 사람들을 대하는 예절에 대해서 조금 공부시켜 주도록 하마.”
“네!”
공부라고는 하지만 사실 피터와의 잡담이 대부분이었지만, 토미에겐 그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 * *
주안은 일단 세라타를 엄마에게 보낸 후 방 안으로 혼자 들어왔다.
언젠가 알려주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해하는 듯 세라타 역시 이해해 주었고, 세 요정 꼬맹이와 함께 들어온 방 안에서 주안은 놀란 눈으로 테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워프 게이트……?”
“흐흥~ 어때요? 대단하죠?”
자신만만한 듯 주안의 머리 위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말하는 세냐.
“언니야랑 같이 만들었어. 대~ 단하지?”
“아, 아냐도 많이 도왔어요. 대단하죠~?”
서로 대단하다는 듯 자랑하는 세 요정 꼬맹이들이었지만, 주안은 영 미심쩍은 듯 눈앞의 활짝 열린 테라스에 집중하였다.
테라스의 문 옆의 벽을 따라 알 수 없는 글자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주안은 전혀 몰랐다.
“뭐, 어쨌든 다 됐다는 거지?”
“그럼요.”
“그럼 이거 어떻게 작동시키는 거야? 이 워프 게이트는 나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잖아?”
만들어준 세냐도 워프 게이트를 작동시킬 수 있었지만, 아미엘은 주안에게도 그것을 허락해 주었다.
만약 세냐와 마냐, 아냐가 없을 시 주안 스스로 작동시켜 세계수에 방문할 수 있게 조치해 둔 것이다.
이런 주안의 말에 세냐가 말했다.
“오빠의 성흔에 반응하도록 설정해 두었어요. 저쪽 테라스 왼쪽 벽의 아래에서 다섯 번째 글자를 만져보세요.”
“꼼꼼하기도 하네.”
저 많은 글자 중에서 하나에만 특정성을 부여해 주안의 성흔에 반응을 하도록 해놓은 듯했다.
그리고 세냐의 말대로 주안은 조심스레 벽 쪽으로 다가가 세냐가 말한 글자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성흔에 빛을 일으키니, 활짝 열린 테라스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빛의 너머에 낯이 익은 풍경과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미엘 님……?”
아미엘이 주안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뻗었다.
“꽤 늦었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엘 하임의 아이여.”
아미엘의 손을 보다가 주안이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뻗었다.
그리고 테라스 너머, 그 머나먼 거리 너머 존재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에 주안이 흠칫 놀랐지만, 아미엘은 그런 주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조심스레 이끌어주었다.
주안은 그 이끌림에 따라 테라스로 한 걸음 나아가, 이미 실전되어 사라져 버린 워프 게이트를 너머 대밀림의 세계수로 다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