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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마마보이-74화 (74/281)

공작가의 마마보이 74화

아스란 왕국의 왕도 외곽에 마련된 병자들을 위한 장소는 확실히 다른 곳보다 컸으며, 그만큼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한 나라의 수도이며 왕이 있는 곳인지라, 사람들에겐 이곳이 안전한 장소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체니아 일행이 먼저 왔을 땐 시장을 연상케 하는 장소였지만, 잘 정리를 해서 그런지 주안이 도착했을 때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잘 잡혀 있어 일하기는 매우 수월했다.

아니, 주안이 할 일이란 그저 적당히 큰 건물에 신성력을 잔뜩 부여해 주고, 모아놓은 붕대로 쓸 천들에 신성력으로 깨끗하게 만들어주며, 우물에 신성력을 부여하는 등의 일 뿐이었다.

며칠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도 매우 지쳤다.

그럼에도 무리해서라도 일을 진행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최대한 빠르게 대밀림으로 갔다 와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절단의 임무가 흐지부지되었다 해도 정해진 시간과 일정이 있었기에, 언제까지나 아스란 왕국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황도에서는 이 일 때문에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것이며, 맥도넬 후작가를 따라 돌아가 버린 남부 귀족들의 행동 역시 고려해 봐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밀림으로 가는 것은 슬렌더 백작 가문의 근거지, 메리다에서 결정된 사안이었기에 반대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급하게 일을 끝내고 급하게 행동하는 만큼, 주안으로선 이보다 더 피곤하고 힘든 일은 없었다.

“…….”

멍한 얼굴로 눈을 뜬 주안은 하품할 기력도 없었다.

몇 날, 며칠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신성력을 쓰고 밤늦게 돌아와 잠을 잤고, 채 회복할 틈도 없이 곧바로 남부 대밀림으로 발걸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대밀림으로는 마차를 타고 갈 수 없다는 점이다.

“……피곤해. 목욕하고 싶어…….”

어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가자, 이미 아침 준비를 끝낸 쌩쌩한 모습의 일행이 보인다.

토미는 아르베리아와 그리고 워랜이 함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노년의 나이와 부끄러움, 대밀림의 위험 따윈 저 멀리 걷어차 버린 것인지 쿠단과 함께 아침 운동 중이시다.

그나마 주안을 일찍 깨우지 않은 것이, 배려라면 배려였다.

대밀림으로 가자고 주장한 것은 다름 아닌 주안 자신이었지만, 왠지 짐이 된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유일하게 자신과 똑같이 피곤해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다른 텐트에서 어기적거리며 나오는 모습에, 주안이 조용히 다가가 인사해 주었다.

“고생하시네요, 커즈 신관님.”

“……공자님도, 고생이 많습니다.”

주안보다 더 초췌한 모습으로 퀭한 눈을 한 커즈 신관은 말을 할 기력도 별로 없어 보인다.

그나마 주안은 젊다는 것이 다행스러웠지만, 커즈 신관은 나이 지긋한 인물이었다.

“그러게 왕도에 있으시라니까요.”

“아닙니다, 공자님. 신관으로서 이런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지 않습니까.”

“……마누엘 전대 대신관님에게 붙잡혀서 오신 게 아니고요?”

“…….”

그 역시 포른 신관과 마찬가지로 마누엘 전대 대신관을 알고 있었고, 한때 그의 아래에서 신관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포른 신관이 동부에 남게 되는 바람에 왕도에 있던 그가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붙잡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속사정을 듣고는 큰 기대를 하던 그였다.

‘뭐, 지금은 그 기대 이전에 아주 죽을 맛이겠지만. 그보다 마법사가 있으면 좀 더 편했을 텐데…….’

사실 마법사가 함께하면 편하다 싶었던 주안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걸리적거린다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반대했다.

그 엄청난 크기와 거대한 나무들로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것도 위험했지만, 대밀림이 진짜 위험한 것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독충들 때문이었다.

