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78화
피처럼 새빨간 눈이 닮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살을 베어낼 듯한 그 엄청난 기세는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검성 시절 토미랑 비슷한 실력자라고?’
주안은 절대 그럴 리 없다며,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뛰어난 검사도, 기사도, 무사도 아니다.
흔한 착각일 수 있다며 애써 부정을 하였다.
하지만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바로 대족장의 성별이었다.
아무리 봐도 메데아 대족장은 다른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근육질의 몸이었지만, 키가 커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호리호리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돋보이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상징, 가슴의 크기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외부인.”
“아, 아, 그, 그게…….”
너무 놀라 잠시 머뭇거리던 주안이 금세 생각을 정리하고, 심호흡한 뒤 메데아 대족장을 똑바로 마주보며 살짝 고개만 숙인 채 말했다.
“맞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어머니의 증표, 성흔을 가지고 있는 대밀림 바깥의 주민. 제노폴 제국의 귀족이자 위대한 선조, 힉스 마르티네스 공의 후손인 주안 마르티네스라고 합니다.”
처음 더듬거리며 허둥거리던 주안의 모습에 메데아 대족장이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자신을 소개하는 그 모습에 의외라는 듯 주안을 바라본다.
특히나 선조의 이름을 자랑스레 말하며 소개하는 부분은, 메데아 대족장이나 다른 원주민들도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소개였기 때문이었다.
“바깥 주민이 선조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의외로군.”
“이곳의 인사법에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선조를 언급하는 것은 저희 역시 긍지와 자랑으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지요.”
“쿠후후……. 그렇지. 선조를 잊는다는 것은 자신을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마음에 드는 외부인이로군, 영감보다 나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말을 굉장히 잘하는 메데아 대족장은 확실히 여타 원주민들과는 조금 달랐다.
체형만이 아니라 얼굴 윤곽 역시 좀 더 갸름한 편이었다.
하지만 원주민의 특징인지 비정상적으로 자란 어금니는 여전하나, 그 역시 조금 작았다.
그 때문인지 말하는 것이 한결 가벼워 보였고, 그렇기에 말을 제대로 잘하는 듯했다.
단지 자연스럽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욕하면서 흘겨보는 게, 아무래도 농담을 던진 듯했고, 그것을 농담이 아닌 진담이자 욕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설마 주먹으로 싸웠다는 게 메데아 대족장은 아니겠지?’
그래도 대밀림 바깥의 사람이고 신관이다.
주먹을 내지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여성에게 한다는 것은, 손가락질이 아니라 경비대에 붙잡혀가서 감옥에 갇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기사가 아니더라도 서방 대륙의 일반적인 상식은 여자와 아이와 노인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 있는 여기사와 여마법사들은 거기서 제외되지만 말이다.
뭐, 이런 메데아 대족장도 그런 여성에 포함시켜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되긴 했지만, 외모가 어떻든 여성은 여성이다.
단지, 보호를 받을 여성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누군가를 보호해야 할 법하지만 말이다.
묘한 인연이 있는 듯,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메데아 대족장을 보며 미소를 짓던 주안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갸웃했다.
‘응? 워랜 경……?’
무언가, 워랜은 아르베리아나 토미와는 달리 메데아 대족장을 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이런 워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메데아 대족장의 기세가 이전 삶에서의 토미와 비등하다고 느낀 것은주안은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린 워랜을 보니, 역시 워랜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메데아 대족장 역시 워랜을 한 번 흘겨보았지만, 이내 관심을 거둔 후 호탕하게 웃으며 주안에게 말했다.
“마음에 든다, 외부인. 아니, 마르티네스의 주안. 어머니의 증표를 보여라.”
자신의 자리에 다시 앉으며 메데아 대족장이 명령을 내렸지만, 주안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명령이란 그녀에게 일상일 것이니 기분 나빠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주안은 왼손바닥을 들어 성흔에서 신성력을 뽑아내었다.
“허…….”
함께 온 바루 족장의 원주민들은 이미 한 번씩 보았지만, 여전히 경외감 가득 담긴 눈으로 주안의 왼손바닥의 성흔에 시선을 준다.
하지만 처음 본 이곳에 모인 원주민들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웅성거리다가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마치, 이전에 이 성흔이 처음 나타났을 때 대신관이 주안에게 해주었던 경배와 매우 비슷했다.
“……어머니의 증표가, 확실하군.”
“친우인가, 친우의 것인가, 아니면 친우의 것을 빼앗은 것인가…….”
메데아 대족장의 말에 왼편에 앉은 노인이 작게 중얼거리며 그는 성호를 그어주었다.
다른 원주민들과는 달리 그의 몸은 매우 왜소했고, 노인이라 하여도 건강한 근육질의 다른 원주민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더욱이 그 노인이 성호를 긋는 모습은 주안으로선 꽤나 놀라운 행동이었다.
‘신을 믿는 원주민이 다 있었네.’
아니, 어쩌면 이곳이니까 가능하지 싶었다.
조금 이름이 다르긴 하지만, 결국 이 성흔과 특별한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또…….’
하지만 그런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또다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주안이 살짝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보였지만 모습과 그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을 좀 더 유심히 지켜보려던 주안이었지만, 이내 쾅 하며 무언가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에 주안의 귓가를 맴돌던 웃음과 얼굴을 스쳐 지나가던 그것들이 또 사라져 버렸다.
“말도 안 된다! 외부인에게 어머니의 증표?! 헛소리!”
메데아 대족장의 곁에 앉아 있는 또 다른 남성이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의자의 팔걸이를 부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앉아라, 라쿰바.”
