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97화
세 요정 꼬맹이는 함께할 수 없기에 토미에게 맡겨둔 후 아르베리아가 몰고, 실버론 하셀 자작이 곁을 지키는 마차에 탔다.
젠다르 요새 안으로 들어온 주안은 곧 멈추어선 마차에서 내려 자신들을 맞이해 주는 에반드리안 맥도넬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모습에 실버론 하셀 자작이 매우 못마땅해하였고, 그 때문인지 에반드리안 맥도넬 곁을 지키던 호위들은 하나같이 실버론 하셀 자작의 눈길에 움찔 놀라며 크게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에반드리안 맥도넬은 실버론 하셀 자작이나 아르베리아 말란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눈은 오직 주안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다가와 그가 마차에서 내린 주안에게 말했다.
“다시 뵙는군요,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님.”
“그러게 말입니다. 성벽 위에 숨어서 지켜보시던 에반드리안 공자님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좀 아팠지 뭡니까.”
“…….”
조금 비아냥거리는 주안의 말에 발끈하기보단 차가운 눈을 하고 미소를 짓는 그는 흡사 뱀과도 같았다.
벡브란 전대 공작은 에반드리안 맥도넬의 아버지인 하스웰 맥도넬 후작을 여우에 빗대긴 하였지만, 그의 아들은 전혀 다른 이였다.
이렇게 제대로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그를 조금 더 똑바로 지켜볼 수 있었고, 그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불쾌한 감정이 주안에게 그대로 전해져 와서 주안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적대감이 조금 심하다 할 정도로 느껴진다.
그리고 마르티네스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하다는 것까지 말이다.
이해는 가지만, 이런 노골적인 것은 좋지 않았다.
이런 에반드리안 맥도넬을 어떻게 대할지, 솔직히 좀 고민스럽긴 하였고 다행이 이런 주안과 에반드리안 맥도넬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풀어주듯, 한 노인이 나서서 말했다.
“에반드리안 공자. 잠시 소개를 부탁드려도 괜찮겠소?”
펑퍼짐한 새하얀 신관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런 신관복으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마르고 야윈 노인은 키도 꽤나 작았다.
이 노신관의 모습에 주안이 갸웃하자,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작게 혀를 차고는 한발 물러나 말했다.
“이분은 남부 대신전의 주인이신 셰블로 대신관님 이십니다.”
그제야 주안도 이 노인이 누구인지 알겠다는 듯했다.
커즈 신관이 몸을 담고 있는 남부 대신전의 대신관인 셰블로 파벨.
새하얀 백발에 작고 왜소한 체구 때문에 나이는 좀 들어 보여도 사실 그는 황도 대신전의 페트롤 대신관과 동년배였고,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꽤나 정정한 편이었다.
그런 셰블로 대신관에게 주안이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말했다.
“이런, 셰블로 대신관님이 계신 줄 알았다면 마누엘 신관님과 함께 올 걸 그랬습니다.”
“…….”
주안의 말에 셰블로 대신관의 안색이 조금 나빠졌다.
포른 신관이나 커즈 신관이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마주하였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분도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는 영 좋지 않은 관계인 듯싶었다.
그 성격상, 차분한 신관들과는 썩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주안이나, 다른 신관들은 하나같이 황도의 페트롤 대신관을 떠올릴 것이다.
게다가 남부 대신전을 짓는 것에 거금을 모아준 것도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다 보니, 조금 각별한 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이런 셰블로 대신관이 있는 대신전이 남부에 있다 해도, 이렇게 에반드리안 맥도넬의 곁에 있다 해서 주안은 그가 남부의 편이자 에반드리안 맥도넬과 큰 연이 있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이미 커즈 신관을 통해서 에반드리안과는 적당한 선을 긋고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주안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에 개의치 않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커즈 신관님과 남부의 여러 신관님 덕분에 아스란 왕국에서의 일이 매우 수월하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마르니테스 공작가의 이름으로 남부 대신전과 셰블로 대신관님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벡브란 전대 공작 각하가 걱정이 많다던 소문이 그저 소문일 뿐인가 보군.”
주안에 대한 소문이야 많이 접했지만, 그 소문은 모두가 좋지 않은 말들이었다.
어지간한 망나니도 이루지 못할 그런 소문이 크게 부풀려져 퍼진 이유도 어쩌면 서방 대륙 최강의 국가인 제노폴에서도 황가 다음이라고 할 수 있는 대륙 동부의 지배자, 마르티네스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 몇 달은 그런 주안에 대한 소문이 급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단지 신성력을 쓴다는 특이한 귀족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미남 미녀로 바꾼다는 황당한 소문은 웃어넘기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스란 왕국에서 퍼진 전염병을 치료하기 위해 남은 것과 그것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고, 그것도 모자라 일을 훌륭히 마무리 지은 일은 많은 이를 놀랍게 만들었다.
아직은 남부를 중심으로 소문이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지만, 머지않아 주안에 대한 이야기로 제국은 떠들썩해질 게 분명했다.
주안에 대한 평가는 완벽하게 뒤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셰블로 대신관도 알고 있었다.
그 평가를 뒤집을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성흔이 아닐까 싶었기에 그가 노구를 이끌고 젠다르 요새까지 힘든 발걸음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혹 괜찮으시다면 셰블로 대신관님이 직접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오셔서 살펴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분들은 저희를 영 믿지 못하는 듯하여서 말이지요.”
