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94화
다른 곳과는 달리 슬렌더 백작령의 근거지 메리다에서는 하루 일정은 간단하게 쉬고 출발을 하기로 이미 오기 전부터 결정을 한 뒤였다.
그것을 전해 받았던 휴이 훼스턴이 이미 준비를 끝낸 뒤라 주안이 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저 다들 푹 쉬고, 일어나서 슬렌더 백작가에서 준비한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나서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게 가능한 이유도 북부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전염병에 대한 정리가 끝난 상태라는 것에 있었다.
“이제 슬슬 집에 가볼까.”
주안이 기지개를 쭈욱 켜며 세 요정 꼬맹이와 방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세라타와 토미가 주안을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슬렌더 백작가의 저택을 나오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일행들뿐만이 아니라 슬렌더 백작가의 이들도 나와서 주안을 맞이했다.
주안은 출발 준비를 끝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일행들 쪽이 아닌 슬렌더 백작과 유우나 공주가 있는 곳으로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슬렌더 백작님. 그리고 유우나 공주님.”
“감사야 저희가 몇 번이나 드려도 모자라지요. 저희 가문을, 북부를…… 더 나아가 왕국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슬렌더 백작은 여느 제국의 사람들과는 다른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의 행동에 적잖이 놀라고, 그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그들을 받아들일 땐 그저 해야 할 일 정도로 생각을 하였고, 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기에 그들을 통해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상한 병이 발생하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인 주안을 통해 이 병의 위험성에 대해 알게 되긴 하였지만, 그때까지도 솔직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도에서 전해진 소식과 사절단을 물려야 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심각성을 인지하였다.
그리고 그보다 놀라웠던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안이 신속한 행동과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되돌아간 제국 남부의 귀족들과는 달리 남아서 아스란 왕국을 돕겠다고 하였을 때, 그는 위선이라고까지 생각을 하였고 오히려 돌아갔으면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 나가는 주안의 행동은 그가 그동안 생각해 오던, 그런 혐오스러운 귀족들과는 조금 달랐다.
이익과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귀족.
거기에는 슬렌더 백작이라는 자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안은 그게 아닌 다른 이유로 움직이는 듯했다.
선의.
귀족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그것은 너무나 생소하고 낯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도 주안의 그 선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을 땐 꽤나 놀랐다.
자신의 가문의 근거지인 메리다와 그 일대 북부의 병자들을 모았을 땐 아스란 왕국의 귀족이기에 해야 할 일 정도로 생각을 했지만, 그들을 돌보면서 그 역시 무언가 바뀌어 간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귀족으로서 그 역시 모범을 보이던 이였지만, 타국의 귀족에게…… 그것도 한참이나 어린 후계자에게 그런 것을 느꼈다는 것은 그로서도 정말 생소한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슬렌더 백작님이 아니셨다면 북부를 이토록 빠르게 안정시킬 수 없었을 거예요. 보다 빠르게 이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백작님 덕분이셨고, 병자들을 받아주신 그 결단을 가장 먼저 내려주신 덕분에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어요.”
주안의 말에 슬렌더 백작의 꼬장꼬장해 보이는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을 그렇게 움직이게 만든 것도 모두 주안인데,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니…… 참 노련한 이를 보는 듯했다.
“별관 건물은 한동안 계속 저렇게 남아 있을 거예요. 저 건물의 신성력이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 활용하셔야 할 것인지는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으셔도 아실 거라 생각해요.”
“물론입니다. 일단 병자들을 치료 후 저 별관 건물을 개조해서 신전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그리고 포른 신관님을 통해서 신관분들과 신도들을 지원을 받기로 이미 약조를 한 상태입니다.”
주안이 바라던 답을 슬렌더 백작은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렇기에 주안이 안도와 안심하며 만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스란 왕국에서 전염병 사그레스는 일상이나 마찬가지인 풍토병이었지만 그동안은 약으로 충분히 이겨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사그레스에 숨어들어 온 디안의 병마로 인해 왕국이 큰 위험에 빠질 뻔했고 앞으로 이번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디안의 병마를 이겨내는 방법인 신성력.
