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99화
“어머니가 나서면 일이 매우 커질 것입니다. 그쯤 되면 저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며, 에반드리안 공자만이 아니라 맥도넬 후작가…… 더 나아가 이곳, 젠다르 요새의 책임자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것으로 들리는군요, 주안 공자.”
“예, 협박입니다. 그래도 한때 전우로 지냈던 남부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사절단으로 함께 갔다 왔지요. 에반드리안 공자가 왜 이러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왜 이러는지 모른다라…….”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주안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조금 울컥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모르는 게 나았고,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주안과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대한 열등감에서 나온 나쁜 감정임을 에반드리안 자신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분노로 인한 화풀이였고, 그들에게 남부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으며,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러한 감정을 주안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숨기고,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찾아내어 물어뜯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 말이다.
주안의 약점이라면 그의 행동에 따라 퍼졌던 좋지 않았던 소문과 그와 관련된 일들이지만, 지금은 그 약점조차 사라져 있었고 새로운 약점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금, 주안이 언급한 어머니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에반드리안 맥도넬이었지만, 이대로 버틴다면 다치는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답에 도달한 이상 지금은 물러날 때라는 것을 판단하게 되었다.
적어도 주안의 대단한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며칠은 더 고생을 시킬 자신은 있었지만, 황제 폐하와 바로 연락이 닿을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에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셰블로 대신관님과 함께 온 남부 신관들이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을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병세가 전혀 없다는 확답을 얻으신다면 요새의 문을 열도록 하지요.”
“의논의 시간의 필요 없으시겠지요?”
“필요 없습니다.”
그 말에 주안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에반드리안 공자님.”
주안의 에반드리안 공자님, 이라는 그 말에 에반드리안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얻을 것을 다 얻자, 다시 그렇게 말하니 다시 울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부럽군요. 황제 폐하를 옆집 할아버지 보시는 것처럼 만나시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의 힘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더군요. 가끔 말도 없이 집에 찾아오시기도 하셔서 말이지요.”
자랑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주안은 조금 힘든 부분이었다.
말없이 찾아와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거기에 불려가는 자신이나 그럴 때면 집안사람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는 것도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혼자 오시는 것도 아니고 호위들도 잔뜩 데리고 오시니, 보통 일이 아닌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듣는 에반드리안 맥도넬의 입장에서는 부러움을 넘어 시기와 질투라는 쓸모없는 감정을 모락모락 피워 오르게 하는 말들일 뿐이다.
이 대륙에서, 그리고 제국에서 황가와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는 귀족은 마르티네스 공작가 외에는 없을 것이다.
서부의 든든한 방패이자, 마찬가지로 황가와 피가 이어져 있는 링베르가 공작가도 그렇게 하지는 못 한다.
“이번 일은, 저의 걱정이 지나쳤다는 것에 사과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남부를 지키는 것은 맥도넬 후작가의 의무이지 않습니까.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함께 황도로 가는 길, 이번 일로 서로에게 불편함을 덜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하지요.”
“……예? 함께?”
주안이 갸웃하자,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오히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절단에 포함되어 있던 남부 귀족들은 아직 파르잔에서 대기 중입니다.”
“파르잔에서요? 어째서…….”
진심 그것을 모르냐는 듯,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주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절단이 되돌아왔다고 하나, 황도로 돌아가 황제 폐하에게 고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으음, 확실히…….”
사절단의 임무는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와 문화의 교류였고, 그것을 통해 평화를 이루자는 목표가 있었다.
지금은 반쪽짜리 성공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사절단의 임무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고, 그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황도로 돌아가 황제 폐하에게 고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주안도 그제야 에반드리안 맥도넬의 말뜻을 이해하였고, 이해하였기에 그에게 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함께 가야 할 양반이 지금 우리들을 밖에 세워놓고 못 들어오게 하셨다, 이겁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추해지는 것은 자신이지,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아니기에 심호흡을 하며 억지로 분을 삭였다.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을 요새 밖에 세워두고 있다고는 하나 저희 역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먼 길을 함께해 온 이들 아닙니까. 다들 파르잔에서 공작가 일행들의 무사를 바라고 있지요.”
“하하……. 그렇지요. 정말 감사하게도 말입니다.”
그 함께해 온 일행들은 차가운 바닥에서 노숙할 판인데 말이다.
억지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안은 에반드리안 맥도넬만큼의 노련미도, 그렇다고 수라장을 거쳐 온 인물도 아니기에 불쾌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불편해하는 기색은 오히려 에반드리안 맥도넬에겐 작은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자신 역시 불쾌한 녀석에게 똑같은 기분을 맛보게 해준 것은 작은 소득이긴 했으니 말이다.
* * *
주안이 식당을 나오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실버론 하셀 자작과 아르베리아가 다가왔다.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앞서 걸어가는 주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아르베리아의 질문에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일단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언급했거든요.”
“……정말 다 하셨군요.”
주안이 엄마를 꺼냈다는 것은 모든 카드를 다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도 절대 지지 않는 무적의 카드를 말이다.
“일단 셰블로 대신관님을 만나서 함께 오신 신관분들과 요새를 나가서 저희 일행을 살펴본 후, 이상이 없다면 문을 열어주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결국 오늘은 밖에서 자라, 이 말이군요.”
“그렇긴 하지요.”
실버론 하셀 자작이 주안의 말에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는 에반드리안을 노려보았지만, 에반드리안은 여유롭게 실버론 하셀 자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 준 후 밴들리 쿼빅과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 대담한 모습에 실버론 하셀 자작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 주안에게 말했다.