주안이 에반드리안을 흘겨보며 말하자, 그 눈길을 받은 에반드리안 맥도넬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도 주안을 마주 노려보았다.
동부와 남부의 두 후계자의 이 모습에 셰블로 대신관도 조금 놀란 듯했다.
물론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선대의 일들이 있기에 이해하지만, 하스웰 맥도넬 후작대에 들어서면서 척을 지기보단 손을 잡는 쪽으로 기울었다 생각하였는데 말이다.
셰블로 대신관은 잠시 고민하였지만, 딱히 누구의 편을 들 것은 없기에 그는 중립, 아니, 교단의 편에 서서 생각한 후 판단하여야 했다.
“혹시 셰블로 대신관님도 저희가 전염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 아니네. 나도 방금 도착해서 말이네. 일이 이렇게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네.”
그가 도착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고, 이 일도 겨우 30여 분 전에 안 것이었다.
그리고 주안을 부른 것도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아닌 셰블로 대신관의 요청이 있었기에 마지못해 들어준 일이기도 하였다.
셰블로 대신관은 주안이 커즈 신관과 함께 와주었으면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 언제든 들을 수 있으니 지금은 주안과의 대화가 조금 더 우선인 듯했다.
그렇기에 셰블로 대신관은 동부든 남부든, 마르티네스든 맥도넬이든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다예프의 대신전과 교단의 의지에 따라 말했다.
“성흔의 힘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 벌인 일. 이들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게나. 아직 제국은 주안 공자가 가진 그 힘에 대해서 너무나도 모르네. 모르는 것을 가지고 죄를 짓는다면 문제나, 그렇다 해서 가르치지 않고 벌을 주기에는 너무한 처사이니 공자가 이해하게.”
셰블로 대신관의 말에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인상을 구겼지만, 이곳에는 그만 있는 게 아니라 황실 근위대 부단장인 실버론 하셀 자작까지 있기에 험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많은 사람이 신성력의 힘에 대해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깨달을 것이네. 그리고 주안 공자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깨닫게 되겠지.”
“저 때문이 아니라 도움을 주신 많은 신관분의 노력으로 인해서 깨닫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로 아스란 왕국에서도 신관분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미소를 짓는 셰블로 대신관의 모습에 주안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마냥 험악할 것만 같았던 젠다르 요새였지만, 주인 행세를 하는 에반드리안이 건드리지 못하는 이가 나서서 주안을 반겨주니 분위기는 훨씬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
“에반드리안 공자와 식사를 끝낸 후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남부와 황도, 두 대신전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곳에 써주시길 바랍니다, 셰블로 대신관님.”
뇌물 같기도 하지만, 주안은 도움을 받은 만큼 보답하려는 것이었고, 셰블로 대신관 역시 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뇌물이라면 이런 장소에서 말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유도 적절하니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실제로 신관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도 소문이 퍼지고 있기에, 이 일을 계기로 북부와는 달리 미흡하던 교세가 크게 확장이 될 것이 뻔했다.
그 여파로 현재 남부 여러 신전에서는 그동안 발길이 뜸하던 귀족들도 간간이 들러 이야기를 나누고 가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셰블로 대신관을 크게 기뻐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마르티네스의 기부금은 그 큰 황도 대신전의 기부금 중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셰블로 대신관도 잘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성격상 맞지 않는 페트롤 대신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배가 아팠지만, 이제는 그 배앓이도 나을 듯했다.
황도보다 떨어지던 남부의 대신전도 이제 교단 내의 입지가 크게 오를 것이고, 사람들도 모일 것이며, 거기에 기부금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셰블로 대신관의 입장에서는 그가 대신관이 된 후로 가장 행복한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셰블로 대신관과 주안의 훈훈한 분위기에 에반드리안 맥도넬에 끼어들며 말했다.
“이야기는 다 끝내셨습니까?”
“대충 다 끝났네. 그럼 주안 공자. 나중에 보세.”
“예, 셰블로 대신관님.”
셰블로 대신관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자 그런 그에게 주안이 고개를 숙여 인사해 주었다.
그 행동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셰블로 대신관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런 주안에게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말했다.
“우선 초대에 응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주안 공자에게 전해주고 싶군요. 그리고 실버론 하셀 자작님과 아르베리아 경에게도 말이지요.”
“응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서 말이지요.”
이런 에반드리안의 말에 주안이 대표로 답해주었지만, 말에는 약간의 불만이 묻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하여 초대한 것입니다.”
“이게 밥을 먹으면서 차분하게 할 대화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초대해 주신 것이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름대로 서로에게 말을 높이며 존중해 주는 듯했지만, 서로에게 호의가 없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두 거대 가문의 후계자들의 이런 행동에 주변의 이들이 더욱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아니,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젠다르 요새에 있던 이들이지 실버론 하셀 자작이나 아르베리아는 전혀 아니었다.
그것을 느낀 듯,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말하였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동부 요리를 준비하였으니, 입에는 맞으실 것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주안에게 그렇게 말해주며 돌아서서 먼저 앞서가는 에반드리안 맥도넬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실버론 하셀 자작이 노려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셰블로 대신관이 찾아와 주안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도 짜증이 났다.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것은 맥도넬의 후계자이자 차후 남부를 아우를 자신보다 주안의 눈치를 살피고 실버론 하셀 자작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남부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앞서 가버리는 에반드리안 맥도넬을 대신에 밴들리 쿼빅이 주안과 실버론 하셀 자작, 그리고 아르베리아를 안내하며 요새의 건물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