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71화
‘도련님…….’
주안이 자신에게 눈길을 한번 준 뒤 아스란 왕국의 국왕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토미의 심경은 참 복잡했다.
어떻게 이곳까지 소니아를 따라오긴 했지만, 주안을 기다리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이 화를 내지 않을까, 아니면 냉정하게 대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면 말을 어긴 이유로 쫓겨나지 않을까…….
주안이 아무리 잘 대해주어도 자신은 주안의 하인이었고, 공작가에 얹혀사는 평민의 아이일 뿐이었다.
그것을 망각한 채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 정말 잘한 일인지, 아무리 주안을 따르고 싶다 해도 선을 넘어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청소년, 막상 주안 도련님 보니까 반갑지?”
“그건…….”
소니아가 토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히죽, 미소를 짓자 토미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여기 오기 전까지, 그리고 이곳에 와서도 좋지 않은 생각을 많이 했지만, 막상 주안을 보니 그것은 아니었다.
소니아의 말대로 다시 보니 반갑고, 주안이 자신을 봐주는 것도 좋았고, 미소를 지어주는 게 그저 기뻤다.
“나중에 내가 자리라도 마련해 줄까? 어차피 나 혼내려고 부르실 거니까, 그때 살짝 말해줄 수 있는데.”
“……혼나는 게 당연하긴 하지만,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세요?”
“흐흥~ 익숙해져서 괜찮아.”
“…….”
너무 유쾌한 소니아의 모습에 토미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토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중에 제가 도련님 찾아가서 이야기할게요. 잘못한 것도 말씀드리고, 하고 싶은 것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인이 그 주인에게 하는 행동으로는 절대 볼 수 없었지만, 토미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
주안은 자신을 그렇게 말해주었고, 그렇게 대해주었다.
좋은 사람이기에 하는 선의의 말일 수도 있지만, 토미는 그 말이 참 좋았다.
그렇다고 토미가 주안을 진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고, 그 곁에 선 사람들도 하나같이 다 대단하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주안이 믿어주는 만큼, 토미는 그런 믿음을 준 사람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바람대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자신의 꿈은 여동생인 세라타를 건강하게 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지만, 그 꿈은 이미 이루어졌다.
주안으로 인해서, 꿈이 이루어졌고…… 그렇기에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이니까.
토미가 조용히 시선을 옮겨 다시 주안을 바라보았다.
손에 닿지 않는 저 먼 장소에 있는 주안은 많은 이의 환영을 받고,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었다.
‘나도 언젠가 저 곁에서, 도련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도 믿을 수 있고 그 곁에 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잠시 그런 생각도 했지만, 이내 토미는 마음을 다잡았다.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재차 다짐하는 이런 토미의 모습을 소니아나 세라타, 솔까지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른스럽다기보단……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듯한 그 눈빛은 올곧고, 한 사람만을 향해 있다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기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여 있는 이 중, 이런 토미의 기백을 느낀 이는 토미를 처음부터 보고, 곁에 있던 소니아와 솔, 그리고 세라타만이 아니었다.
바로 멀찍이 떨어진 풍신 역시 이런 토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눈은 토미에게 꽂혀 있었지만, 매우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 * *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높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것은 주안이나 유우나 공주 정도이지 워랜이나 풍신은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곁에서 시선을 돌린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풍신의 모습에 갸웃한 워랜이 물었지만, 풍신은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다 워랜에게 말했다.
“저 아이의 스승 말이다, 좋은 분이시더냐?”
“저 아이……?”
풍신의 말에 워랜도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낯익은 이들이 있었다.
“가출 청소년들 저기 다 모여 있네…….”
워랜 역시 소니아가 사고를 쳤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예상대로 이곳에 다 모여 있는 모습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소니아나 다른 애들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잠시 그들을 보다, 풍신이 바라보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에 워랜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토미의 스승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피터 경이라고, 주안 공자의 어머니인 안젤라 님의 호위 총책임자이시죠.”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어떤 분이냐는 것이지. 성격이나, 그런 것 말이다.”
“흐음…….”
도통 알 수가 없는 풍신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워랜이었지만, 이내 자신이 알고 있는 피터에 대해서 말했다.
“일단, 굉장히 답답하고 우직한 분이시긴 하죠. 황실 근위대 출신이라 실력도 확실하고, 황제 폐하의 명령 한마디에 출세가 보장된 황실 근위대 자리를 버리고, 안젤라 님을 따라가셨을 정도였으니까요.”
