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14화
응접실로 들어온 주레인 공작과 주안이 소파에 앉자 금세 차를 준비해 온 하인이 두 사람의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라준 후 방을 나섰다.
그리고 응접실에 두 사람만이 남자, 주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링베르가 공작가랑 제 혼담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이 된 거예요?”
“진행이고 뭐고, 제의만 받았을 뿐이지 다른 이야기는 없구나.”
“제의만 받으셨어요?”
“그래, 그리고 아직 답도 해주지 않았단다.”
이걸 다행이라 여길지 말아야 할지…….
‘그래도 다행이긴 다행인가.’
제의만 받고 거기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면, 아빠가 먼저 혼담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니며, 혼담에 대한 생각도 크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그 때문인지 주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런 아들의 안심하는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은 주레인 공작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주안에게 말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냐?”
“오후 늦게 바깥에서 제이미 링베르가를 만나 알게 됐어요.”
“제이미 링베르가?”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짧게 설명해 주자, 이야기를 다 들은 주레인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밀리가 알아온 정보대로, 못 말릴 아이이긴 하구나.”
“예? 에밀리 경이요?”
“그래, 며칠 전에 링베르가 공작가에서 사무엘 경이 찾아와 직접 혼담을 위한 서신을 내게 건네주었었다.”
“사무엘 경이라…….”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가주를 지키는 호위 기사의 대표가 에밀리 경이라면, 링베르가 공작가의 가주를 지키는 호위 기사의 대표는 바로 사무엘 그리마 경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주안 역시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이 시대의 사무엘 그리마도, 이전 시대의 사무엘 그리마까지 말이다.
‘그 사무엘 경이 오셨었구나.’
미래의 일이긴 하나 사무엘 그리마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때 서부를 지켰던 인물로 유명했다.
기습적으로 서부 국경의 중심이었던 이스발 요새를 몰아친 삼국 동맹으로 인해서 서부 그 자체가 위험해졌을 때 그가 목숨을 걸고 이스발 요새를 지키지 않았다면 속수무책으로 밀렸을 것임을 역사학자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서부를 지배하던 링베르가 공작가의 가주가 되었던 제이미 링베르가는, 아버지인 블라드 링베르가만큼 서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으며, 남부에서 치고 올라와 마르티네스를 무너뜨렸던 신왕조로 인해서 제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제국을 도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서부를 지켜야 할 것인지 정하지 못하던 그때 사무엘 그리마로 인해 제국이 아닌 서부를 지키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진 것이니 말이다.
사실 제국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기에, 그들이 움직이지 못하던 것에 비난을 쏟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구 제국의 난민을 받아들인 그들이 2황자를 내세웠던 북부를 제치고 제노폴 제국의 후신임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 역시 삼국 동맹이 차지하던 핌 벨 강의 전선을 무너뜨리고 곡창 지대를 차지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미래의 그 대단했던 사람들을 하나둘 만나는 지금의 이 상황이 주안도 참 신기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아직 답변은 하지 않으신 거죠?”
“그래, 갑작스럽기도 하고 그들이 혼담을 제의한 이유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말이다.”
하긴, 그게 아니라면 숨기고 있을 이유도 없었을 것임을 주안도 이해했다.
혼담을 곧바로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고, 주레인 공작으로선 진의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순수하게 저희 가문과 맺어지고 싶다는, 그런 동화책에서나 나올 그런 의도는 아니라고 봐요.”
“가문과 가문이 맺어지는 일이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찾게 마련이란다. 하나…….”
주레인 공작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주안에게 말했다.
“네 엄마가 무서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빠도 너를 가문의 이득에 따라 팔 듯 다른 가문과 맺어지게 할 생각은 없단다.”
“알고 있어요. 우리 가문이 모자란 게 뭐가 있겠어요. 유일한 흠이라면 저뿐인데요.”
“크흠. 그런 말 말거라. 사절단이 돌아온 후 너는 이제 어디에도 모자라지 않은 일등 신랑감이란다.”
여론은 때에 따라 금세 바뀌는 것이지만, 지금의 주안에 대한 평은 너무나 좋았고 호의적이었다.
