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92화
“그런데, 주안 공자님.”
“머리 위에 있는 아이들은 비밀입니다~”
“우…….”
그녀 역시 주안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세냐와 아냐, 그리고 주변을 날아다니며 유우나 공주에게 관심을 가지는 마냐에 대해서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주안의 냉정한 그 말에 유우나 공주가 볼을 살짝 부풀렸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말을 해줄 수가 없으니…….’
생각 같아서는 이 아이들을 방에 놔두고 싶었지만, 그 행동 자체에 제약을 가할 권한이 주안에겐 없었다.
부탁을 받고, 도움을 받는 입장에 명령이라는 것을 내릴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예, 다행히 원주민들은 자체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제가 손을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휴우,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유우나 공주의 그런 모습에 주안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주민들이 병에 걸려 세력이 약해진다면, 오히려 아스란 왕국 입장에선 대밀림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요?”
하지만 이런 주안의 말에 유우나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후훗, 글쎄요. 저희에겐 그럴 힘도 없지만, 그럴 생각도 없답니다. 무엇보다 원주민들이라고는 하나 그들의 생명이 무의미하게 희생당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이득을 취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인걸요.”
“어째서 그렇죠? 그들은 아스란 왕국의 국민들도 아닌데…….”
“저희 국민이 아닐 뿐이지 같은 사람인걸요. 지금은 서로 적대하는 입장도 아니니, 오히려 지금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한 편이 되는 게 현재의 아스란 왕국에겐 훨씬 큰 이득이 아닐까요?”
확실히 지금의 아스란 왕국의 힘으로는 설령 전염병으로 수많은 원주민이 희생당했다 해도 대밀림 개발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매우 현실적인 그녀의 답이었고, 생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주안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짓궂은 말로 저를 시험하시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주안 공자님.”
“으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유우나 공주의 행동이 현재의 아스란 왕국, 왕성의 답이기 때문에 그녀의 의중을 떠본 것이기도 했다.
이런 주안의 허술한 시험에 넘어갈 리가 없던 유우나 공주였고, 생글생글 웃으며 주안을 보는 그녀의 눈이 꽤나 무서웠기에 주안은 슬쩍 시선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 대답의 점수는 몇 점인가요?”
“……10점 만점입니다.”
“어머나, 정말요? 그건 다행이네요. 주안 공자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듯하네요.”
처음부터 그녀에 대한 인상은 나쁘진 않았다.
가끔 무서울 때가 있긴 하였지만, 참 열심히 사는 공주님 같았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으며, 가족과 왕국을 위해 희생하려는 그 모습은 아련하기도 했다.
솔직히 그녀를 보고 아무 조건 없이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주안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입장을 항상 생각해야만 하였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기도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역사책은 왜 살펴보려고 하세요?”
함께 복도를 걸으며, 영 신경 쓰이는 마냐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은 유우나 공주는 자신의 손에 살며시 내려앉은 마냐의 행동을 귀엽게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알아볼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희 왕국보단 제국에 더 많은 역사책이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하겠지만, 아스란 왕국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고, 이 지역에 관한 자료는 오히려 저희 제국보단 이곳에 더 많이 있겠지요.”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주안이 알고자 하는 것은 전체적인 인류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지만, 적어도 아스란 왕국은 대밀림과 가장 밀접해 있는 나라였고, 그만큼 대밀림에 관한 자료와 역사책은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주안이 그런 자료들을 보고 읽는다 해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기억을 할 리도 없다.
하지만 무적의 마법 팔찌의 기능을 믿기에, 일단 무작정 읽어보고 제대로 된 정리는 황도에 가서 할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몽땅 다 저장해 놓고 가져가야 해.’
황도라면 적어도 황립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엄마나 아니면 주안 스스로 역사학자들을 모아 아스란 왕국에서 저장해 온 자료들을 보다 손쉽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곳은 주안의 나라도 아니고, 주안이 편하게 힘을 쓸 수 있는 그런 곳도 아니니 말이다.
황도에선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통해 손쉽게 수많은 일을 척척 해낼 수 있다는 게 엄청난 차이이다.
“일단 가능한 많은 것을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역사와 관련된 책이면 되나요?”
“전설이나 신화, 각 지방에 남겨진 오래된 이야기들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주안의 말이었지만, 유우나 공주도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대신 무언가 결심한 듯 주안에게 말했다.
“사서들이나 학자들에게도 도움을 청해 볼게요, 공자님”
“……감사합니다, 공주님.”
