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87화
“세계수의 관리자…….”
주안은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아미엘의 말이 납득이 되었다.
모두 할 말일 잃은 채 그저 멍하니 아미엘과 요정들을 바라볼 때, 아미엘이 주안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느니라, 엘 하임의 아이여.”
“엘 하임?”
생소한 이름이었고, 피를 이어받았다는 그 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 선조 중에 그런 이름이 있나 싶었지만, 떠오르는 이름은 전혀 없었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가문이긴 하여도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가문이 아닌 것이 바로 마르티네스였다.
아이가 귀한 탓에 마땅히 가문을 벗어나 가정을 꾸리고 방계가 된 이도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선대의 이름을 나열한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주안으로선 그 모든 것을 기억하기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주안의 멍청함에도 비정상적으로 좋게 만들어줄 마법 팔찌는 여전히 제 기능을 하였다.
그럼에도 아무리 찾아보아도 엘 하임이라는 이름은 가문의 가계도나 주안이 읽은 책 속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주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갸웃하자, 작게 한숨을 내쉰 아미엘이 뭐라 다시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보다 메데아 대족장이 그녀에게 먼저 소리쳤다.
“어머니의 나무를 지켜온 것은 우리, 달란트의 부족이다! 그대야말로 누구이기에 어머니의 나무를 관리한다는 것이냐!”
“어린 오크여. 나 역시 지금의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럽구나. 그보다 달란트는 어디에 있는 것이더냐. 어이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더냐.”
“오크가 아니다! 나는 위대한 달란트 부족의 대족장, 메데아다!”
“달란트, 부족?”
“그렇다! 위대한 대족장, 달란트의 이름을 물려받은 긍지 높은 부족이자, 이 땅과 어머니의 나무를 지킨다! 우리의 사명! 우리의 긍지! 너야말로 대체 누구냐!”
메데아 대족장은 진심이라는 듯, 주안과 단둘이 함께 왔을 땐 가지고 오지 않았던 자신의 무기인 거대한 도끼를 들고 아미엘에게 겨누었다.
그 흉흉한 기세에도 아미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고, 단지 그녀의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요정들이 메데아 대족장을 경계하였다.
하지만 아미엘이 손을 들어 요정들의 행동을 멈추며 말했다.
“달란트의 아이가 맞구나.”
아미엘이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문이 닫힌 후, 대체 이곳의 시간은 얼마나 흐른 것인지…….”
“지금은 대화를 하러 온 것이지만, 적대를 할 수도 있다. 어머니의 나무에 있는 이유를 대라. 우리 부족의 땅에 나타난 이유를 설명하라!”
메데아 대족장의 그 기세는 주안 일행에게 향하게 하지 않았음에도 느껴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그 기세에 오싹해질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미엘의 평온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주안 일행에게 물었다.
“자리를 옮기지 않겠느냐. 나 역시 대화를 원하였기에 저 아이를 초대한 것. 어린 오크여, 그대 역시 나의 초대를 받을 자격이 있구나.”
“어린 오크가 아니다…….”
“정정하도록 하마, 달란트의 아이여.”
“…….”
겉으로 보면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외모이지만, 그 말투는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투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게 아이러니했고, 그 분위기마저 잘 어울렸다.
투명한 녹색의 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오랜 세월 속에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담아낸 듯했다.
그 때문인지 메데아 대족장도 뭐라 하지 못 하였다.
그리고 아미엘이 메데아 대족장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주안을 보며 말했다.
“엘 하임의 아이여, 네 곁에 있는 인간들은 너의 손님인 것이냐.”
“제 가족들입니다.”
“가족……. 인간이, 가족이라…….”
주안의 말에 아미엘이 처음으로 표정이 변하였다.
감정이 그래도 드러날 정도로 복잡함이 전해져 왔다.
“인간의 피와 엘 하임의 피가 섞인 것도 모자라, 인간과 가족이 되었다니. 세상이 어이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듯하구나.”
한탄인지, 아미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타깝다는 듯 주안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아미엘이 작은 손을 뻗어 손바닥을 펼치며 주안 일행을 가리켰다.
“집으로 안내하마. 경계하지 말라, 어린 오크여. 그리고 어린 인간들이여.”
