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91화
날이 밝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주안 일행들 역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대밀림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길잡이는 여전히 쿠단이었지만, 메데아 대족장의 배려로 다이어 울프 기수들이 직접 다이어 울프에 태워서 대밀림 경계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무슨 하루도 안 돼서…….”
주안이 다이어 울프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디며 그렇게 말을 했지만, 주안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들 역시 모두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걷고, 안내를 받으며 손님으로 받아준 원주민의 부락에서 밤을 보내며 갔다고는 해도 다이어 울프를 타고 이토록 순식간에 대밀림을 돌파해서 나올 줄은 몰랐다.
이른 아침에 출발해 늦은 밤이 되었다 해도 대밀림 바깥 경계까지 단 하루 만에 도착한 것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이건 뭐, 우리 집 말들이랑 기동력만 따지면 밀리지도 않겠네.”
“험한 지형을 고려하면 그 이상으로 보여요.”
워랜의 어이없어하는 투로 말했지만, 이건 조금 심각한 일이기도 했다.
대륙의 전투와 전략에서의 말은 매우 중요한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저 늑대들은 지구력도 모자라지 않아. 왜 다이어 울프가 육식동물 중에서 그토록 위협적인지, 실감이 갈 정도야.”
말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아는 워랜으로선, 이 다이어 울프를 길들여 말처럼 타고 다니는 원주민들의 높은 기동성이나 차후 분쟁이 일어날 시 이들의 다이어 울프들의 활약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기에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과 비견되는 기동성과 지구력, 비교되지 않는 민첩성과 기수와 함께 무기가 되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까지 고려한다면, 1인의 기병 그 이상의 전투력을 낼 것이었다.
“후후후, 놀랐나. 많이 놀라라. 더 놀라도 된다.”
“……쳇.”
이곳까지 다이어 울프들을 이끌고 가장 앞에서 쿠단과 함께 안내를 하였던 카사가 팔짱을 끼며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런 자랑스러움이 이해가 되었기에 워랜이 작게 혀를 찼고, 주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까지 안내해주 셔서 정말 고마워요, 카사.”
“별것 아니다, 작은 손님. 집에 잘 가라. 다음에 보자.”
“예, 다음에 봐요. 메데아 대족장님에게도 안부의 말씀 전해주세요.”
“알았다. 영감도 잘 가라.”
카사가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여전히 고개만 까닥이며 인사를 하였지만, 이젠 정말 그러려니 한 듯 마누엘 대신관이 언짢은 표정도 짓지 않으며 말했다.
“정말 쿠단 녀석을 데리고 가도 되는 거냐?”
“나 집에 안 간다. 아버지 안 볼 거다!”
함께 따라온 쿠단이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팔에 매달려 칭얼거리자, 그 행동에 잔뜩 찌푸린 그가 쿠단의 머리를 밀어내며 떼어내려 하였다.
하지만 힘 좋은 쿠단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 행동에 짜증이 난 것인지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퉁명스레 카사에게 말했다.
“다 큰 녀석이 자기 아버지 무서워서 또 가출을 하려는데 내버려 둔다고?”
다 컸다 해도 이제 겨우 열두 살의 쿠단인데.
주안이 갸웃하긴 했지만, 원주민들에게 열두 살이면 어른이긴 하니 이해하기로 했다.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진다. 잘 살아라, 쿠단.”
“잘 가라, 카사. 아버지한테 나, 결혼하면 아내 데리고 간다고 전해줘라.”
별일 아니라는 듯, 카사가 인사를 하였고 쿠단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완전 깔끔하네…….’
이런 두 원주민의 모습을 보며 주안이 작게 웃었다.
정말 인간관계가 깔끔한 그들의 모습은 대단하다 싶을 정도다.
게다가 쿠단의 결혼에 대한 집착도 정말 대단했다.
……정말 결혼을 할 수 있을지, 조금 회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카사가 다이어 울프들을 돌려 다시 돌아온 길을 따라가자, 그런 그들을 보며 주안이나 다른 이들도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주안이 말했다.
“그래도 대밀림의 달란트 부족이 저희 마르티네스 가문에 호의적인 게 다행이지 싶어요. 그렇죠?”
“뭐, 그건 그렇지.”
아직 숫자는 부족하다 해도 다이어 울프들을 조련하고, 숫자를 불리면 정말 대단한 전력이 될 것이다.
그런 대단한 전력이 적이 아닌 친밀한 관계라는 점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카사와 원주민 일행들이 돌아가는 길을 배웅해 주며, 주안 일행들 역시 발걸음을 돌려 대밀림 경계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주안이 왕도에 도착해서 아스란 왕국의 왕궁으로 들어서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일행들뿐만이 아니라 유우나 공주나 남부 귀족들을 호위하여 남부 국경까지 갔었던 실버론 하셀 자작도 되돌아와 주안 일행을 반겼다.
그리고 왕궁으로 돌아온 주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뜨거운 물에 목욕하는 것과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주안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쿠단만이 목욕을 거부하였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끌려갔다.
그렇게 돌아와 온종일 잠을 자고, 깨어난 뒤 그제야 주안은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주요 인물들과 실버론 하셀 자작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모았다.
위체니아와 아르베리아. 그리고 소니아와 이번에는 워랜을 대신해 솔 역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동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한 것에 한이라도 풀 듯 워랜은 온종일 잠만 자고 있었고, 이번에는 깨우기도 미안해서 주안도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었다.
실버론 하셀 자작과 함께 황실근위대 조장인 알튼 경도 조용히 자리에 앉자, 주안은 자신이 부른 이들이 모두 모인 것을 보고는 이들을 부른 이유를 설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위체니아가 조용히 주안에게 물었다.
“저기, 공자님.”
“예.”