“이 일은 황도로 돌아가서 맥도넬의 안하무인 한 행동을 모두 보고하도록 할 것입니다.”
“저를 봐서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 가주세요, 자작님.”
“어째서 말입니까?”
주안이 반대하자, 실버론 하셀 자작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아르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일을 공론화해서 에반드리안뿐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가문 역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주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반드리안 공자가 한발 물러난 이상, 굳이 일을 크게 만들어 사절단 내에서 분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요. 그러면 오히려 저희의 공이 상당 부분 깎일 것입니다.”
“저희의 공이 깎이다니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아르베리아가 갸웃했지만, 주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마 에반드리안 공자는 저희가 공론화시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저희가 알린다면, 오히려 남부 귀족들만 이익일 것이니 말입니다.”
주안은 그가 마냥 생각 없이 막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차후의 일은 생각을 하고 진행한 일이라는 것은 주안도 알 수가 있었다.
“사절단이 내부의 알력 싸움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남부 귀족이 밀려나 억지로 귀국을 하였다, 라고 그들이 주장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알력 싸움? 그런 게 있었을 리 없잖습니까. 적어도 그런 싸움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서로를 무시했을 정도였는데.”
아르베리아뿐만이 아니라 실버론 하셀 자작마저도 두 거대 가문이 오히려 섞이지 않도록 조치했을 정도다.
남부와 동부가 친하지 않다는 것은 제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었고, 두 거대 가문의 후계자가 함께하는 이상 누군가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행동에 나설 것임을 알기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코자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안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실버론 하셀 자작이 보다 쉽게 두 파벌을 갈라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알력 싸움으로 번진 일은 없었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두 사람에게 주안이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쉬며 말했다.
“예, 당연히 사실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사실로 만들 것입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사절단 내에 분란이 있었다는 것을 황가에 알리는 것이고, 이 사실이 백성들의 귀에 들어가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황가는 바라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결국 정치란 그런 것이다.
한쪽의 완벽한 승리가 아닌 이상, 모두가 피해를 보는 일이 대부분이다.
지금은 맥도넬과 남부를 누를 확실한 카드가 주안에겐 없었고, 에반드리안 맥도넬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황가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와 문화, 그리고 평화를 위한 사절단을 꾸린 만큼 절대 실패를 해선 안 되는 일이었고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비록 반쪽이긴 하나 일을 훌륭히 마친 만큼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준비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절단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알력 다툼을 했으며 그로 인해서 한쪽이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이것은 황가로서도 매우 곤란한 일인 것이다.
그게 비록 사실과는 다르다 하여도 작정하고 소문을 퍼뜨린다면 황가도 막을 방도는 없다.
백성들의 입과 입을 오가는 말은 황제의 권위로도 막을 수 없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에반드리안 맥도넬은 일이 잘못된다 해도, 이 부분을 고려했기에 그가 대담하게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저희를 막은 것도 아니고, 막아 세운 담력도 대단하고, 생각도 깊었습니다. 에반드리안 맥도넬 공자는, 확실히 뛰어난 사람이더군요.”
비록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에선 유우나 공주에게 밀려 실각하고 사라져 버린 인물이긴 했지만, 그가 한때 남부를 거의 집어삼켰던 유일한 맥도넬의 인물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공의 일부를 떼어주어야지요.”
“말도 안 됩니다. 가장 먼저 도망친 그들을 위해서 저희가 세운 공을…….”
“그렇다 해도 그들과 함께 온 커즈 신관님을 위시한 남부 신관들의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남부 신관 분들은 그분들의 의지로 움직인 것입니다. 남부 귀족들을 대표해서 움직인 게 아니라.”
“예, 알지요. 압니다. 알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남부의 신관분들은 맥도넬 가문을 거쳐서 온 것이니 말입니다.”
“그거참…….”
아르베리아도 주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기에 한숨을 내쉬며 화를 참아 내었다.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 알아도 모른 척, 그리고 숨겨야 한다는 게 정치임을 알지만 참으로 더럽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실버론 하셀 자작도 몸을 쓰는 이라 그런지 정치와 관련된 좋지 않은 이야기에는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눈은 주안을 새롭게, 그리고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주안 공자는 그것을 다 알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미 다 정해놓으셨군요.”
“어쩔 수 없지요. 지금은 백성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할 때이니 말입니다. 이런 일로 괜히 분란만 조장하면 오히려 저희가 더 큰 손해이니, 저희도 한발 물러나 저희가 챙겨야 할 것을 확실하게 챙겨야겠지요.”
에반드리안 맥도넬을 위시한 남부 귀족들, 아니, 순수하게 에반드리안 맥도넬 한 명에게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에 분하다 생각하고 화를 내기보단 챙길 이득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끌어내어야 하였다.
적어도 공의 많은 부분은 결국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것이었으니, 최소한의 부분만 떼어주고 다수의 것을 어떻게 차지해야 할지 생각할 때인 것이다.
“공자님도 정말 정치가가 다 되신 듯합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요.”
주안이 싱긋 웃으며 겸손함을 보였지만, 아르베리아는 오히려 그런 겸손해하는 모습마저 믿음직스러웠다.
황도를 떠나기 전의 주안과, 아스란 왕국에 도착했을 때의 주안, 그리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주안은 정말 많이 성장했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마르티네스를 따르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든든함을 느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