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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마마보이-89화 (89/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89화

“마를렌은, 아니, 마를렌 마르티네스 님은 저희…… 시조 어르신의 아내이셨습니다.”

주안의 말에 워랜이나 아르베리아, 그리고 토미도 그제야 그 이름을 떠올린 듯했다.

하지만 주안은 아미엘의 말을 전적으로 모두 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그분이 아미엘 님이 말씀하시는 엘 하임 마를렌이라는 분과 동일 인물인지는…….”

“동일인이 맞을 것이다.”

“예? 어째서…….”

주안의 의문에 아미엘이 당당하게 말했다.

“너의 얼굴, 너의 눈동자, 너의 머리카락, 너의 냄새까지……. 어디 하나 엘 하임 마를렌과 다른 부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월이 얼마가 흘렀건, 그 아이를 나는 잊지 않았다. 너는 그 아이의 아이임이 확실하다.”

“겨우 그런 걸로…….”

당당한 그녀의 말과 미소를 짓는 그 행동에 주안이 어이없어하였지만, 이토록 당당하니 뭐라 할 말도 없어진다.

“겨우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너에게 남겨진 그 열쇠는 그 아이가 아니라면 쓸 수도 없을뿐더러 자애의 성흔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성흔이라는 말에 주안이 조용히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이곳에 온 후로 성흔이 제멋대로 빛나기 시작했고, 지금 역시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돼요.”

“무엇이 말이더냐.”

“아미엘 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이종족, 그들은 인간을 증오해야 마땅해요.”

“그래,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말에 이곳에 있는 인간들, 그리고 오크라고 불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메데아 대족장마저 복잡한 심경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하지만 저희 시조 어르신은 마를렌 님을, 이런 말씀을 드리기 죄송하지만…… 공처가라 불릴 정도로 사랑하셨고, 사이가 매우 좋으셨다 들었어요.”

“나 역시 그 부분이 의문이니라. 그 아이는 모두에게 자상하였으나, 인간을 사랑하던 아이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괜히 대륙 동부 최대의 도시에 아내의 이름을 붙인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선조 중에서도 유독 시조인 힉스 마르티네스의 일화를 많이 듣고 자란 마르티네스 가문의 아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는지, 또한 아내였던 마를렌 역시 남편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모두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미엘이 말하던 이종족이었다면, 그리고 그게 엘프였다면 과연 그랬을까 싶었다.

이런 주안의 여전한 의심에 불쾌감을 드러내기보단 어른으로서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아미엘이 주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여 그 아이에 대한 것이 남아 있느냐? 인간은, 많은 것을 기록하고 남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역시 대혼란인지 암흑기인지의 일로 소실된 것이더냐.”

“아니, 그건 아니에요. 시조 어르신 때부터 쓰인 많은 자료가 마를렌 공작성에 보관되어 있어요.”

대혼란기를 한참 지나 탄생한 것이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이었기에 공작 가문의 역사나 선대 가주들, 그리고 영지의 일 등등 여러 가지 역사가 담긴 내용의 자료들이 방대하게 남아 있었다.

역사가 깊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대대로 가주들의 일생을 담은 것을 남겨두었고, 아주 사소한 버릇까지 저장해 두었다.

‘나도, 거기에 실려 있었을까.’

이전 삶 속에서 주안이 행한 일들을 기록하고 남겨져 있었을지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대대로 집사가 된 이들이 이 역할을 수행했지만, 주안은 심심하면 그 집사를 갈아 치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고용인들은 내보냈으며 밖으로 돌아다니기만 하였으니, 제대로 된 게 남아 있었을 리가 없었다.

“마를렌 공작성?”

아미엘이 주안의 말에 갸웃하자, 주안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시조 어르신이 마를렌 님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근거지인 도시 이름 자체를 마를렌으로 명명하셨거든요.”

“팔불출이로고.”

“…….”