이전의 사상 최악의 마마보이라는 것은 어느새 잊혔다는 듯 제국의 후계자 중 한 손에 꼽히는 인물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에밀리가 조사해 온 것을 보면, 미네아 영애는 크게 모나지 않은 아이더구나. 너와 나이도 같고, 외모도 빼어나면서 주변의 평판도 괜찮더구나.”
여느 귀족가의 영애들처럼 특별하지 않은, 그저 다들 하는 배움을 받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대부분이 다 똑같다.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에밀리의 보고였다.
제이미 링베르가야 주안이 사망하던 때에도 현역으로 있던 인물이었지만 그의 가족, 누나들에 대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크게 뛰어나지 않는다면 남자든 여자든 이름이 알려지기 힘들다 보니, 그 평범한 축에 속하는 듯 아빠에게서 듣는 미네아 링베르가에 대한 이야기는 여느 귀족가의 흔한 영애의 삶과 매우 비슷했다.
단지 그 흔한 영애의 집안이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의 집안이라 점만 다를 뿐이다.
“단순히 혼담의 상대방으로 본다면 링베르가 공작가라는 가문의 여식인 미네아 영애는 상당히 좋은 신붓감이긴 하단다.”
“괜히 공작가의 영애가 아니시니까요.”
오히려 성격이 나쁘든, 씀씀이가 크든 링베르가 공작가의 영애인 미네아 링베르가를 원하는 가문은 굉장히 많았을 것이다.
미네아 링베르가를 등에 업고 서부 권력의 한 축에 올라설 수 있으니, 서부의 가문들이라면 그런 그녀를 얻기 위해 꽤나 노력했을 것이라 주안은 생각했다.
“아마 주안이 네게도 이번 링베르가 공작가의 혼담 제의처럼 여러 곳에서 너와 결혼을 전제로 혼담이 들어올 것이란다.”
“그건 저도 각오하고 있는 일이에요.”
“그래도 너무 걱정 말거라. 아무리 혼담이 들어온다 하여도 거기에 휘둘릴 일은 없으니 말이다. 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란다. 혼담이 아닌,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아빠는 네 편에 서서 응원해 주도록 하마.”
이미 제국 내에서는 황가 다음으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원하는 게 없다.
아니, 있다면 대가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그 바람 하나뿐이다.
가문의 명성, 금전적인 여유로움, 그것을 지킬 힘.
그 모든 것을 가진 마르티네스 공작가에게 타 가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휘하 가신들의 가문과의 유대감 정도뿐.
주안의 결혼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동부의 가문들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타 지역의 가문은 논외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부분도 주안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주레인 공작이나 벡브란 전대 공작의 생각이었다.
이런 아빠와 할아버지의 생각을 알게 된 주안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그래도 저한테 그런 상대가 없으면 아빠가 가문에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세요. 이왕이면 예쁜 분으로요.”
주안의 농담 같은 그 말에 주레인 공작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많이 어른스러워진 주안을 보니, 주레인 공작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가문의 가주로서 흐뭇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링베르가 공작가의 분들과 만나서 어느 정도 이야기는 나누다가 관례대로 거절의 의사를 비치는 게 낫겠어요.”
“허허…… 그래도 조금 소란스럽긴 하겠구나.”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저희나 링베르가나 이 두 거대 가문이 피로 이어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가문이 굉장히 많을 거예요. 어차피 저희에게도 득이 안 되는 일이니, 가능하면 빠르게 링베르가와 떨어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렇긴 하지.”
자고로 거대한 두 세력이 합쳐지는 것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들에게 큰 위기감을 느끼게 만든다.
바로 황가 말이다.
주안에게는 외가댁이고 링베르가 역시 먼 친척뻘이긴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르는 법이다.
이것을 다들 알기에 제국의 거대 가문들은 그들과 가장 친밀한 자신들이 있는 지역 내의 가문과 이어지는 것을 선택하였다.
황가 역시 황실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황실의 여식이나 황자의 배필로 맞아들인 것이다.
황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두 세력이 합쳐지는 것을 달가워할 황실도 아니었기에 혼담이 오가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불쾌해할 수도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미리 황실에 보고해 혼담에 대한 부분과 마르티네스는 거기에 관심이 없으며, 거절할 것임을 보여야만 하였다.