“아까부터 꼭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다만, 말씀을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하십시오.”
사뭇 진지한 그녀의 표정은, 혹 주안이 자리를 비운 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안을 보다, 시선을 주안의 머리 위로 향하며 말했다.
“……머리 위에 있는 저 작은 생명체들은 뭔가요.”
위체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으로 주안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세 꼬맹이 요정을 가리켰다.
이런 반응은 위체니아뿐만이 아니라 세냐와 마냐, 아냐를 처음 본 이들 모두가 비슷했다.
이들의 모습에 주안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것은 설명해 드릴 수 없지만, 대밀림에서 좋은 인연을 맺은 아이들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자세한 건, 황도로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주안이 그렇게 말을 하니, 일행들은 더 이상 묻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힐끗거리며 하품을 하는 세냐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보는 마냐, 여전히 부끄러운 두 언니 틈에 숨어 있는 아냐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기는 사실 좀 힘들었다.
주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을 먼저 꺼내었다.
“일단 저희는 며칠 내로 아스란 왕국의 왕도를 떠나,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이미 예견된 일이라 다들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주안에게 위체니아가 말했다.
“황도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일단 아스란 왕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두 아시는 듯했습니다. 아무래도 돌아갔던 남부 귀족들이 연락한 듯합니다, 공자님.”
“늦든 빠르든 일어날 일이긴 하였습니다. 어쨌든 큰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니 걱정은 하실 필요가…….”
하지만 이내 말을 멈춘 주안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위체니아에게 물었다.
“호, 혹시 저희 어머니도 다 아시는 것입니까?”
주안이 잔뜩 겁을 먹은 채 그렇게 말하자, 한숨을 쉬는 이들과 웃음을 참는 이들이 함께 주안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는 인물은 대표적으로 위체니아였고, 웃음을 참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소니아였다.
“그건 아닌 듯했습니다. 일단 황성에서도 쉬쉬하는 분위기였고, 주레인 공작님의 성격상 절대 공작부인께 말을 하실 분이 아니시니까요.”
“으음, 다행이군요.”
어쩜 공작가의 남자들은 이토록 아내이자 어머니에게 붙잡혀 살며 두려움에 떠는 것인지, 위체니아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아내라는 분이 전 황녀라는 직책이 있긴 하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공작부인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예, 알고 있어요. 어차피 황도에 가면 다 들킬 일이니까요.”
침울해진 주안의 모습에 세 꼬맹이 요정이 머리를 토닥여 주며 위로하였고, 위체니아마저도 그런 주안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뻔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며 냉정하고 냉철한 모습을 유지한 채 주안에게 말했다.
“일단 동부와 서부에 나가 있는 이들을 이곳 왕도로 부른 뒤 함께 북부의 슬렌더 백작령의 메리다로 향하면 어떨까 합니다, 공자님.”
“으음, 그것보다 저희가 동부와 서부를 돌아 북부로 올라가는 게 훨씬 나을 듯해요.”
“네? 어째서…….”
“일단 전염병이 좀 잠잠해지긴 하였지만 가면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봐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신성력을 머금은 붕대도 잔뜩 만들어서 전해주는 게 좋겠다 싶거든요.”
주안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반대를 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주안은 자신의 이런 의사를 실버론 하셀 자작에게 물었다.
“괜찮겠지요, 실버론 자작님.”
“예, 그렇게 알고 일정과 경로를 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결정은 주안이 하지만 실버론 하셀 자작은 호위 총책임자였고 일정과 길을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의 병자들을 돌본 후, 저희가 할 일이 없다 싶으면 바로 돌아가도록 하죠.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이미 외교와 문화의 사절단 일은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제국이 이들을 적으로 보지 않고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반 정도는 성공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리고 주안의 이런 행동이 그렇게 만들어주고 있었기에, 주안의 말에 반대하는 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고개를 끄덕여 주며 동의해 주었다.
* * *
일정을 조율한 뒤 다들 주안의 방을 나섰고, 주안 역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 후 방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주안이 방을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유우나 공주와 마주쳤다.
그에 주안이 갸웃하며 물었다.
“유우나 공주님?”
“아, 주안 공자님.”
그녀의 곁에는 시녀들이 함께 있었지만, 풍신이 보이지 않는 게 조금 의아하였다.
“풍신 경은 어디 가셨나요?”
“그게, 워랜 경의 방에…….”
“…….”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유우나 공주의 그 모습과 말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워랜을 건드리지 않고 편히 쉬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풍신은 그게 아닌 듯했다.
“그런데 공주님은 여긴 어쩐 일로……?”
“그, 그게, 일어나셨다는 소리를 듣고 잠깐……. 그보다 공자님은 어디 가시는 길이셨어요?”
머뭇거리는 그 모습이 이상하긴 했지만, 물어보긴 조금 그렇기에 대신 그녀의 말에 답해주었다.
“전하에게 부탁을 좀 드리러 가던 길이였습니다.”
“아버님에게요? 어떤 부탁을…….”
“별것은 아닙니다. 왕성에 있는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조금 읽어보았으면 싶어서요.”
“아, 혹시 왕성 도서관의 출입을 부탁하시려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우나 공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출입 허가는 제가 해드려도 괜찮거든요.”
“예? 정말요?”
“이래 보여도 왕성의 전반적인 관리는 제가 다 했었어요.”
“호오…….”
정말 똑 부러지는 공주님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왕성이지만, 나중에는 나라 하나를 관리하셨으니…… 벌써부터 그런 기질이 보이는 듯했다.
“그럼 부탁 좀 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공자님.”
“아, 예.”
주안은 살갑게 구는 유우나 공주의 행동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하지만 번거로움이 줄어들었기에 그러려니 하며 유우나 공주의 안내에 따라 왕성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