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80화
서로의 검과 검이 교차하고 공방이 길어짐에 따라 워랜과 라쿰바의 얼굴에는 피로와 몸에는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확실히 라쿰바는 서방의 말로 랭크 7에 오른 이가 맞았다.
하지만 그 역시 워랜과 마찬가지로 이제 막 랭크 7에 오른 수준 정도로 보였다.
실버론 하셀 자작과 비교하면 많이 떨어지고, 만약 풍신 경과 대결한다면 채 열 합이 되지 않아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워랜은 생각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된 서방의 기사와 이러한 결투를 하였다면, 그는 좀 더 쉽게 대결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워랜은 서방의 기사라고 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진짜, 힘 하나는 끝내주네!”
“너는 전사가 아니라 쥐새끼다!”
워랜이 라쿰바의 검을 흘려내며 피한 뒤 반격을 가하고, 라쿰바는 그런 워랜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지만 몸에 작은 자상이 남았다.
깊은 상처가 아니라 스쳐 지나간 것 정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라쿰바는 성난 멧돼지처럼 워랜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무작정 달려드는 게 아닌, 워랜의 움직임을 끝없이 파악하며, 언제 어디서든 반격과 추격을 위한 그 몸의 움직임은 워랜마저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그 엄청난 저돌성과 야생동물에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는 반응속도, 그리고 지치지 않는 체력이 워랜을 질리게 만든다.
확실히 말해서 실전 능력만 본다면 워랜은 라쿰바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 막 검기를 쓰는 단계에 올랐지만, 그렇다고 갑작스레 몸놀림이 이전과 다르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의 능력은 여전하고, 이제 조금씩 바뀌어가는 단계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워랜이 라쿰바를 제대로 상대하고, 오히려 우위를 보이는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워랜과의 상성이다.
분명 검기를 다루지 못하는 동방의 무사들은 서방의 기사와 검사들에게 매우 취약함을 보인다.
랭크가 오를수록 단단해지는 몸은 정말 치명적인 일격과 눈과 같은 단련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닌 이상, 평범한 검 따윈 맨몸으로 튕겨내거나 근육에 박혀 큰 상처를 주지 못한다.
그만큼 질기고 단단한 육체는 그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무기이자 방패였고, 무식하다고 평가를 받는 이유였다.
하지만 동방의 무사가 검기를 다루는 절정에 이르게 되면 이전까지의 상황이 완벽히 역전이 된다.
동방 무사의 잽싼 몸놀림과 빠르고 날카로운 검술로는 서방 기사의 무식한 몸을 뚫어내기가 매우 힘들지만, 모든 것을 잘라내는 명검, 검기를 얻은 무사들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은 동급의 실력을 갖춘 이들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육체만을 단련한, 단순하고 강한 힘의 검술은 단점이 되어 검기를 다루는 무사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검과 검을 맞댈 수는 있지만, 한 번만 실수해도, 그동안 단련한 몸은 의미가 없다는 듯, 한 번에 사지를 잘라 버리는 검기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크륵……! 큭……!”
비록 육체의 피로가 쌓인 워랜이었지만, 다행히 한때 서방의 기사 수련을 받았기에 체력이 아주 형편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라쿰바는 내상이 점차 쌓여갔고, 빈틈 속에서 찔러 들어오는 워랜의 검기가 실린 검에 상처가 늘어났다.
무식해 보이던 그 체력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하자, 라쿰바는 조금씩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가 생사를 가르는 고수들의 결투처럼, 라쿰바의 떨어진 체력과 흐트러진 집중력에 워랜은 그 빈틈을 제대로 잡은 듯했다.
워랜은 라쿰바가 휘두른 검을 피함과 동시에 그의 팔을 얕지만 검기가 실린 검으로 그어내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잡았……!”
워랜이 확실한 승리를 잡은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으로 검을 찔렀다.
“거기까지!”
하지만 갑작스레 등장한 검은 그림자는 맨손으로 워랜의 검을, 그것도 검기가 실린 그 검을 붙잡았다.
“뭐……?!”
“너의 승리다, 노밀의 워랜. 목숨까지 거둘 필요는 없다.”
메데아 대족장이 워랜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 온 것인지, 아무리 집중하였다고 하나, 그 움직임조차 파악하지 못한 듯 워랜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니, 그것은 구경하던 주안이나 아르베리아, 토미도 마찬가지였다.
마누엘 대신관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긴 하였지만, 아주 못 보지는 않는 듯했다.
워랜은 검이 붙잡힌 채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메데아 대족장도 워랜의 검에서 손을 떼었다.
“대단하군, 노밀의 워랜. 손이 저릿할 정도라니, 정말 대단한 실력이다.”
“그거 칭찬 맞습니까?”