“……이 나이에 어리다는 소리를 들으니 참으로 새롭구려.”
메데아 대족장도 적지 않은 나이이긴 하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곧 백 세의 나이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미엘에겐 한참이나 어린 것인지, 공평하게 어린아이로 통하는 듯했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말에 따라 메데아 대족장도, 그리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도 당장 뛰어들어 갈 기세를 풀었다.
하지만 경계 자체는 여전히 하는 듯, 무언가 잘못된 행동이라도 한다면 그대로 뛰쳐나갈 기세다.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아니라 워랜 역시 마찬가지였고, 아르베리아와 토미는 주안을 지키듯 곁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에 아미엘의 쌀쌀맞아 보이던 무표정함이 풀리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인간과 함께라니……. 엘 하임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언짢아하는 듯한 말임에도 주안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들의 눈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아미엘의 손에서 기하학적인 문양이 생겨나더니, 호수의 수면 아래에 똑같은 것이 생겨나며 떠올랐다.
주안 일행이 타고 있는 배를 감싸고 떠오른 그것에 놀랐지만, 별다른 큰 위협이나 살의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메데아 대족장과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침묵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잠시 뒤, 배와 주안 일행들을 감싸며 떠오른 마법진이 사라지자, 주안 일행들의 모습도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주안 일행만이 아닌, 아미엘의 모습 역시 사라진 뒤였다.
* * *
“으엑?!”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주안의 몸을 때렸지만, 다행히 아르베리아와 토미가 주안의 몸을 감싸주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큰 충격도 아니었기에 상처가 날 일도 없었다.
그저 조금 놀랐을 뿐이니 말이다.
“……여긴?”
작게 숨을 몰아쉬던 주안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열쇠 아저씨~!”
갑작스레 들린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와 부우웅~ 하는 엄청난 날갯짓 소리, 그리고 자신에게 돌진하는 검은 그림자에 주안이 갸웃하였다.
“웬 열쇠 아저…… 크억?!”
“도련님?!”
작은 요정 꼬맹이의 기습적인 돌진에 배를 가격당한 주안이 거친 기침을 토해내자, 곁에 있던 토미가 화들짝 놀라 배를 감싸고 있는 주안을 부축해 주었다.
“쿠후후! 이 정도 기습에 당하다니. 역시 엘 하임의 엘프와는 완전히 다르잖아.”
“괘, 괘, 괜찮으세요?”
그리고 뒤이어 세냐가 주안의 머리 위에 내려앉으며 버릇없는 꼬맹이처럼 웃었고, 그나마 아냐만이 주안의 얼굴 근처로 날아와 걱정스러워하며 주안을 살폈다.
“이것들은 뭐야?”
“꺅?! 이거 놔! 변태!”
“앗?! 언니야를 놔 줘!”
“후에엣!”
워랜이 세냐의 날개를 붙잡고 들어 올리자, 하늘하늘한 치맛단을 붙잡고 세냐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워랜의 행동에 깜짝 놀란 마냐가 워랜에게 달려들었고, 아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현재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하였다.
일단 그쪽은 내버려 둔 채 토미의 부축을 받으며 마냐가 들이받은 배를 매만진 주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 그, 그보다 여긴 어디예요?”
“글쎄 모르겠구나. 어디, 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분명 호수의 위였는데, 지금 있는 장소는 큰 방의 안이었다.
메데아 대족장이 인상을 쓰며 주변을 경계하였지만, 주안이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계수의 보금자리 안이니라.”
이런 일행들에게 언제 온 것인지 아미엘이 허공에서 조심스레 내려오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등장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주안이 갸웃하며 물었다.
“예? 세계수의 보금자리?”
“원래 엘 하임의 엘프들이 지내던 집이긴 하나, 이곳은 나에게 허락된 나의 집이니 편히 앉도록 하라.”
“앉다니, 어디를요.”
주변을 둘러보아도 딱히 앉을 만한 장소는 없었다.
하지만 아미엘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에서 테이블과 의자가 솟아오른 것만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는 나무로 된 찻잔과 찻주전자까지 나타났다.
“허…….”