“한마디로 충신이로군.”
“그렇긴 하시죠.”
“후우……. 그러면 더더욱 꿈을 꾸어선 안 되겠구나.”
“무슨 꿈이요?”
풍신의 한숨과 그 말에 워랜이 갸웃했다.
그러다 문득, 그가 토미를 바라보며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해서 떠오른 워랜이 조금 놀란 투로 말했다.
“……설마, 토미를 키우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
풍신이 입을 꾹 다물자 워랜이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뭐, 제가 모자라 보이시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게 아니다. 너는 실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성격에 모난 부분이 있을 뿐이다.”
“아, 예…….”
뭔가, 위로의 말 같기는 하지만, 왠지 그게 더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워랜이 그러거나 말거나 풍신은 토미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하나 저 아이는…… 보면 볼수록, 지켜봐 주고 싶고, 하나라도 알려 주고 싶고, 손을 내밀어주고 싶은 아이로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뭐, 저 녀석을 보자마자 냅다 달려가 검을 휘둘렀을 정도이니까요.”
워랜의 그 말에 풍신의 하나뿐인 눈이 크게 뜨이더니, 고개를 돌려 워랜을 바라본다.
“……스승도 그런 눈을 다 하시네요.”
“네 성격은 알고 있었다만, 정말 상상 그 이상이로구나.”
여기서 그 검을 냅다 휘두른 장소가 제노폴 제국 제일의 귀족가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근거지의 공작성, 그것도 전대 가주인 벡브란 마르티네스 전대 공작의 생일 파티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워랜은 풍신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긴 했지만, 왠지 시원하게 얻어터질 것 같아 그 부분은 적어도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참 이상한 아이긴 하죠. 저런 재능을 가진 아이가 짐 나르며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갔다는 그렇지만, 그런 녀석을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주안 공자가 손을 내밀고, 이끌어 준 것도 그렇고요.”
“주안 공자님은 참으로 인복이 많구나.”
“예전의 주안 공자라면야 영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최근의 주안을 보면 워랜도 미소가 지어질 때가 많았다.
특히 성흔인지 뭔지, 신성력을 가진 뒤로는 더욱 그랬고, 이곳 아스란 왕국에 와서는 정말 스스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은 뭐, 스승 말대로 인복이 좀 보이긴 하죠. 공주님을 꼬신 것도 그렇고.”
“……너는 예의를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아직 그대로이더냐.”
“명상을 아무리 해도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쉽게 변하겠어요? 스승이 먼저 그러려니 하며 이해하는 게 더 빠를 겁니다.”
“후우…….”
워랜이 팔짱을 낀 채 히죽 웃는 그 모습에 풍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상도 명상이지만, 호통도 치고 스승의 매도 들어 보았다.
하지만 워랜의 이 행동은 그냥 천성인지 변하지가 않았다.
아니, 주안 공자로 인해서 그나마 좀 변한 게 이 정도인데…… 그 이전은 대체 어땠는지, 솔직히 생각하기도 싫은 풍신이었다.
그나마 이것 외에는 말은 잘 듣고, 잘 따라주는 게 다행이지 싶었다.
“어쨌든 스승도 토미를 가르치고 싶으신 거죠?”
“……하지만, 그럴 수는 없구나.”
“거 참, 그냥 냅다 데리고 와서 가르치면 될 것을…….”
“하나의 제자에 둘의 스승은 아니 된다. 스승은 곧 부모요, 세상에 부모가 둘인 아이는…….”
“차고 넘칩니다만?”
“……넘친다고?”
그 말에 풍신이 워랜을 바라보았지만, 워랜은 그저 담담하게 풍신에게 말했다.
“고아들을 거두어 그 부모가 되는 좋은 이들도 있고, 자신을 살려준 이를 부모로 대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꼭 낳아주었다고 부모도 아니고, 키워주었다고 또 부모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부모가 둘이든 셋이든, 그 아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관없죠.”
“…….”
“게다가 이미 부모가 있던 아이가 스승을 가지면, 부모가 둘인 입장 아닌가요? 그거야말로 모순이죠.”
워랜의 말에 풍신이 적잖이 놀란 듯했다.
하지만 워랜은 그런 풍신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예의를 따지시는 것이야 동방의 법도고 스승에겐 중요하다 할 수 있지만, 여긴 서방 대륙이고 서방의 법도와 질서가 있습니다.”
“내가 좀 답답하긴 한가 보구나.”
