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90화
갈 때 보다 올 때의 인원이 더 많았지만, 배의 무게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세냐와 마냐, 그리고 아냐는 다른 사람들에겐 크게 관심이 없다는 듯 주안의 머리 위, 어깨 위, 손바닥 위에 자리를 잡고 매우 편하게 있었다.
주안은 굉장히 불편했지만,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미엘이 주안을 위해서 보내준 아이들이었고, 이 아이들의 도움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밖으로 나가도 되는 거야?”
“훗훗훗, 우리는 아미엘 님을 따르지, 크세니아 도마뱀 할아버지를 따르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다 혼나는 거 아냐?”
주안도 드래곤을 좀 신기한 동물 정도로 생각을 하였지만, 그들의 능력을 아미엘의 입을 통해 들은 후로는 그런 생각은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세냐는 매우 당당해 보였고, 주안의 머리 위에 앉아 발만 까닥이며 히죽 웃어주기까지 하였다.
이런 주안의 걱정에 마냐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장난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헷~ 이미 없어진 할아버지보다 아미엘 님이 훨씬 무서우니까 상관없지롱~”
“흐응……. 그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전히 걱정스럽긴 했지만, 세 꼬맹이는 나들이인지 소풍인지, 어쨌든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에 매우 들뜬 듯했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해도, 그녀는 주안을 크게 믿고 있는 듯했다.
‘아미엘 님에게 마를렌 님은 어떤 의미인 걸까.’
주안이 단지, 그녀가 생각하는 이종족의 피가 섞인 후손이라는 것만으로 이런 신뢰를 주었을 리가 없었다.
엘 하임 마를렌.
주안의 가문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시조, 힉스 마르티네스의 아내인 마를렌 마르티네스를 그녀로 생각하고 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을까.
특히 주안에게 있는, 요정의 땅과 이어진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열쇠와 엘프에게 내려졌던 자애의 성흔도 한몫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도 그 크세니아라는 드래곤을 만나봤던 거야?”
“응!”
마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그 말에 주안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드래곤이라는 것도, 환상의 동물이고 전설로 내려오는 건데…… 못해도 수천 년 전의 일이야. 그런데도 너희가 보고, 기억하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이런 주안의 의문에 세냐가 주안의 머리 위에서 내려와 아냐와 마찬가지로 주안의 손바닥 위에 앉으며 말했다.
“딱히 이상할 것도 없어요. 이곳과 요정의 땅은 시간이 좀 많이 다르니까요.”
“시간이 달라?”
“요정의 땅에서 하루가 이곳의 1년이 될 때도 있고, 10년이 될 때도 있고, 아주 제멋대로거든요. 지금이야 문이 열리고 길이 연결되어서 이곳 시간이랑 똑같이 흘러가지만.”
“그래?”
그제야 주안도 아미엘이 이곳의 시간대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못 하는 게 이해가 되었다.
“너희도 참 고생이긴 했겠구나.”
“어휴, 말도 마시라니까요. 소풍 가기로 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여기 오니 같이 놀던 엘프들은 하나도 없지, 뚱한 드워프 할아버지들도 없지, 있는 건 재미없는 오크 아저씨들뿐이라니.”
“우……. 마냐는 세렌다가 파이 만들어준다고 했었는데.”
“아, 아냐도 과일 나무에 물 주기로 약속했었어요.”
듣는 오크 아주머니, 아니, 메데아 대족장이 언짢아했지만, 세냐만이 아니라 마냐와 아냐도 작게 투덜거렸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는데, 슬프진 않아?”
“어쩔 수 있나요. 세상이 그런 건데. 다 잊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은 현실을 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잖아요.”
“……완전 어른이네.”
세냐의 그 말에 주안도 놀랐지만, 다른 두 꼬맹이는 그런 언니야인 세냐를 우러러보며 눈을 반짝였다.
“어쨌든 아미엘 님의 말에 따라 저희는 오빠 돕는 것에 최선을 다할 거예요. 짬짬이, 친구들도 찾아보고. 어차피 오빠도 그럴 거잖아요.”
“그런데 헤어진 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 지금쯤이면…….”
“어머, 모르는 말씀. 엘프들은 수명이 길다고요. 지금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겠지만.”
“……옛날 친구들 만나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걸 추천할게.”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진짜 만나서 한다는 말이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면 절교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주안의 쓸데없는 걱정에 세냐가 쿠후후 하고 장난 가득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엘프의 수명이 그렇게 길다면…….’
