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16화
공식적인 사절단의 임무가 끝났다는 황제 폐하의 인가가 떨어진 뒤 사흘째 되는 날,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올라온 일행들이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예정된 일이라 이미 준비는 그전부터 다 해놓았기에 마지막 점검만 하면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일행들을 보며 주안의 마음은 참 미묘하였다.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이야?”
돌아갈 준비를 하며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주안이 그런 그들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워랜이 갸웃하며 물었다.
워랜의 물음에 주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원섭섭해서요. 몇 달이나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잖아요.”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어차피 벡브란 전대 공작님 생신 때 가야 하잖아.”
“그땐 작년처럼 급하게 모시는 게 아니라, 미리 좀 오도록 부탁드려 봐야겠어요.”
그때의 일이 떠올라서 그런지 주안이 즐겁게 웃었다.
할아버지의 당황하던 모습이나, 급하게 달려온 사람들이나. 그럼에도 나름 즐거웠던 때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정말 헤어질 땐 갑자기 헤어진다는 말이 맞나 봐요. 마누엘 신관님도 곧 황도를 떠나신다고 하셨거든요.”
애초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 역시 황도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고, 제국 내에 있는 대신전들을 둘러본 후 북방에 위치한 교단의 성도 다예프로 갈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워랜 경도, 토미도 조만간 아스란 왕국으로 가야 하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워랜은 아직 자신이 배울 게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곧 스승인 풍신에게 가서 조금 더 배움을 청한 뒤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토미 역시 피터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워랜과 함께 풍신에게 검을 배울 것이니, 가장 가까운 두 사람도 떠난다는 것에 주안은 허전한 기분을 느껴야만 하였다.
이런 주안의 기분을 안다는 듯 워랜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울적해하지 말라고.”
“알고 있어요.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조치는 취해놓을 거예요.”
싱긋 웃으며 하는 주안의 말에 워랜이 잠시 갸웃했지만 이내 그 말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였다.
하지만 이해는 해도 조금 미심쩍다는 듯 주안에게 말했다.
“그 워프 게이트라는 거, 진짜 가능한 거야?”
“가능해요. 직접 보기도 하셨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그 아미엘이라는 요정의 여왕이랑 주안 공자를 따라온 그 꼬맹이들은 다르잖아.”
“하하……. 세냐 앞에서 그런 소리 하면 발차기라도 맞으실걸요.”
“발차기 정도야 뭐…….”
심드렁한 워랜의 태도와는 달리 주안은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단순한 발차기가 아니라, 마법적 힘을 가미한 불꽃 발차기를 날려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부분을 말해봐야 믿지 않을 것 같기에 주안은 다른 말을 꺼냈다.
“곧 알 수 있으실 거예요. 일단 대밀림의 세계수와 연결되는 워프 게이트가 조만간 만들어질 거거든요.”
“흐응…… 그럼 그거 이용해서 가면 금방이겠네?”
“네, 그걸 이용하면 어렵게 아스란 왕국까지 가실 필요는 없으시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주안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확인되면 마를렌까지 가셔서 워프 게이트 설치, 도와주셔야 해요.”
“쳇……. 귀찮은 일은 결국 아랫사람에게 시키는 못된 상사잖아.”
“흐흥~ 이게 권력이라는 것이죠.”
“어련하시려고.”
당당하게 팔짱을 끼며 자랑하는 주안의 모습에 워랜이 피식 웃으며 주안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예전과는 달리 주안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더 살가워진 듯, 워랜은 마치 주안을 동생처럼 대했고, 주안 역시 그런 워랜에 대해 형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조금 많이 게으르지만, 믿을 수 있는 듬직한 형 말이다.
물론 이런 관계가 공식적인 자리, 그리고 서로 가문을 이어받는 순간 끝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주안에게는 지금 이렇게 모두와 함께 지내는 일이 너무나 소중하였다.
“그보다 피터 경한테 말 타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다며? 진짜야?”
“언제까지 마차만 타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배워볼까 해요.”
마차가 확실히 편하고 좋았지만, 마차를 이용하지 못할 때를 고려해 봐야 할 시기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주안은 내년이면 열여덟의 성인이 되며 귀족가의 성인으로서 검을 쓰는 것은 몰라도 말을 타는 것은 필수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아스란 왕국에서 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말을 타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결정을 내린 후 피터 경에게 부탁하였고, 이런 주안의 말에 피터 경이 정말 심하게 놀랐을 땐 주안의 기분이 많이 상한 것은 덤이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게다가 워랜도 의외라는 눈치인지라 주안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만든다.
이런 주안의 투덜거림은 모른 채 워랜이 말했다.
“마누엘 영감님 말대로 주안 공자도 운동이라도 조금 해보지그래? 어차피 말을 타려면 기본적인 체력은 있어야 한다고.”
“그게 좀 고민이 되긴 해요.”
말을 타고 마상 전투를 벌이는 훈련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런 체력을 기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런 주안의 생각을 안다는 듯 워랜이 말했다.
“말 타는 것도 의외로 체력이 많이 필요한 거야. 느릿하게 걸어 다니는 말을 타고 싶은 거라면 그냥 마차를 타는 게 훨씬 낫고”
“으음……. 그러면 엄마 몰래 하긴 해야겠네요.”