“가끔 그렇긴 하죠. 이곳 사람들은 스승이 있다 해도 새로 배울 게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 스승들 역시 제자가 배울 수 있다면 그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을 하고요.”
개방적인 서방 대륙은 배움에 있어서 스승을 하나만 두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보면 동방 대륙 역시 비슷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검술이나 무슬 같은 것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학문에 있어선 동방 대륙 역시 여러 스승을 두지만, 답답할 정도로 무술에 관해서 만큼은 꽉 막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방 대륙은 검을 배워도 다른 이에게 새로운 검을 배울 수 있었고, 좀 있는 집안이나 재능이 대단하다면 여러 스승이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보완할 것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알려주었다.
한 명의 스승과 제자가 아닌, 여러 명의 스승과 한 명의 제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서방 대륙이었다.
“저희 아버지 역시 토미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죠. 뭐, 진짜 스승이 되고 싶어서 피터 경과 경쟁도 했지만…….”
그래도 결국 노밀 가문의 마상술이 피터의 마상술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그 부분은 가론 노밀 자작이 어깨를 으쓱하며 토미에게 가르치긴 하였지만, 피터 경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계속 받아야만 했었다.
그래도 피터가 반대하지 않은 것은 결국 토미가 더 좋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좀 더 뛰어난 것을 배우게 하여 사랑하는 제자를 더욱 올바르고 올곧고 뛰어나게 키우게 한다는 마음……. 여러 스승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것이거든요.”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한 이곳 서방 대륙은, 그런 부분은 참으로 개방적이구나.”
“그렇기 때문에 개방적인 겁니다. 가르칠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기에, 조금이라도 더 뛰어난 것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단순한 검. 단순한 훈련.
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장점을 최대한 끌어낸 무술.
이 대륙의 검술은, 누구든 쉽게 접할 수 있고 쉽게 배울 수 있다는 범용성이, 유일한 장점이고 자랑이며 자존심이었다.
“그래, 결국 동방 대륙이 서방 대륙을 넘지 못하는 것은,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것에서부터 오는 큰 차이 때문이었던 것이구나.”
“뭐, 사실 진짜 평등한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많다는 것은 장점이나, 결국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이 이러한 평등을 좀 더 쉽게 누렸다.
하지만 그것은 동방 대륙 역시 마찬가지이기에 풍신도 미소를 지으며 워랜에게 말했다.
“나중에 저 아이의 스승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좀 나누어보아야겠구나. 작은 것이라도, 저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단다.”
“그 자리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그래도 나름 피터 경과는 검을 나눈 사이라 친하거든요.”
워랜의 말에 풍신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질투가 나지 않느냐? 나는 지금 네가 아닌 저 아이의 재능이 탐나서 이러는 것인데.”
“딱히 안 나는데요?”
“……어이해서?”
“그야 당연하잖아요.”
워랜이 풍신을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더 강하고, 더 강해질 거고,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허, 허허…….”
반쯤은 어이없는 웃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풍신이었다.
하지만 이런 워랜의 말이 전혀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토미는 분명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재능은 워랜 역시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같은 재능을 가졌으나, 출발 선상은 다른 두 아이였기에…… 똑같은 노력을 들인다면, 결국 워랜이 더 앞서 나갈 것이 분명하다고 풍신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워랜의 성격은 정말 대단함, 그 자체였다.
“그래, 그렇겠지. 네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에 저 아이가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게으름이 아니라 쉬는 시간이라니까요.”
“어련하시려고.”
워랜의 투덜거림에 풍신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먼 동방을 떠나 아스란 왕국에 와서 안타까운 유우나 공주를 보고 그 호위를 하였지만, 즐거웠던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혼자 노력하는 유우나 공주의 곁을 지키며, 그녀를 보는 것이 매우 씁쓸했을 뿐.
하지만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와 함께하며 뜻하지 않은 제자도 얻고, 유우나 공주가 웃는 모습도 보며 자신 역시 이런 일들을 계속 생기니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방으로 온 것이, 도피가 아니라 새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구나.”
“스승, 범죄자이셨습니까?
“그래, 범죄자다. 대역죄인이지. 그게 마음에 걸리느냐?”
“설마요. 여자와 아이들을 울리는 범죄만 아니면 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농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워랜의 이 행동이 또다시 풍신에게 미소를 짓게 만든다.
살벌하고 삭막하던 동방의 대륙과는 달리 이 대륙은 참으로 신기한 이들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