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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마마보이-96화 (96/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96화

젠다르 요새의 일로 일행들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하였다.

실버론 하셀 자작이 사람을 보내었지만, 예상대로 돌아오는 답변은 일행 중 전염병이 걸린 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슬슬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실버론 하셀 자작이 직접 움직이려 할 때 요새의 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나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일행 쪽으로 달려왔다.

“저 사람, 밴들리 경 아니에요?”

“밴들리 쿼빅이 맞습니다, 공자님.”

주안의 말에 곁을 지키고 있던 아르베리아가 답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밴들리를 보다, 주안이 픽 하고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과연 에반드리안 공자가 마음을 돌렸을까요, 아니면 밴들리 쿼빅이 혼자 나온 것일까요.”

“음…….”

주안의 말에 아르베리아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답을 찾은 듯 아르베리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후자가 아니겠습니까. 에반드리안 공자를 설득시키지 못했다면, 저희를 설득시키러 오는 길밖에 없으니까요. 밴들리 쿼빅의 성격이라면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확실히 밴들리 경의 성격이라면 주군인 에반드리안 공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저희 마르티네스를 달래는 것을 선택하겠죠. 자신이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말이죠.”

쿼빅 가문은 마치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최측근인 노밀 가문과 비슷한 가문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맥도넬을 모셔온 가신의 가문이었고, 한때 왕가였던 맥도넬이 제국으로 편입될 때도 그 곁을 지켜준 기사의 가문이었다.

대를 이어온 그 충성심은 보통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 하스웰 맥도넬 후작을 대신해 맥도넬 후작령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는 것도 바로 믿을 수 있는 쿼빅 자작 가문이었다.

밴들리 쿼빅 역시 쿼빅 자작가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다음 대의 맥도넬의 후작이 될 에반드리안을 모시는 것은 당연했고, 그가 에반드리안 맥도넬을 대신해 나오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밴들리 쿼빅을 보던 주안이 아르베리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둘 모두 해당이 안 된다고 봐요.”

“예? 둘 모두가 아니라 하시면…….”

“에반드리안 공자가 마음을 돌리는 것도 힘들 것이고, 그렇다고 저 충성스러운 쿼빅 가문의 밴들리 경이 주군인 에반드리안 공자의 의사에 반해서 독단적으로 움직일 리도 없죠. 적어도 지금은 말입니다.”

시간이 좀 지났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밴들리 쿼빅이 움직일 리가 없다고 주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움직였을 땐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일 것이다.

지금 그런 그가 움직였다면 주안이 생각한 답은 하나였다.

“자, 밴들리 경을 만나러 가봅시다. 에반드리안 공자가 전해준 말이 뭔지는 들어봐야겠죠. 요새를 통과시켜 주겠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뭐든 할 말이 있으니 밴들리 경을 보냈겠지요.”

“그가 에반드리안 공자의 말을 전하러 왔다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올 리가 없지요. 그래도 밴들리 경을 보낸 것을 보면 화를 돋게 할 생각은 없어 보이잖아요.”

“……이미 잔뜩 화가 났습니다만.”

아르베리아의 말에 주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실버론 하셀 자작이 있는 앞 열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도 이런 대우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실버론 하셀 자작이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아주 젠다르 요새의 성벽을 넘어가려는 듯했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을 말리고, 무력 충돌은 피하는 대신 정치적인 부분으로 일을 해결하자는 주안의 말에 따라 실버론 하셀 자작은 황도의 황성으로,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오랜만에 황도 대신전의 패트롤 대신관에게 각자 연락을 넣으려고 하였다.

물론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지금은 남부군을 떠났다고는 하나 한때 남부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은 인물은 다름 아닌 주안의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다.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빚을 진 이들도 있을 것이다.

주안은 그것을 이용해 다른 남부 요새들에 연락하는 한편, 꼭 젠다르 요새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을 통해 돌아가도 크게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주안이 여유롭게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니까.

‘뭐, 무력으로도 모자라진 않겠지만 꼭 피를 흘리는 게 능사는 아니지.’

무력 충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가장 뒤로 미루는 게 나았다.

두 거대 가문의 충돌은 그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 힘들어지기에, 이 부분보다는 정치적인 상황과 권력을 이용해 상대방을 압박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하였다.

남부 전체가 맥도넬 후작가의 손이 뻗은 장소였다면 이런 정치적 압박도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겠지만, 그들이 마르티네스가 아닌 맥도넬인 이상, 남부를 손에 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화가 좀 통했으면 좋겠군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편하게 좀 집에 갔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르베리아 역시 집에 다 와서 이런 꼴을 당하니,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꽤나 화가 난 듯했다.

그리고 밴들리 쿼빅의 말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아주 결투를 신청할 기세를 뿜어내며 주안의 곁을 지키며 함께 걸어갔다.

* * *

밴들리 쿼빅이 찾아와서 전해준 말은 조금 뜻밖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저녁에 초대하고 싶다고요? 저를요?”

“예, 그렇습니다, 주안 공자님.”

“좀 황당하다는 것을 밴들리 경도 아시죠?”

“…….”

다들 주안과 비슷한 심정인 듯 밴들리 쿼빅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 흉흉한 기색은 실버론 하셀 자작이나 알튼 경, 그리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 같은 실력자들까지 그러니 밴들리 쿼빅의 안색이 조금 나빠졌다.