“칭찬이다. 내 손을 아프게 한 외부인은 네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말 안 해도 알겠군요.”
워랜이 퉁명스레 답하자, 메데아 대족장이 즐거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듣고 있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라쿰바, 상대가 안 좋았구나.”
“……치욕스럽다, 대족장. 영감에게도 졌다. 이번에는 더 쉽게 졌다…….”
“상대가 안 좋았다고 말했다. 잽싼 녀석이었고 날카로웠다. 우리에게 그것은 약점이다. 알고 있지 않으냐?”
“킁…….”
“지금은 아니지만, 너도 언젠가 따라잡을 것이다.”
크고 강하고 단단한 마수라면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원주민들이지만, 작고 빠르고 잽싼 녀석들에겐 모두가 고생했다.
메데아 대족장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정정당당한 결투였고 싸움이었기에, 졌다는 것에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된 것이다.
그런 라쿰바를 다독이듯, 메데아 대족장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영감의 팔 정도는 부러뜨릴 수 있을 것이니 상심 마라.”
“아니, 이것들은 왜 모든 걸 날 기준으로 놓고 비교하는 거야?!”
그 말에 이젠 못 참겠다는 듯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검을 거둔 워랜이나, 시무룩한 라쿰바나, 그런 라쿰바를 다독이는 메데아 대족장도 그저 깔끔하게 무시해 줄 뿐이다.
그 모습에 마누엘 대신관이 구시렁거렸지만, 작게 웃음을 터뜨린 주안이 워랜에게 걸어가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워랜 경.”
“임무 완료. 어땠어? 주안 공자.”
“멋졌어요. 좀 더 멋지게 이기셨으면 진짜 형이라고 부를 뻔했다니까요.”
“아직은 모자라나 보네?”
“후훗, 좀 더 노력하시면 될 것 같네요.”
“……여기서 뭘 더 얼마나 노력하라는 것인지.”
노력이라는 단어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워랜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상쾌한 듯 주안의 말에 미소를 지어 주었다.
게다가 이런 워랜을 우러러보듯, 토미의 그 시선도 좋았고, 아르베리아의 놀란 눈은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것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이쪽은 매우 즐거운 분위기이긴 했지만, 주안은 살짝 걱정되어 원주민들 쪽으로 시선을 슬그머니 옮겼다.
혹시라도 그들이 분하여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달려들지 않을까, 솔직히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라쿰바 부족장! 부족의 수치다! 머리 박아라!”
“타탄 족장에게 다 이를 거다! 쿠하하하하!”
“근육이 아깝다! 먹은 고기 다 토해내라, 라쿰바!”
“시끄럽다, 이 자식들아!”
‘뭐야, 오히려 재미있어하잖아.’
주안의 그런 예상은 참으로 쓸데없다는 듯 원주민들은 라쿰바를 놀리기에 바빴다.
게다가 꽤나 유쾌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주안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 대결은 축제의 다른 한 부분이라도 되는 듯 그들도 매우 즐기고 있었다.
대밀림 바깥, 대륙에서도 이러한 대결과 결투는 하나의 이벤트였고, 축제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볼거리이기도 하였다.
‘결국 다 똑같구나.’
그저 사는 곳만 다르지, 이들도 바깥의 주민들과 별 차이가 없는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보다 라쿰바는 부족장이었어?’
원주민들의 직책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저들 대화를 보건대 다른 부족과는 달리 달란트 부족은 메데아 대족장 아래로 다른 족장과 부족장이 함께 있는 구조인 듯했다.
‘솔직히 메데아 대족장 같은 인물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라쿰바와 비슷한 이들은 많겠지…….’
대밀림을 지나쳐 오면서 바루 족장이나 소도 부족의 족장, 그 외의 부족들의 족장들을 봐왔지만, 그들은 하나 같이 모두 강자에 속하는 전사들이었다.
애초에 원주민들은 모두가 전사로서의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정점에 서는 자, 족장들은 라쿰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대체 몇이나 될까…….’
랭크 7의 기사와 검사들은 대륙 내에서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 라쿰바와 비슷한 이들이 족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라면, 그동안 대밀림 정벌이 되지 않은 건, 단지 대밀림의 위험성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원주민들의 실력에서 밀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들과 척을 지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우군으로 만들던가 아니면 작은 교류라도 하면서 인연을 쌓는 게 더 도움이 되겠어.’
정말 가능하다면, 그들과의 교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였다.
어차피 대륙의 이들은 더 이상 대밀림을 정복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직접 만나 보니 그들은 충분히 대화가 통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주안도 느꼈다.
‘일단 이 부분은 나중에 메데아 대족장과도 이야기를 나누어보는 게 낫겠지.’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외부인이 아니라 손님으로서, 그리고 동등한 입장으로서의 교류가 되었으면 했다.