“아스란 왕국은 공자님에게, 그리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에게 은혜를 입은 입장인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으음……. 으, 은혜가 맞을까요. 이전 일들을 생각해 보면…….”
아스란 왕국을 이 꼴로 만든 것은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이나 마찬가지이긴 하였는데, 은혜라는 말은 조금 아닌 듯했다.
아니, 그 이전을 더 따져보면 아스란 왕국의 행태에 징벌의 의미가 크긴 하였지만 말이다.
“어머, 그러면 거래라고 하죠, 뭐. 주레인 공작님과의, 아니,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차후 함께할 수 있는 합작 사업에 대한 뇌물 정도로 봐주세요.”
“……거래가 아니라 뇌물이었군요.”
“후훗, 그런 셈이죠.”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행동에 주안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못 말릴 당돌한 공주님이었다.
* * *
대밀림에서 돌아와 아스란 왕국의 왕성에 며칠 머무르는 그 시간 동안 주안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왕성의 도서관에서 빌린 아스란 왕국의 역사와 각 지방에 내려지는 전설, 그리고 관련된 자료들을 아침 식사 전까지 살펴본 후 아침을 먹고 바로 왕도 외곽에 마련된 전염병 환자들의 숙소로 가서 병자들을 돌봤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각지에 퍼져 있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지역 병자들의 상황과 대처 방식들을 의논한 뒤 왕도에 머무르는 일행들과 다시 의견을 나눈다.
이후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신성력 가득한 붕대를 만들고, 저녁 후 다시 자료들을 읽어보며, 늦은 밤이 되도록 마법 팔찌에 내용을 저장시키기 바빴다.
“죽어, 이러다 진짜 죽어…….”
주안이 침대에 드러누우며 작게 중얼거렸다.
단 한 번도 노력이라는 것과 시간에 쫓겨 살아본 일이 없던 주안에게 최근 며칠의 시간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아스란 왕국으로 오기 전에도 많은 책을 읽으며 대비한 일이 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
“우와, 코피?”
“진짜?!”
세냐의 말에 주안이 화들짝 놀라 손을 코에 가져다 대었지만,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쿠후후, 그거 얼마나 했다고 벌써 코피가 날까 걱정이실까?”
“으…….”
장난 가득 미소를 지으며 날아와 주안의 머리 위에 앉는 세냐의 행동에 주안이 인상을 썼지만,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다른 두 요정 꼬맹이는 주안이 직접 마련해 준 작은 바구니 침대에서 쿨쿨 잘도 자고 있었지만, 세냐만은 주안이 잠들 때까지 그 곁에 있어 주었다.
가끔 이런 농담으로 잠을 달아나게 한다는 점이 조금 그렇긴 하지만, 혼자 외롭게 책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함께 있다는 점이 참 좋긴 했다.
그래서 화를 못 내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몸에 주렁주렁 달린 그 조잡한 마법 물건들은 다 뭐에요?”
“조, 조잡?! 이게 얼마나 비싸고 엄청난 아이템들…… 인데.”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마냐와 아냐가 꼼지락거리며 잠에서 깨려 하자 황급히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주안이 손가락으로 두 꼬맹이의 가슴을 토닥여 주며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 말에 세냐를 째릿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조잡해서 조잡하다고 한 건데, 뭐가 잘못되었담?”
“이거 황립 마탑의 걸작들만 모아둔 거거든? 이 목걸이에는 자동으로 방어 마법을 펼칠 수도 있고, 이 벨트는 허리를 꼿꼿하게 만들어 안정적인 자세도 잡아줄 수도 있는 거고, 이 팔찌는……!”
목걸이나 벨트, 팔찌나 반지 등등, 다양한 마법 물건들을 세냐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어째서인지 세냐는 매우 심드렁하다.
“뭐야, 조잡한 게 아니잖아.”
“그렇지? 네가 몰라서 그런 거니까 용서…….”
“완전 쓰레기들이네. 누가 저딴 걸 돈을 주고 산담.”
“…….”
이딴 걸 엄청난 돈을 주고 산 사람이 여기 있었다.
아니, 엄마가 사서 선물해 준 것이기에 이번에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주안이 세냐를 노려보았다.
주안의 심상찮은 눈길에 세냐가 움찔 놀라긴 했지만,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그거 물건들 팔찌랑 허리띠 빼면 다 일회용이죠? 팔찌나 허리띠도 조건부고.”
“어? 그걸 어떻게…….”
세냐의 말에 주안이 갸웃했지만, 세냐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날개를 움직여 날아올랐다.