여전히 무표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주안은 참 대단하다 싶을 정도다.

“보다시피 저희 일행은 매우 건강하십니다. 전염병은 모두 치료하였지요. 오히려 아스란 왕국의 병을 모두 치료하고 오는 길인데, 이렇게 박하게 대하시니, 그 저의가 의심스럽군요.”

“아스란 왕국에서 발생한 그 병은 오랜 잠복기를 거쳐 나타난다 들었습니다. 때문에 저희 공자님과 닉 퍼그 자작님께서 불이익이 있을 것을 아심에도 이렇게 제국을 위해 행하는 일이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호오? 불이익을 감내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제국을 위하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이들은 이곳에 없었고, 밴들리 쿼빅 역시 주안과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이 믿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저 서로 기분 상하지 않도록 둘러 표현하는 말일 뿐이지 크게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를 초대하셨다는 것은, 마치 저는 그 전염병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신 듯합니다만?”

“성자라는 소문까지 나시고 계신 대단한 신성 능력을 가진 주안 공자님이 아니십니까.”

“과분한 칭호이군요. 그리고 성자도 사람이기에 병에 걸리고 나이를 먹으면 죽는 것도 똑같습니다.”

“하지만 왠지 주안 공자님에게는 그런 것이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적어도, 그 성흔이라는 것이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저희 공자님도 알고 계시니 말입니다.”

“이게 뭔지 아시는데도 여전히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에게 그전염병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생각하시나 보군요.”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밴들리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인물이나, 그만큼 강직했고 현재로는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 혼자 와서 할 말을 다 하는 그의 행동은 정말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너무 외골수적인 모습이라 답답했고 그렇기에 안타까웠다.

생각 같아서는 밴들리 쿼빅에게 죄를 묻고 분노를 표출할 수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듯 에반드리안 맥도넬도 이런 밴들리 쿼빅을 보낸 게 아닌가 싶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가해진 불온한 이 일에 대한 분노를 오롯이 밴들리 쿼빅에게 내비치는 것도 귀족답지 못한 행동이며, 그에게 잘못을 묻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임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화가 난다 해서 그 누구도 밴들리 쿼빅에게 위해를 끼치려 하진 않았다.

주안의 명령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뭐, 초대해 주셨으니 가도록 하지요. 아, 그리고 설마 저 혼자만 초대한 것은 아니겠지요?”

“공자님과 함께 측근 두 분에 대해선 허락을 하셨습니다.”

“뭐, 그러도록 하죠.”

허락이라는 그 말이 좀 언짢은 부분이긴 하였지만, 그러려니 하며 주안은 함께할 두 사람을 언급했다.

“실버론 자작님, 그리고 아르베리아 경.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에반드리안이 주안에게 위협을 끼칠 일은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도 혹시나, 라는 부분이 있기에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실버론 하셀 자작과 무력은 워랜에게 뒤처진다 해도 다른 부분은 워랜보다 뛰어난 아르베리아를 선택하였다.

주안의 이런 선택에 대해 다른 이들은 크게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저 워랜과 토미가 조금 아쉬워하였지만, 주안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는 그들도 알기에 불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주안이 밴들리 쿼빅에게 말했다.

“하나 한 가지 새겨듣는 게 좋을 것입니다, 밴들리 경.”

“무엇을 말입니까.”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내일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그대들이 허락을 하든 말든 말이지요.”

“…….”

갑작스러운 그 말에 밴들리 쿼빅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조금 놀라 웅성거렸다.

하지만 주안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눈은 날카롭게 밴들리 쿼빅을 흘겨보았다.

“저희는 굳이 젠다르 요새를 통해서만 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스란 왕국의 사람이 아님을 아시지요? 그리고…….”

주안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부 요새가 모두 맥도넬과 남부인들 아래에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저희 마르티네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신만만한 주안의 그 말에 밴들리는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동부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근거지이자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땅이라고는 하나, 한때 남부 국경을 다스렸던 이들이다.

아직 은퇴하지 않은 장군들과 기사들은 벡브란 전대 공작과 함께 전장에 섰던 기억이 여전했고, 남부 귀족 중에서도 다수 존재한다.

마르티네스처럼 남부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는 맥도넬인 이상, 주안의 말대로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젠다르 요새가 아닌 다른 요새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밴들리 쿼빅도 잘 알고 있었다.

에반드리안이 작정하고 계속 방해한다면 며칠은 더 묶어둘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불리한 것은 결국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될 것임을 알기에, 밴들리 쿼빅은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주군의 미움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말릴 생각이었다.

“자, 그러면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남부 요리는 다 좋은데 향신료가 너무 강해서 좀 그렇더군요. 그 부분은 신경 써주십시오.”

“동부 요리를 중심으로 준비해 놓고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 마시길.”

“헤에, 오랜만에 고향 요리를 먹는 건가요. 이거 다른 분들에게 괜히 미안해지는데요. 아, 그리고 휴이 경은 저녁 드시고 내일 떠날 준비를 미리 좀 해두세요.”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여유로운 주안의 태도에 분위기가 풀어지면서 남은 이들 역시 각자 할 일과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흩어지는 분위기였다.

대신 실버론 하셀 자작은 여전히 근엄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주안의 곁에 섰다.

밴들리 쿼빅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안이 자신의 마차로 가서 오르는 그 뒷모습을 복잡한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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