주안이 곰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원주민들의 무리에서 낯이 익은 인물이 걸어 나오더니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라쿰바의 아들, 카사! 복수한다! 나와라, 외부인!”
카사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오며 자신의 도끼를 거칠게 휘두르다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가 도끼로 가리킨 이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지목된 대상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예?! 아니, 왜 나한테……?!”
아르베리아가 당황하며 소리쳤지만, 카사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아르베리아를 노려보며 재차 소리쳤다.
“저 외부인은 손님으로 인정한다! 아버지 졌다! 아버지의 존경, 많이 깎였다! 하지만 복수한다!”
뒤에 있는 그 아버지가 아들의 말에 침울해졌다는 것은 모르는 듯했다.
그 무시무시해 보이던 라쿰바가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어지게 만든다.
이건 비단 주안만의 생각이 아닌 듯, 곁을 지키던 메데아 대족장도 어깨를 토닥여 주고 비난과 장난 섞인 말을 하던 원주민들도 고기 많이 먹으라고 위로를 할 정도였다.
“으음…….”
카사의 위협적인 모습에 아르베리아가 침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런 아르베리아를 보며 워랜이 넌지시 한마디를 내뱉었다.
“쫄았지?”
“쪼, 쫄?! 그런 저급한 발언은 삼가라, 워랜 경! 기사로서, 새로운 단계에 오른 자로서 품위를 좀 보이란 말이다!”
워랜이 랭크 7에 오르든 말든 아르베리아의 반응은 그래도 한결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피할 이유는 없잖아? 어차피 그쪽은 인정도 못 받은 외. 부. 인이신데, 아르베리아 경.”
“크윽……!”
“아, 혹시 지면 아는 척하지 말라고.”
“지기는 누가 진다는 말인가! 나 역시 검을 든 자! 말란체 가문의 이름을 짊어진 이상 패배할 수는 없단 말이다!”
워랜의 말에 발끈한 아르베리아가 자신의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런 아르베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응원 좀 해드리세요. 왜 상대방도 안 하는 도발을 워랜 경이 하시는 건데요.”
“잔뜩 굳어서 제 실력도 못 내는 것보다 미움 좀 받더라도 긴장을 풀어주는 게 나으니까.”
“……그냥 놀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자, 과연 누가 이길까. 난 저 원주민한테 돈을 걸고 싶은데.”
“역시 응원이 아니었어!”
어쩜 역사에 남을 일을 벌인 사람이 이토록 가벼운 것인지, 주안으로선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워랜은 키득거리며 웃더니,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곁에 앉아 아르베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런 워랜을 흘겨보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넌지시 말을 하였다.
“너는 팔이 부러졌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아프지도 않으냐?”
“예?! 팔이 부러져요?!”
안색이 조금 어둡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저 지쳐서 그런 것이라 생각을 했던 주안이었는데, 설마 어디가 부러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아르베리아를 놀리던 워랜의 행동에, 주안은 황당함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 놀지 말고 이 무식한 녀석 팔이나 좀 고쳐주거라.”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커즈 신관에게 말하자, 황급히 달려온 커즈 신관이 워랜의 팔에 신성력의 치료를 진행했다.
커즈 신관의 치료가 괜찮은 것인지 워랜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치료를 받던 워랜이 퉁명스레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말했다.
“제가 뭐가 무식하다고……. 칼질 몇 번에 사람 팔을 부러뜨리는 저 원주민이 훨씬 무식하구만.”
“쯧, 그런 몸을 가지고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다니. 몸이 아깝구나, 몸이.”
노령의 나이라고는 믿기 힘든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몸은, 확실히 바스티아노 백작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환상적인 근육질의 몸이다.
하지만 워랜은 그런 몸이 부럽지도, 그리고 그렇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심드렁하게 아르베리아와 카사가 서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쯧, 어른의 조언에는 귀담아듣는 시늉이라도 하거라.”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주의라서요.”
“버릇없는 녀석이로고.”
그래도 마누엘 전대 대신관도 이런 워랜의 실력을 인정하기에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이토록 젊은 나이에 랭크 7에 오른 인물을 본 것은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 이후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재능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나니, 제국을 떠나오긴 하였지만,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었고, 인연이 깊은 동부의 인물이라 그런지, 워랜의 이후의 행보가 내심 기대가 되는 그였다.
“네 녀석과 마리우스 그 녀석을 만나게 해주고 싶구나. 녀석도 입담 하나는 대단하였는데 말이다.”
“이미 옛날에 만나서 지겹도록 욕을 먹고 맞아봤습니다.”
“……너는 더 맞아야 할 듯하구나.”
“쳇.”
하지만 조금 아쉬운 듯,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황소 같은 바스티아노 백작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이었기에, 이 버릇없는 워랜 노밀을 다루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담긴 한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