그 신비로운 현상에 다들 놀란 듯했지만, 몸 쓰는 것에만 익숙한 이들이기에 말 그대로 좀 놀랐다뿐이다.
하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신관은 조금 달랐다.
그는 몸 쓰는 것만이 아니라 신관으로서의 능력에 더해서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 많은 곳을 떠돌며 보고 듣고 배우고, 다양한 것을 경험했다.
그런 그는 저 현상, 그리고 이곳으로 강제로 이동되어 온 능력에 놀람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미엘이라고 하셨소?”
“그러하다.”
“……그대는 혹 드래곤이 아닌지 의심스럽구려.”
“드래곤?!”
아미엘이 만들어준 자리에 앉으려던 주안과 다른 이들이 흠칫 놀라며 그녀를 바라본다.
전설이 되어버린 동물이긴 하나, 그런 전설을 남길 정도로 대단했던 생명체였고, 지금 이 현상을 생각하면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에 흠칫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이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더냐.”
“우리를 이곳으로 이동시켜 준 것은, 마법이라 생각되오. 아니오?”
“맞다.”
아미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조금은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미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헌 속에서도 잊힌 마법…… 워프라 생각되오만.”
“잊힌 마법?”
그 말에 오히려 아미엘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이상하구나. 마법을 훔쳐내 배우고, 그것을 가장 활용도 높게 사용한 것이 너희 인간들이거늘…….”
마법을 훔쳐냈다는 것은, 주안도 알고 있는 일이고 배웠던 것이다.
최초의 마법은 드래곤에게서 시작되어 엘프에게 전해진 뒤 인간들에게 퍼져 나갔다고 알려져 있고, 역사에도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많은 이가 그러한 사실을 잘 모르지만, 마법사들에겐 그것이 정설이었다.
물론 엘프를 거쳤나, 안 거쳤나로 논쟁이 있을지언정 마법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에는 이견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엘프가 실존한 것인지도 의견이 분분하니 말이다.
“나 역시 궁금한 것이 많구나. 너의 질문에 나의 질문…….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였으면 하는구나. 특히, 엘 하임의 아이가 어이해서 인간과 섞인 것인지…….”
아미엘이 주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엘 하임이 대체 뭐기에…….’
그녀가 자꾸 주안, 자신을 보며 엘 하임의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아미엘의 말에 따라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자리에 앉자, 주안과 다른 이들 역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주었다.
그리고 주안의 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리에 아미엘이 조용히 착석했다.
바로 곁에서 본 아미엘은 그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어린 소녀였다.
날개와 섞여 하나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길고 촉촉한 푸른 머리카락은 동방에서 귀히 여긴다는 비단과도 같아 보였고, 투명하고 맑은 초록빛 눈동자는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롭다.
희고 투명한 피부였지만, 발그레한 볼은 유일하게 그녀의 생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아냐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차분하게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소. 그대는 드래곤이오?”
“아니다. 나는 요정족의 여왕, 아미엘이니라.”
“하지만 우리에게 요정족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소.”
“…….”
그 말에 조용히 세냐가 따라준 차가 담긴 찻잔을 매만지며 아미엘이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이 조금 길었지만, 이내 그녀가 조용히 입을 뗐다.
“나는 지혜롭고 위대한 드래곤, 크세니아의 부탁을 받아 나의 아이들과 함께 세계수를 가꾸며 이 땅을 지킨다는 약속을 한 존재이다.”
“예? 이 땅을 지켜요? 혹시 마수로부터 지킨다는 것인가요?”
“마수라는 게 무엇이더냐.”
주안의 물음에 오히려 주안과 다른 이들이 놀란 눈치였다.
“마수를, 모르세요?”
“모른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밀림의 마수는 매우 유명했으며,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땅을, 대밀림을 지켰다는 이의 입에서 그 마수를 전혀 모른다는 말이 나오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주안이 물었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부터 이 땅을 지킨다는 말인가요.”
“그야 당연하지 않으냐.”
아미엘이 조용히 주안을, 아니, 주안의 곁에 있는 토미와 워랜, 아르베리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에는 스산한 살기가 일었고, 작은 소녀의 눈빛에 건장한 세 남자가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받아 사라져야 했을 인간들에게서, 나는 오크와 드워프. 엘프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