신성력을 가진 신관들은 질병뿐만이 아니라 독과 같은 것에도 내성이 매우 뛰어났고, 기사들 역시 대단히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기에 독충에 물려도 충분히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잘못하면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허약한 육체인지라, 오히려 그들은 이곳이 더 위험할 수가 있었다.

이런 대밀림의 위험성 때문에 최소한의 인원, 하지만 확실한 실력자와 대밀림에 이미 다녀온 마누엘 전대 대신관, 원주민인 쿠단까지의 소수의 인원만 함께 오게 된 것이다.

만약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대밀림에 이미 다녀온 인물이 아니었다면, 쿠단이 대밀림의 원주민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인원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대밀림에 들어가는 것에 숫자는 무의미하였고, 오히려 적은 숫자가 낫다는 것이, 경험자이자 절대 무시하지 못할 발언권을 가진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주장이기도 했다.

‘물론 그 속사정이야 알리진 않았지만…….’

이건 단지 치료를 위해 가는 것이 아닌, 사실 주안의 순수한 호기심인 일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대번에 반대했을 것이고, 그나마 아르베리아를 포함시킨 것도 이 이유에서였다.

“이제 얼마나 남았으려나.”

작게 한숨을 내쉰 주안의 모습에 커즈 신관도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밀림에 들어온 것도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슬슬 익숙해진 듯했지만, 주안이나 커즈 신관은 전혀 아니었다.

온종일 걷는 것도 힘들고, 제대로 식사도 못 했으며, 몸을 눕힐 푹신한 침대는 고사하고, 목욕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큰일이었다.

주안의 신성력으로 깨끗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게 피로를 회복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목욕이라는 행위는 단지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일과를 끝내고 심신을 안정을 시키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것…….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싶다…….”

만약 주안의 이런 모습을 엄마가 보았다면, 화내기보단 먼저 기절을 했을 것이다.

* * *

독충도 독충이었지만, 대밀림에 오면서 가장 크게 걱정한 것은 바로 식사였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는 듯,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쿠단으로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또 어디서 고기를 잡아 오셨네요, 쿠단.”

“너, 허약하다. 많이 먹어라. 선물이다.”

“……고마워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잡아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큰 동물이 꼬치처럼 꿰인 채 구워지고 있었다.

쿠단은 큼지막한 살점을 직접 뜯어 주안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쿠단은 유독 자신을 이렇게 하나하나 잘 챙겨주었고, 주안이 힘들어할 땐 업어주려고까지 했었다.

‘원주민들은 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원주민들이 매우 호전적일 것이라 생각하던 주안이었으나, 쿠단과 지내다 보니 원주민들에 대해서 자신이 조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이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고, 그런 만큼 이 대밀림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걷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하나 가르친다고 한다.

게다가 하나의 부족. 그렇기에 모두가 가족이었고, 끈끈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진짜 모두가 쿠단 같은 전사들일까.’

쿠단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강한 부족, 강한 남자, 강한 여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전사라는 말은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쿠단만 놓고 보면, 확실히 그의 말대로 전사는 전사였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 육체는 워랜이나 아르베리아가 인정할 정도로 훌륭했다.

직접 단련한 것도 있었지만, 워랜이나 아르베리아와는 다른 육감도 매우 뛰어났다.

항상 죽음을 곁에 두고 지내야 하는 대밀림의 원주민이라 그런지, 생존 본능에서 오는 발달된 육감이 아닌지 싶었다.

“많이 먹어라. 그래야 키 큰다. 너, 허약하다. 그러다 잡아먹힌다.”

“하하…….”

게다가 이렇게 허약하고 도태된 무리의 가족들을 아끼는 모습을 보면 원주민들이 마냥 야만스럽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쿠단, 진짜 열두 살이 맞아요?”

“맞다. 여기 손가락, 여기 손가락…… 그리고 여기 발가락, 내 나이다.”

양손을 펼쳐 손가락을 보여주고, 신발을 벗어 발가락도 보여준다.