그것만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안 이상, 슬렌더 백작은 주안이 권유하기도 전에 이미 포른 신관과 약조를 끝낸 듯했다.
그는 아스란 왕국 사람으로서 제국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크게 꺼리지 않는, 나름 개방적인 인물이었고 신관들의 힘을 직접 보았기에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쉬운 듯했다.
주안은 그런 슬렌더 백작에게 인사를 해준 후 곁을 지키고 있던 유우나 공주에게 시선을 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미소에 유우나 공주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작님 말씀처럼, 저희 아스란은 공자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 은혜를 갚을 방법조차 생각나지 않지만,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꼭 공자님께서 도움이 필요할 때 아스란은 절대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도에서부터……. 아니, 제국의 황도에서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유우나 공주가 주안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유우나 공주를 시작으로 슬렌더 백작과 사미르 공자 그리고 시아 영애와 슬렌더 백작가의 사람들과 구경을 나온 백성들,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 왔던 병자들까지 주안과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에게 고개를 숙여주었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닐뿐더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 행동에 다들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동안 보아온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인사들과는 전혀 다른, 그런 마음이 전해져 오기에 매우 어색해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것 자체가 싫지는 않은 듯 다들 어색해하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들을 짓고 있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주안은 이곳에 남아 고집을 부린 게 어쩌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들 이런 기분을 느끼고, 왜 이들이 고개를 숙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은 지도자들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
그리고 이런 유우나 공주를 보던 주안은 잠시 고민하다, 품속에서 작은 인장 하나를 꺼내 유우나 공주에게 건네주었다.
은과 함께 섞은 특수한 광석으로 만든 손바닥만 한 증표에는 마르티네스 공작가문의 검과 활이 교차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장 아래 푸른 보석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것은 누가 소유했던 것인지를 알려주는 마법적 처리가 된 보석이기도 했다.
유우나 공주는 주안이 건네는 증표에 갸웃하며 주안에게 물었다.
“주안 공자님, 이게 뭔가요?”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손님에게 전해드리는 증표입니다. 다음에 제국으로 오실 땐 좀 편하게 오시라는 저의 선물입니다.”
“서, 설마 손님의 증표……?”
유우나 공주만이 아니라 슬렌더 백작도 놀란 눈으로 주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시선에 주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것을 주어도 괜찮을까, 주안은 솔직히 고민을 많이 하였다.
아무리 주안이 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라고는 하나 손님의 증표는 아무에게나 주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이 증표를 가진 이를 보증한다는 의미였고, 이것을 지닌 사람은 적어도 제국 내에선 백작 그 이상의 대우를 약속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영향력이 강한 동부를 찾는다면 큰 환영을 받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을 지닌 이가 이 증표를 이용해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린다면, 그에 대한 불이익을 전적으로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져야 한다는 점이다.
보상이 필요한 일이라면 보상을, 죄를 짓는다면 그 죄에 맞는 죗값을…….
그렇기에 이 증표는 신중하게 써야 하고 믿을 수 있는 이에게만 선물해야 한다.
주안이 건넨 증표가 무엇인지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은 모두 다 알고 있기에 다들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것을 받는 이가 유우나 공주라는 것에 어느 정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이, 이건 너무…….”
그 당돌하던 유우나 공주마저 당황하게 만들 정도의 물건이었고, 그런 유우나 공주의 모습에 주안이 오히려 차분히 말했다.
“그냥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것도 일종의 뇌물로 생각해 주세요.”
“뇌물이요?”
일전에 유우나 공주도 주안을 도와주며 뇌물이라 언급을 하였지만, 주안도 자신에게 똑같은 말을 하니,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이건 뇌물치고는 너무 심하잖아요.”