날개의 움직임에 따라 신비로운 색색의 빛이 흩날리는 게 꽤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 세냐가 주안의 목걸이와 팔찌, 벨트와 반지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 움직임에 따라 날개가 스쳐 지나갔고, 날개에 닿은 마법 물건들이 희미한 빛을 머금더니 이내 사그라든다.
“뭘, 한 거야?”
“일회용품은 충전식으로, 조건이 있던 것은 조건이 없이. 선물이에요.”
“너, 너, 마법도 쓸 줄…….”
“어머? 아미엘 님이 저희를 그냥 보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이래 보여도 저희는 아미엘 님 다음가는 실력자라고요.”
그 말에 주안이 놀라는 한편, 슬쩍 고개를 돌려 바구니 침대에서 쿨쿨 잘 자고 있는 마냐와 아냐를 바라보았다.
마냐가 이불을 걷어찬 채 자고 있는 모습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닌 거 같은데.”
“으…… 진짜라고요!”
잠버릇 나쁜 마냐를 재차 토닥여 주는 주안의 모습에 세냐가 발끈했지만, 영 믿을 수가 없었다.
세냐가 그렇게 말을 했어도 이 마법 물건들을 그저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도 개조했다는 것을 납득할 사람은 없었다.
특히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정신이상자로 몰아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잇!”
“앗? 뭐, 뭐 하는 거야?!”
영 믿지 못하겠다는 주안의 모습에 잔뜩 뿔이 난 듯 세냐가 주안의 팔에 돌진하여 그대로 팔찌를 낚아채더니 주안의 팔목에서 빼버렸다.
그 잽싼 행동에 반응조차 하지 못 한 주안이었지만, 팔찌가 빠졌다는 것에 주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안의 저 마법 팔찌는, 벗는 순간 저장된 책들의 내용이 모조리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너, 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이건, 이걸 빼버리면 난…….”
그동안 읽은 수백 권의 책과 관련 자료들이 모조리 날아간 것에 주안이 화를 내기보다 허탈함에 안색이 나빠졌다.
하지만 세냐는 사과를 하기보다 들고 있던 주안의 팔찌를 다시 주안에게 채워주었다.
그리고 주안이 책상 위에 제멋대로 쌓아둔 책들을 보며 세냐가 말했다.
“살메르 지역의 전설, 밤의 아이들은 오늘도 춤을 춘다. 이게 나온 책은?”
“……센타로의 저서, 저녁의 반딧불, 74페이지, 세 번째 줄…….”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말을 그대로 내뱉은 주안은 이내 놀란 눈으로 자신의 팔에 채워진 팔찌와 세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봤죠?”
“이, 이게 대체…….”
“흥, 말했잖아요. 다 고쳤다고. 쓰레기, 아니, 좋지 않은 물건을 쓸 만하게.”
주안 때문인지 험한 말을 내뱉으려던 세냐가 말을 금세 정정했지만, 이토록 쉽게 마법 물건을 바꾼 세냐의 능력에 주안은 경악하였다.
게다가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주안을 방해하지 않던 세냐였긴 하였지만, 주안이 읽던 책을 세냐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자, 이 아이가 정말 보통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을 짓던 세냐가 주안의 놀란 모습을 보고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이내 살랑살랑 날아 두 동생이 있는 바구니 침대로 향하였다.
“내일은 점심 지나서 여길 떠나는 거 맞죠?”
“어, 으, 으응…….”
내일은 아스란 왕국 왕도를 떠날 생각이었기에 주안도 이렇게 무리해서 남은 책과 자료들을 읽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세냐는 여전히 놀란 눈의 주안에겐 흥미를 잃었다는 듯, 아냐의 곁으로 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마냐와 마찬가지로 아냐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갈 때 되면 그때 깨워주세요. 전 계속 잘 거니까.”
주안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금세 잠이 든 듯 세 꼬맹이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온다.
그런 세 요정의 다정한 모습을 보다, 주안은 조심스레 자신의 팔찌를 매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전부 바꿔놓은 거야?”
팔찌도, 목걸이도, 허리띠도, 반지들도 죄다 마법 물품들이었고 직접 확인시켜 준 팔찌는 더 이상 벗겨지는 것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근데 허리띠는 어떻게 바뀐 거지.”
다른 것은 일회용이 이젠 여러 번 쓸 수 있다고 하였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펼 수 있는 능력만 지닌 허리띠는, 어떻게 바꾸어놓은 것인지 솔직히 궁금하기보단 무섭기에 조심스레 벗은 후 방구석에 집어 던져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