혹시, 세냐의 말대로 여전히 남아 있는 엘프들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달란트 부족만 봐도, 대를 이어 이곳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보다 오랜 삶을 사는 엘프라면 이곳을 떠나 어딘가에 정착하여 자신들만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단지 그들이 왜 떠났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말이다.
* * *
호숫가에 배를 대고 내리자, 기다리고 있었던 원주민들이 메데아 대족장과 주안 일행들을 맞이해 주었다.
그들도 조금은 걱정이 된 듯했고, 메데아 대족장은 파나르와 다른 주요 인물들과 몇 마디를 나누는 듯했지만, 아미엘과 한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지는 않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녀도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주안이 기지개를 쭈욱 켠 후 곁에 있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저희도 내일 아침에 출발할 준비를 하죠.”
“벌써 말입니까?”
주안의 말에 아르베리아가 너무 빠른 출발에 갸웃하며 물었다.
“이곳에서 할 일은 다 한 듯해요. 뭐, 집에 가서 알아볼 일이 더 많이 생긴 듯하지만 말이죠.”
주안이 이곳에 온 이유도 이 성흔에 대한 비밀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호기심 때문이었고 그런 호기심과 비밀은 어느 정도 풀어낸 듯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의문만 잔뜩 생겨 버린 탓인지 조금 빠르게 움직여야만 하였다.
집인 황도로 돌아간다 해도, 상황을 봐서 마르티네스 공작령의 근거지인 마를렌에 들러야만 하였고, 그곳에서 마를렌 마르티네스의 기록도 살펴보며 아미엘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아, 일단 이종족에 관한 이야기는 비밀로 해주세요. 아무래도 이건 당장 밝히기가 좀 힘들 듯하네요.”
역사학자들이라면 크게 반길 일이긴 하였지만, 괜히 이런 일을 밝혔다가는 대륙의 눈이 다시 대밀림으로 집중될 게 뻔했다.
그것은 달란트 부족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며, 아미엘 역시 대륙의 눈이 이곳에 집중되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과거의 인간들과 현재의 인간들이 다르다는 것과 이종족에 관한 부분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은 아미엘도 안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필요 이상의 탐욕을 매우 경계하였다.
주안 역시 그 부분을 알기에 쓸데없는 소문이 나지 않았으면 하였다.
이런 주안의 말뜻을 이해한 듯 아르베리아나 워랜, 토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누엘 신관님도 부탁드릴게요. 일단, 커즈 신관님에게도 비밀을 지켜주세요.”
함께 가지 못한 커즈 신관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커즈 신관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이 일에 관해서 알지 못하는 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 * *
정해진 숙소로 돌아온 주안 일행은 내일 아침 바로 떠나야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하였다.
오자마자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빨리 끝난 것에 달가워하였고, 짧지만 원주민들을 만나 그들과 대결을 벌인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을 하였다.
대신 주안은 메데아 족장을 만나 이 일에 대해서 먼저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에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거처로 향하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세 요정 꼬맹이들이 자연스럽게 주안의 머리 위로 날아와 앉았다.
크게 무겁지 않고 불편하지도 않기에 이런 세 요정 꼬맹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주안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멀지 않은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메데아 대족장님?”
멀지 않은 곳에서 메데아 대족장이 주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주안은 잠시 갸웃했지만, 메데아 대족장이 향하는 곳이 자신이 있는 장소라는 것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주었고, 주안의 인사에 메데아 대족장 역시 고개만 까닥여 인사를 해주었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도 하지 않던 인사인지라,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이걸 봤다면 화를 냈을 게 분명했다.
왠지 그게 상상이 되어서 그런지 주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주안이 왜 그러는지 몰라 메데아 대족장이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주안에게 말했다.
“쿠단에게 들었다. 내일 바로 돌아간다고?”
“예,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방문해서 내일 간다고 하니, 메데아 대족장도 조금은 아쉬운 듯했다.
하지만 함께 있었고, 아미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그녀도 알기에 주안을 붙잡거나 말릴 수는 없어 보였다.
손님으로서 왔다면 손님으로서 대접을 충분히 해주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바쁘다는 게 매우 아쉬웠다.
“그래도 집에 가서는 가끔 이곳에 올 수 있을 거 같으니, 다음에는 좀 더 오래 있다 갈게요. 그렇게 할 수 있지?”
주안이 세냐와 마냐, 그리고 아냐에게 미소를 지으며 묻자 세 꼬맹이 요정들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문을 만드는 건 이 세냐의 전문!”
“길을 만드는 건 이 마냐의 전문!”
“안내를 하는 건 이 아냐의 전문…….”