아미엘의 말에 주안도 고개를 끄덕였고, 동부 사람과 동부 사람이 아닌 이들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알던 나의 역사와 네가 아는 너의 역사에는 크나큰 공백이 있다. 그에 대한 답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나는 마를렌에 대해서 좀 더 많은 부분을 알아야만 하느니라.”

그 공백의 시간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게 밝혀지지 않는 이상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에는, 네가 엘 하임의 피를 이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이곳에 지내던 다른 두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도 있다.”

“드워프와 엘프…… 말씀이시죠?”

“엘프는 엘 하임 마를렌을 따르던 이들. 하나 너의 이야기 속 어디에도 그 아이를 따르던 엘프는 없으니, 사라진 그 아이들의 비밀은 결국 마를렌이 가지고 있을 터.”

“……그런 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분은 이종족이 아닌 인간으로서 저희 가문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으시니까요.”

주안 역시 이런 이야기를 듣고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가문의 중요한 일이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겨지지 않은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칸데는 그 흔적이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구나. 마를렌은 너를 통해 조금이라도 알아볼 수 있다만…….”

엘프는 엘 하임 마를렌의 피를 이은 주안이라는 증거가 있고,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드워프 칸데는 그러한 접점마저도 없었다.

그 부분이 매우 걱정스럽고 안타깝기에 아미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무엇이 되었든, 얼마나 세월이 흘렀든, 그녀는 이곳에서 이종족들을 보호해 주기로 약속을 한 것.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고, 그녀가 이곳에 다시 발을 디딘 이유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나 역시 이곳에서 나의 아이들을 통해 알아볼 터이다만,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몸. 해서 너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저와 가문에 위해가 되지 않는 부탁이라면, 힘이 닿는 한 도움을 드리도록 할게요.”

주안의 말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 어둡던 아미엘의 표정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네게 전해진 열쇠는 성흔과 합쳐져 있다. 성흔의 빛이 꺼진다면, 문은 다시 닫히게 될 터. 해서 너에게 주기적으로 이곳으로 와서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해주기를 부탁하고 싶구나.”

“그건, 조금 힘들어요. 저는 이곳에 계속 머물 수도 없고, 곧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

“먼 곳이더냐.”

“예, 아주 멉니다. 오가는 데 몇 달이나 걸리는 장소입니다.”

“흠…….”

황도와 아스란 왕국의 거리를 넘어 대밀림 안까지 들어와야 하는 그 거리는 거의 대륙의 절반을 관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거리도 거리이지만 주안은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몸, 스스로의 힘으로 집과 황도를 벗어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해한 듯, 아미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세 요정을 불렀다.

“세냐, 마냐, 아냐.”

그녀의 말에 세 요정이 아미엘의 앞으로 내려왔다.

그런 세 요정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짓던 아미엘이 주안에게 말했다.

“네가 지내는 곳에 이곳으로 올 수 있는 길과 문을 만들어주도록 하마.”

“예? 길과 문이요?”

주안이 갸웃하자 아미엘의 말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인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경악을 하며 말했다.

“설마, 워프 게이트를 말하는 것이오?”

“그러하다.”

“허, 허허…….”

워프 게이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주안이 갸웃했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한편으로는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들이 알면 목숨을 걸고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침범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구려.”

“그 문을 열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네 힘으로만 가능할 터. 시간이 날 때, 혹은 나의 연락이 있을 때 잠깐 방문해 주길 바란다.”

“그런 것이라면…….”

“이 아이들이 이곳과 연결되는 문과 길을 만들어줄 것이니, 설치가 된다면 이 아이들을 다시 이곳으로 보내면 된다.”

“으음…….”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자랑스러워하는 세냐와 마냐의 모습에 주안은 심히 불안했다.

그래도 귀여운 아냐만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해 주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라진 두 아이와 마를렌에 대한 조사다.”

“그 부분은 저 역시 궁금한 점이 많으니,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마누엘 신관님에게도 부탁하셔야 해요.”

“흐음? 어이해서?”

“이 성흔은 저만이 아니라, 교단의 성녀에게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 때문에 마누엘 신관님의 힘을 빌린다면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인간에게 부탁하는 것은 여전히 꺼림칙해하는 아미엘이었지만, 그 말에는 조금 놀란 듯했다.