“심한 게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저는 곧바로 토미를 풍신 경에게 보낼 것이니, 잘 봐달라는 뇌물로선 절대 부족한 게 아니니까요.”
“토미를…….”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 쪽으로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유우나 공주에게 말했지만, 멀찍이 떨어져 있던 풍신 경은 주안의 말을 들은 것인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유우나 공주는 주안이 토미를 얼마나 아끼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손님에게 주는 증표를 전하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할 만큼, 그런 소중한 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결국 저한테 주는 선물은 아니었네요.”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네요, 공주님.”
“흥.”
유우나 공주가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리자, 주안 역시 히죽 웃으며 장난 가득 미소를 지었다.
토미를 잘 봐달라는 뇌물이긴 하지만, 반쯤은 안쓰러운 유우나 공주가 다시 제국으로 올 때 좋지 않은 대우를 다시는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귀족파들도 더 이상 유우나 공주에게 해코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손님인 이상, 그들이 유우나 공주를 건드린다는 것은 바로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건드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모두 말해주기에는 너무 부끄럽기에, 토미만을 언급을 했지만 말이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사업차 오실 땐 꼭 연락을 주십시오, 공주님.”
“예…….”
주안이 조심스레 그녀의 손에 그것을 쥐여준 후 싱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유우나 공주의 볼이 조금 빨개지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며 주안은 돌아서서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에게 향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자, 출발합시다.”
드디어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였다.
* * *
아스란 왕국으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제국으로 다시 돌아갈 때는 인원도 반 넘게 줄어 있었다.
도시나 마을을 들릴 필요도 없었기에 빠른 시간 안에 제국 남부 국경의 중추이자 올 때 들렀던 젠다르 요새로 향했다.
“음…….”
주안은 넓은 마차의 내부에 앉아, 왠지 좀 쓸쓸한 기분을 맛봐야만 했다.
“좀 심심하네.”
늘 함께 마차를 이용했던 유우나 공주도 없었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가출 청소년에 대한 벌을 바라는 휴이 훼스턴 때문에 소니아와 세라타를 마차에 태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마차에 있는 사람은 주안 혼자뿐이었다.
‘뭐, 사람이라면 말이지만.’
세 요정 꼬맹이들도 함께이긴 했지만, 지금은 낮잠 자는 시간인지라 주안이 만들어주었던 바구니 침대에서 서로 포개어 잘도 자고 있었기에 말을 걸어주는 이도 없었고, 놀아줄 이도 없었다.
“뭐, 이제 곧 젠다르 요새이니까…….”
그곳에서는 휴이 훼스턴을 좀 달래보고 소니아는 몰라도 세라타만이라도 좀 마차에 태워주고 싶었다.
그러면 가끔 토미도 불러서 같이 놀 수 있을 것이니, 조금 덜 심심하지 않을까 하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다, 주안은 조용히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로운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젠다르 요새에서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 주안을 맞이해 주는 뜻밖의 인물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
* * *
굳게 닫힌 젠다르 요새의 성문은 과연 제국 남부 국경의 중심이라는 말답게 단단해 보였고, 요새의 성벽 또한 매우 높았다.
성문을 열고 자신들을 환영해 주고 배웅해 줄 땐 몰랐지만, 이렇게 닫힌 요새의 성문을 마주하니, 무언가 묘한 기분을 주안은 느꼈다.
마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펴보던 주안은 굳건한 젠다르 요새를 보며 꽤나 놀랐다.
‘철옹성이라는 게 저런 건가.’
단순히 큰 요새라 생각할 때와는 달리 문을 굳게 닫고 있으니 그런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왜 그 철옹성이, 젠다르 요새가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을 막아 세운 것인지는 주안도 곧 알 수가 있었다.
젠다르 요새의 성벽 위.
한 남자가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 아니, 주안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반드리안 맥도넬…….”
그와 눈이 마주친 주안은, 에반드리안 맥도넬에게서 명백한 적의를 느끼며 잔뜩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