앞의 두 꼬맹이와는 달리 부끄러움 많은 아냐의 행동과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래도 두 언니를 따라 하는 것이 매우 보기 좋았다.
주안은 그런 세 요정 꼬맹이의 행동에 웃음을 흘리며 메데아 대족장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하네요.”
“킁.”
세 요정 꼬맹이들의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메데아 대족장이 콧방귀를 뀌자, 그 바람이 꽤나 강했던 것인지 세냐와 마냐, 아냐가 주안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날아가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일단 그런 요정 꼬맹이들을 손으로 붙잡아준 후 주안이 메데아 대족장에게 말했다.
“요정들이, 아미엘 님이 여전히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 거예요?”
“그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갑자기 나타나 세계수의 관리자가 어떻고, 이종족이 어떻고, 그런 말을 한다 해도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회의는 어떻게 되셨어요? 혹시, 거부하신다거나…….”
아무리 손님이라 해도 원주민들의 회의에 참석할 수는 없었던 주안이었기에 그 결과는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큰 문제가 되겠지만, 사실 주안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메데아 대족장은 그 지위만큼이나 강하면서도 생각이 깊은 이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넓은 대밀림과 그곳에 퍼져 있는 수많은 부족민의 정점에 올라 그들을 통솔할 수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일단 지켜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모였다. 아미엘이라는 그 요정의 여왕은 우리가 모르는 대족장 달란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하니…….”
크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기에 메데아 대족장이 나서서 그들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했다.
무엇보다 부족의 근간인 달란트 대족장에 대해서 잘 안다는 아미엘로 인해서 여타 다른 이들도 쉽게 메데아 대족장의 말을 따른 게 아닐까 싶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이종족의 이야기도 하셨어요?”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우리는 이종족이든 오크든 그런 것이 아닌 긍지 있는 달란트 부족이라는 것을 다들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예, 알고 있어요. 이종족이 어떻든, 오크가 뭐든…… 그 겉모습이 아니라 긍지를 가지고 명예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거면 되는 거죠.”
“흠…….”
사실 주안 역시 자신의 피에 이종족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납득하고 아직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달란트 부족 그 자체가 이종족, 오크들이라는 말을 들은 메데아 대족장의 기분은 더욱 좋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아쉽긴 하구나, 작은 손님. 제대로 된 손님으로서의 환영 인사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환영보다 좋은 선물을 잔뜩 받아 가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주세요.”
“좋은 선물?”
주안의 말에 메데아 대족장이 갸웃했지만, 주안이 히죽 웃으며 왼손바닥을 펼쳐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알 수 있었고, 제 일행들도 이곳 분들과의 대결로 많은 경험도 하였고…… 특별한 지식도 잔뜩 가지고 가잖아요. 물질적인 선물보다 더 큰 보이지 않는 선물이 잔뜩인걸요.”
“흠…… 한마디로 마음의 풍요로군.”
그것을 이해하는 메데아 대족장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내일 떠날 때 하고 싶었던 말이지만 지금 해주도록 하마, 작은 손님.”
“예?”
메데아 대족장이 손을 뻗어 주안의 머리 위에 올리자, 세 요정 꼬맹이들이 황급히 날아올라 그 손길을 피했다.
“너 역시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다. 우리에게 대족장 달란트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
메데아 대족장이 히죽 웃으며 주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언제든 찾아와도 두 팔을 벌려 손님이자 친우로서 너와 너의 가족들을 기쁘게 맞이해 주마.”
“메데아 대족장님…….”
친우라는 그 말에 주안이 적잖이 놀랐다.
그들에게 달란트란 정말 정신적 지주 그 이상이자 부족의 뿌리였고 근간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요정족의 여왕 아미엘이 이 땅을 방문하게 해주었으니, 달란트 부족에겐 이보다 더 큰 선물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주안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역시, 아니,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 역시 달란트 부족의 여러분들을 좋은 손님이자 친우로서 생각하도록 할게요. 찾아오신다면 저희 역시 두 팔을 벌려 달란트 부족을 맞이해 드릴게요.”
“쿠후후, 우리가 찾아가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이래 보여도 저희 가문의 위세가 꽤 대단해서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대면 아무도 건들지 못할 거거든요.”
“호오, 그게 바깥 주민들의 나쁜 권력이라는 것이군.”
“가끔 써먹으면 편해서 좋거든요.”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주안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주안은 진심으로 손님으로 대접을 받은 만큼, 이들 역시 마르티네스의 손님으로 대접해 주고 싶었다.
“그래, 그땐 잘 부탁한다.”
메데아 대족장은 반쯤 농담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