“속지 마라, 대족장! 외부인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를 속이고, 친우를 속이고, 우리를 이곳에 밀어낸, 선조들의 원수라는 사실을 잊지 말란 말이다!”
라쿰바라 불린 문신이 가득한 원주민 역시, 메데아 대족장 만큼이나 말을 제대로 잘하였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인상이나 몸의 문신은 섬뜩했고, 여기저기 난 상처는 맹수에게 당한 것인지, 이빨 자국과 할퀸 자국 등등 다양하였다.
그의 외침에 다른 원주민들이 조금 곤란해했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라쿰바라 불린 원주민을 노려보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그 원수에 나도 포함이 된다는 말이더냐.”
“영감은 나서지 마라! 영감을 인정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외부인은 아니다!”
다른 외부인이라 지목된 주안 일행들이 움찔했지만, 다행히 워랜이 주안의 앞을 막아서며 라쿰바를 노려보았다.
메데아 대족장만큼의 압박이 라쿰바에서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영 짜증 난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며 라쿰바에게 말했다.
“네 녀석이 아직 덜 맞았나 보구나…….”
“그래, 다시 싸우자, 영감! 이번에는 반드시 사지를 뜯어주마!”
“넌 그 혀를 뽑아, 개 먹이로 던져주마.”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그 발언에 커즈 신관도 황당해했지만, 주안 역시 놀라 그에게 소리쳤다.
“아니, 무슨 신관이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세요?!”
“신관도 사람이다, 사람. 화나면 가끔 험한 소리도 하는 거다.”
“가끔 하시는 것치고, 지나치게 살벌하고 자연스러운 말이었는데요?”
무슨 양 대륙 욕설 모음집이라는 책이라도 읽으시는 것인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라쿰바에게 걸음을 옮기려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었지만, 워랜이 그런 그를 막아 세우며 물었다.
“전에 원주민들에게 인정받는 방법, 알려주신 적 있으시죠?”
“왜? 관심 있느냐?”
“아주 많이 있습니다만. 그리고 저 문신 돼지는 좀 열 받아서 말입니다.”
“큭큭…….”
문신 돼지라는 말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뿐만이 아니라 주안이나 아르베리아, 토미도 황당했지만,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웃음에 라쿰바가 더욱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워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선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딴 것에 얽매여서 손님으로 온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는 걸 보니 그 후손도 참 별 볼일이 없어 보이는군.”
“선조를 모욕하지 마라, 외부인!”
“그놈의 외부인은 개뿔……. 그딴 거 집어치우고…….”
워랜이 검을 뽑아 들고 라쿰바에게 겨누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판 붙자. 이게 너희들의 인정 방법이라며?”
그 말에 라쿰바가 눈매가 사나워지더니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서 워랜으로 시선을 돌렸다.
“큭큭큭……. 영감, 재미있는 외부인을 데리고 왔구나.”
“쯧. 버릇없는 녀석이 버릇없는 녀석이랑 아주 쌍으로 잘 노는구나.”
메데아 대족장이 즐겁게 웃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불만이 가득한 듯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그 행동으로 워랜에게 양보한다는 의미를 보여주었고, 그렇기에 메데아 대족장이 박장대소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대결을 허락한다! 라쿰바! 부족의 자존심을 세워라!”
“선조의 이름을 걸고! 모욕한 놈, 목을 뽑는다!”
라쿰바의 외침에 원주민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손으로 가슴을 치며 호응해 주었다.
떠들썩한 그들의 모습에 워랜이 고개를 돌려 주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왜요? 왜 절 보시는 건데요?”
“나도 저런 허락 필요하지 않아?”
“……제 허락이 필요하셨어요?”
“일단은 직장 상사잖아.”
“우와, 직장 상사라니?! 저 미래의 워랜 경이 모실 사람이거든요?!”
“여기서 지면 그 미래는 없어질 것 같은데?”
“윽…….”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슬플 따름이다.
키득거리며 웃는 워랜의 모습에 주안이 불만 어린 시선으로 그를 보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워랜 경.”
“응.”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노밀 자작가의 이름이 걸려 있어요. 반드시 이기세요. 이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정통 후계자인 주안 마르티네스가 노밀 자작가의 후계자, 워랜 노밀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 반드시 완수해 주도록 하지,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님.”
검을 꽉 움켜쥔 워랜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주안과 다른 이들이 뒤로 물러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곁으로 향하자, 워랜과 라쿰바가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둘의 행동에 맞춰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주변의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며 공간을 만들자, 공터 중앙은 순식간에 결투를 위한 무대가 되어 버렸다.
“차탄의 후손 라쿰바다! 외부인, 이름을 대라!”
“제라르 노밀의 후손, 워랜 노밀이다.”
“워랜 노밀……. 부러지는 것으로는 안 끝난다. 너, 죽을 수 있다.”
자신의 거대한 검을 들고 낮게 으르렁거리며 워랜을 노려보는 라쿰바였지만, 워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 나도 봐줄 생각은 없어, 문신 돼지.”
그렇게 말한 워랜의 검에 파란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주안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하지만 점차 밝게 빛나는 그 검에 주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방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빛이었고, 저 빛의 특징을 주안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검기?!”
바로 동방의 절대 고수들.
절정에 이른 무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검기였다.
비명에 가까운 주안의 외침에 아르베리아와 토미도 놀라 워랜의 등을,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안만이 아니라 아르베리아마저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간단했다.
동방 대륙에서 검기를 다룰 수 있는 무사를 서방 대륙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랭크 7.”
그리고 그 랭크 7이라는 영역을, 겨우 20대에 이룬 천재.
마리우스 파탈렌 후작 이후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20대에 그 영역을 개척한 이가 등장한 것이다.
게으름의 대명사, 워랜 노밀이라는 그 이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