주안이 땀을 흘리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쓰러질 수도 있기에 보이는 곳에서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주안의 말에 워랜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당당하게 말을 꺼내서 허락받으면 될 일을…….”
“당당하게 말을 꺼내면 엄마는 당당하게 하지 말라고 하실걸요.”
“…….”
농담 같지 않은 주안의 말에 워랜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안젤라에게 주안의 일이란 농담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니 말이다.
워랜이 작게 한숨을 내쉬다 준비를 끝낸,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올라온 이들을 보며 말했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그만 가자. 저쪽도 준비는 다 끝냈나 보네. 인사 정도는 해줘야지.”
“예, 그렇게 해요.”
떠날 준비를 끝낸 그들을 보며 주안은 워랜과 함께 그들에게 향했다.
* * *
주안은 떠나기 전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만나 인사하고 눈에 새겼다.
“고생하셨어요, 아르베리아 경.”
“고생이라니요, 아닙니다. 공자님.”
주안이 손을 내밀자 아르베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다 그런 주안의 손을 잡아주었다.
역시 주안과는 달리 기사로서 훈련을 많이 받은 아르베리아의 손은 매우 거칠고, 굳은살이 딱딱하게 자리 잡은 투박한 손이었다.
하지만 주안은 그 손 너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을 보며 아르베리아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담이 잘 마무리되어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하겠습니다, 공자님.”
“그런 농담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하하……. 그렇습니까. 저희는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말에 주안이 슬쩍 근처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르베리아와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이들이 어째서인지 주안과 눈을 마주치자 시선을 돌리며 딴짓을 한다.
“기대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까, 아르베리아 경이나 얼른 결혼하세요. 노총각이잖아요.”
“아, 아직 20대입니다! 그리고 저 혼약자 있습니다!”
“……있었어요?”
“당연히 있지요. 돌아가면 내년에 결혼할 겁니다.”
“내년이면 아르베리아 경 나이가…….”
“나, 나이는 중요치 않습니다! 제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미 20대 중반이 되어버린 아르베리아이기에 나이 이야기는 매우 민감한 사항인 듯했다.
일반적인 귀족가의 혼담과 결혼은 매우 이른 나이에 진행된다는 것을 보면 아르베리아의 결혼은 꽤 늦은 것과 같았다.
하지만 결국 함께할 사람도 있고, 곧 결혼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럽기에 주안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쳇…… 결혼식 때 초대나 하세요. 가서 축의금 정도는 많이 드릴 테니까.”
“와주신다면야 영광이지요.”
주안의 이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르베리아의 얼굴 가득 밝은 미소가 지어졌다.
가신의 가문으로서, 섬기는 가문의 후계자가 직접 찾아와 결혼을 축하해 준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며, 가문의 자랑이 될 것이다.
빈말이라도 좋아할 일인데, 주안의 성격상 분명 축하하러 와줄 것임을 알기에 아르베리아도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르베리아에게 인사를 하고, 근처에 있던 위체니아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다른 백작가의 어르신 분들에게도 좋은 말씀 부탁드려요, 위체니아 양.”
주안의 말에 위체니아가 흠칫 놀라며 주안을 바라보았다.
“……아시고 계셨습니까?”
“알 수밖에 없지요. 공작령 남부도 아니고, 북부의 소벡 백작가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위체니아 양을 보내셨다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
“아, 그렇다고 위체니아 양이나 다른 백작가 분들을 탓하는 게 아니에요.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니까요.”
마르티네스와 삼대 백작가는 현재 운명 공동체의 입장이니, 후계자 문제에 늘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제 평가, 좀 올라가긴 했겠죠?”
장난스레 히죽 웃는 주안의 모습에 위체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모하고 장난이 심하다고 말씀드려도 괜찮겠네요.”
“썩 나쁜 평가는 아니라 다행이네요.”
주안의 말에 위체니아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그녀의 볼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평을 받은 것 같아 주안도 안심할 수가 있었다.
주안과 위체니아의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르베리아나 베일 리 준남작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들 외에도 베일 리 준남작이라거나 휴이 훼스턴 등등을 만나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주안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와 짧게나마 이야기한 후 배웅해 주었다.
한두 사람도 아닌지라 시간은 꽤 걸렸지만, 그럼에도 이 시간을 지겨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음 대의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가주가 될 후계자가,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와 인사해 주는 것이 그들에겐 꽤나 새로운 듯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인사를 해준 후 주안이 워랜의 곁으로 돌아오자, 다들 주안과 저택에 남겨진 이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말과 마차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저택에 남은 주안이나 워랜, 토미와 소니아, 솔 그리고 세라타 등등 이들을 봐온 저택의 고용인들 역시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다음에는 좀 더 여러분들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성장한 모습을 보여 드리도록 할게요.’
이번 해에 다시 볼 사람들도 있겠고 내년에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들과 이렇게 한 자리에 모두 모이는 일이 얼마나 생길지는 모른다.
하지만 주안은 언제가 되든, 오늘의 미숙한 자신 보다 다음의 성장한 모습을 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 때문인지 그들이 저택을 빠져나가 시야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주안은 꼿꼿이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모습이 모두 사라진 뒤, 주안이 조용히 돌아서서 남겨진 저택의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우리도 이제 할 일 하러 갑시다.”
조금 한산해졌다 하지만, 일상은 다시 쳇바퀴처럼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멈추어져 있는 것이 아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일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