그중 두 개의 발가락을 꼬물거리는 행동에 곁에 있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쿠단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

“밥 먹는데 더러운 발을 어디다 올리는 거냐.”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영감은 개다.”

“시끄러워, 이 녀석아.”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말 아무리 봐도 쿠단의 나이나 행동은 신기했다.

주안은 두 사람을 보다가, 고기보단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준비한 곡물가루를 물에 타서 스프처럼 끓인 죽을 떠먹었다.

게다가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 향신료까지 준비해서 그런지, 죽의 맛은 꽤나 맛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건가요?”

“보자, 여기 들어온 지 일주일은 지났고…….”

“다 왔다. 여기, 쿠단이 놀러 나왔다 붙잡힌 곳이다. 친구 집, 친구의 친구 집 지나면 우리 집이다.”

“말 끊지 마라, 어린 녀석아. 에잉, 요즘 녀석들은 버릇이 없어.”

집이라는 말에 쿠단이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주안은 쿠단이 왜 그러는지 알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내 중간에 친구와 친구의 친구 집도 지나쳐야 한다는 것에서 주안과 커즈 신관이 동시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더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 * *

“응? 잠깐만.”

“예? 워랜 경?”

워랜이 주안을 멈추어 세웠고, 뒤따르던 토미나 아르베리아, 커즈 신관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세요, 워랜 경?”

갸웃하는 주안과는 달리 워랜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본다.

그리고 워랜뿐만이 아니라 앞서 나가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나 쿠단 역시 이미 주변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아르베리아, 토미. 주안 공자와 커즈 신관을 지켜.”

워랜의 말에 아르베리아와 토미가 고개를 끄덕인 후 주안과 커즈 신관의 곁에 섰다.

그리고 워랜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마누엘 전대 대신관과 쿠단에게 물었다.

“뭔가 있는데, 느끼시죠?”

“그래.”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고, 조금씩 다가오는 기척들도 느껴진다.

그것은 한둘이 아니었고, 조직적인 움직임이었으며, 정면뿐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곳에서 일행을 포위하듯 다가왔다.

일정한 간격 그리고 일정한 속도. 그러면서 기척과 소리는 최대한 죽인 채 서서히 옥죄며 다가오는 것이 보통의 압박이 아니었다.

워랜은 전쟁을 경험해 본 세대는 아니지만, 어머니 때문에 가문의 기사들과 병사들의 훈련이나 대련은 꽤나 많이 해본 입장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타 지역에서 찾아온 실력자들을 상대하면서 스스로 실력을 쌓았고, 그 실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압박감은 처음이었다.

“이거 참……. 이게 진짜 살기라는 건가. 짜릿한데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고 소름이 돋게 만드는 이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워랜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워랜을 보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이는 몇 없다.

반쯤 미쳐 버리거나 아니면 두려움에 못 이겨 무너질 뿐이다.

게다가 그 살기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나 쿠단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워랜과 아르베리아에게 집중되고 있는 살기였다.

주안이나 토미 그리고 커즈 신관은 그런 것을 전혀 못 느끼고 있었지만, 워랜과는 달리 아르베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리고 이 포위망이 무엇인지 쿠단은 아는 듯 점차 다가오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나, 타르한의 아들 쿠단! 집으로 가는 길이다! 사냥감이 아니다!”

쿠단의 외침에 압박해 들어오던 것이 살짝 흐트러졌고,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나무들과 수풀들 사이에서 우람한 체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원주민……?”

그들의 모습에 주안이 놀란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전체적으로 쿠단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간단한 옷차림과 기괴한 화장을 하였고, 목걸이며 귀걸이, 팔찌 등 장식으로 한 모든 것들이 동물의 뼈로 보였다.

손에 든 무기들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흉흉하게 빛나는 그 눈빛은 모두가 한결같다.

적대심.

그들과 눈이 마주친 주안이 흠칫 놀랐지만, 아르베리아와 토미가 그런 주안을 달래듯 곁을 지켜주었기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남자가 걸어 나와 창을 쿠단에게 겨누며 으르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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