“그런데 진짜 이상하긴 하네요. 아무리 저희 가문과 이어지는 것에 링베르가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해도, 저희 가문이 거절할 것을 생각 못 했을까요? 더군다나 이 일로 황실은 링베르가를 좋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그게 좀 의문이기는 하더구나. 에밀리의 조사에서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하였단다. 지금으로선 그들의 식량 수급이 생각보다 여의치 않다는 것밖에 말이다.”
“으음……. 딱히 분쟁도 없을 텐데, 식량 수급이 모자랄 일이 있었어요?”
제국과 국경이 닿아 있는 국가는 총 다섯 개의 국가로 북부의 케세니아와는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무역이 활발한 나라였으며, 남부 아스란은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부 삼국이라 불리는 차람, 테베나, 조슈아는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마치 구 왕국 시절 편입시켰던 남부 삼국이라 불렸던 체스커, 맥도넬, 아스란처럼 격렬하게 제국의 확장에 저항하던 국가였다.
남부 통일에 너무 힘을 썼던 제국이 걸음을 멈추었기에 다행이지, 전란이 더 확산되었다면 서부 삼국과의 전쟁은 굉장히 오래갔을 것이다.
다른 모든 국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뿌리는 캄파니아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로 특히 이 서부 삼국은 그 핏줄마저 같았다.
캄파니아 제국 시절 후작가로 존재하던 모르도 후작가의 아들들이 후작령을 분할 통치하며 세워진 나라들이었고, 혼란기 때 그들 역시 각각 나라를 세우고 주변의 작은 것들을 먹어 치우며 덩치를 키운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과의 분쟁은 몇 년에 한 번씩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서부 삼국에서 들어오던 물자들이 제한되었다.
그 물자 중에서는 식량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에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서부는 식량 수급에 큰 곤란함을 느껴야만 하였다.
황도에서 들어오는 식량은 정해져 있는데, 그 식량은 군수품인지라 서부 전체에 풀어놓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모자란 부분은 남부와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어떻게 끌어 쓰지만 급하게 끌어 쓰는 만큼 가격은 꽤나 오르게 되어 여러모로 곤란하다.
똑같이 자급자족이 안 되는 북부가 오히려 식량을 더 싸고 구하기 쉬운 이유도 별다른 분쟁이 없었기 때문이니 말이다.
“상황이 그렇게 나쁘다면, 링베르가와의 혼담을 거절하는 의미로 몇 년 정도 그들에게 판매되는 밀의 값을 원가에 가깝게 하여 제공하는 것으로 이번 일을 매듭지어 봐야겠지. 이 정도 선물이면 링베르가도 먼 길을 달려온 것에 대한 체면치레 정도는 될 수 있겠지.”
다른 가문과의 혼담이라면 이런 선물 따윈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상대방은 같은 공작가인 입장인지라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이 혼담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수고로움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안은 못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러모로 저희는 손해만 보네요.”
“딱히 손해도 아니란다.”
“예? 어째서요?”
“그야 당연하지 않으냐. 우리 아들을 얻기 위해 그 링베르가 공작가의 가주가 직접 황도까지 행차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좋으냐.”
“하하…….”
아빠도 정말 팔불출이 다 되신 듯하였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먼 서부에서 링베르가 공작가의 가주가 직접 혼담을 위해 황도까지 찾아온 일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주안의 평가는 급속도로 좋아질 것이다.
몇 년 정도 밀을 원가에 지원하는 것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에게 큰일도 아니기에 오히려 아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이 정도 일은 그저 투자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다.
‘수만 명이 먹을 밀을 원가에 파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다니……. 진짜 우리 가문도 대단하긴 해.’
서부 전체에 공급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격 안정화의 목적은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양은 될 것이다.
그만한 양을 아들 위신을 세우는 것에 써먹을 생각을 하는 아빠도 대단했지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재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조만간 링베르가 공작이 직접 오기로 했다만, 네 엄마가 알면 큰일이지 않겠느냐? 황성에서 그와 직접 보고 담판을 짓는 게 낫겠지. 주안이, 너도 같이 가겠느냐?”
“예, 그게 낫겠어요. 엄마가 알면…… 좀 그렇잖아요.”
주레인 공작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주안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었다.
부자가 나란히 집안의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아내이자 엄마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니, 왠지 모르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