“성흔이, 인간의 교단에도 있단 말이더냐.”

“예.”

“……성흔은 분명 이종족인 오크와 드워프, 엘프에게만 내려준 것일 터인데…….”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고, 현재의 세상에는 아미엘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사라진 그 긴 시간에 대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한 듯, 아미엘이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말했다.

“그대는 적어도 인간이기 이전에 신을 믿고 그분의 힘을 사용하는 자이다. 나에게 거짓 없이, 사실 그대로 알아낸 것을 말해줄 수 있겠느냐.”

“사람을 너무 불신하지 마시구려. 당신이 살던 그 시대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소.”

조금 언짢아하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었지만, 그녀의 그 행동을 이해하였기에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화를 내진 않았다.

아미엘이 그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바라보다, 주안과 그 곁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흐른 것은 맞는 듯, 인간들이 이종족을 보는 눈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잊어버린 듯했지만, 여전히 그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만이 무언가 잘못된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또 믿어준다는 것은 힘들다.

그래도…….

“너는 이 어린 신자를 믿느냐.”

그녀는 주안에게 그렇게 물었고, 어린 신자라는 말에 주안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니, 이미 워랜은 배를 붙잡고 웃고 있었고, 토미나 아르베리아는 입을 막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단지 메데아 대족장만이 콧방귀를 끼고, 늙은이를 아이로 빗댄 그 말을 비웃을 뿐이었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던 주안이 움찔 놀라 웃음을 멈추며 작게 헛기침을 내뱉은 후 아미엘에게 말했다.

“믿어요. 적어도 마누엘 신관님은 외부인이라면 배척받는 이곳에서 손님이 되셨을 정도로, 다름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고 함께하셨던 분이시니까요.”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곳을 오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고, 손님으로 인정을 받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메데아 대족장이나 다른 원주민들 모두가 마누엘 대신관을 대하는 태도는 손님이라기보단 조금 먼 친척, 그리고 가족 같았다.

이런 주안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아미엘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다, 그대에게도 부탁하지. 그대의 교단에 있다는 성흔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구려. 뭐, 이쪽도 관심이 가는 부분이니 알아봐 드리리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조금 못마땅해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미엘의 말에 수락을 해주었다.

“그보다 아미엘 님은 계속 이곳에서 지내실 생각이시죠?”

“그러하다. 이곳은 내가 지켜야 할 땅, 다시 그 약속을 지키고…… 사라진 그 아이들의 행방을 알아보아야 한다.”

“마치, 달란트 부족 같으시네요.”

주안의 말에 아미엘이 조심스레 메데아 대족장에게 말했다.

“메데아라고 하였느냐.”

“그렇다.”

“자신들이 무엇인지도 잊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을 꿋꿋하게 지켜낸 그 노고를 치하한다. 달란트, 그 아이의 자손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마.”

“킁…….”

아미엘이 메데아 대족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자, 요정 꼬맹이 삼총사, 세냐와 마냐, 그리고 아냐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에 메데아 대족장도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인지, 그저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조금 낯간지러운 부끄러움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것을 숨기려는 듯 오히려 더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여전히 우리가, 우리 부족이 오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다. 달란트의 의지를 잇고 그분의 유언에 따라 이곳을 지키고 친구들을 기다리는, 대밀림의 주인이다.”

“그래, 너희는 그 아이의 의지가 제대로 이어져 있구나. 시간은 많으니, 달란트에 대해 천천히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도록 하마.”

빙긋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미엘은 이 방에 있는 이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눈에 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세대가 변했지만, 그 자리를 지켜주던 이들과 먼 시간을 넘어 찾아온 소중한 이의 후손과…… 증오스럽던 인간의 가족이라는 이들까지 함께였다.

공허한 공백의 시간이 너무나 컸지만, 조금씩 그 간격을 채워 나가야 할 때였다.

지금은 이렇게 자신이 모르는 뒤틀린 이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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