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70화
주안은 동부의 일을 금방 마무리 짓고 최대한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다.
베이더 커그 역시 그런 주안을 말리거나 혹은 귀찮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주안의 행동을 돕기까지 하였을 정도였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주안 일행은 부담스러웠고, 얼른 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는 않았기에, 하는 일은 최대한 돕고 얼른 다른 지역으로 보내려는 듯했다.
주안의 이런 바쁜 행동이 전염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제멋대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사실 빨리 대밀림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한 행동일 뿐이었다.
“……포른 신관님을 저렇게 놔두고 와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포교 때문에 온 녀석이니, 나 대신 신전에 잠시 눌러앉아 있다 해도 상관이 없지. 더군다나 신관들을 남겨두고 나머지 치료를 맡길 생각이지 않으냐?”
“그건 그렇지만…….”
100세에 가까운 어르신에 대한 배려로 주안의 마차에 함께 타게 된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지만, 주안의 말에 영 심드렁한 투로 답할 뿐이다.
며칠이나 머물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에 겨우 이틀 만에 짐을 싸버린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이지만 반란군, 베이더 커그나 글라리스는 이런 공작가 일행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주안이 많은 금액을 신전에 기부하고 가는 것에 놀라워했을 정도다.
그래도 일단 이곳은 왕국에서는 반란군이라 칭해지는 지역.
그것도 근거지이다.
그런 곳에 엄청난 금액을 놓고 간다면, 그것은 곧 반란군을 돕고 있다고 오해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안 역시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긴 하였지만, 베이더 커그나 글라리스가 그 돈을 빼돌리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것인지 그들도 잘 알 것이고, 또 어디로 흘러들어 가는 것인지는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리스를 저대로 두어도 괜찮을지 고민이긴 하지만…….’
사실 신전에 기부한 금액의 몇 배, 몇십 배를 주어서라도 글라리스를 데리고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사정을 모르는 주안의 눈에도, 글라리스와 베이더 커그는, 보통의 관계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가 잘못되어서, 그도 나라를 부순다는 선택을 해버린 것일까.’
흔들리지 않는 마차에 앉아 열어 놓은 창밖을 보며, 주안은 그렇게 생각을 하였다.
유우나만큼이나 그 과거 행적이 거의 없던 글라리스 에란이었다.
하지만 그가 반역을 저질렀던 왕가의 자손과 손을 잡고, 그 나라를 부숴 버릴 꿈을 꾸게 되었다면…….
‘베이더 커그의 신변에 무슨 큰 변화가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게 아니라면 10년 후에 벌어졌을 지금의 이 전염병, 디안 때문일까.’
주안은 슬쩍 함께 마차를 타고 가고 있는 유우나 공주를 보며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곁에 있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물어봐도 되었지만, 그 역시 그만두었다.
‘내 사람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괜히 그럴 필요는 없겠지.’
차라리 과거이자, 미래처럼 그를 유우나 공주와 가깝게 만든 후 베이더 커그를 왕가와 친해지게 만드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주안은 한결 홀가분해진 채 곁에 앉아 있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무엇이 말이더냐.”
“서부에 들러 왕도까지 갈 생각인데, 그래도 반란군의 거점에 있던 신전의 대표 신관이셨잖습니까.”
“왜? 그놈들이 날 잡아갈까 겁이 나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잡아가기 전에 저 우락부락한 손과 팔뚝 힘에 허리가 접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럼 문제없지 않으냐. 뭐, 정 안 되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이름을 팔아도 되고 말이다.”
“……제 의사는 필요 없으신가 보네요.”
“네 할애비 이름을 팔 생각이다만?”
“예?”
갑자기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주안이 갸웃했다.
하지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난 네 할애비의 스승이다만? 설마 벡브란 그 녀석이 고초를 겪는 스승님을 외면하겠느냐.”
“…….”
왠지 할아버지 성격이면 외면하고도 남을 것 같다.
아니, 그 이전에 할아버지와 마누엘 전대 대신관님이 진짜 친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도 겪어 보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도 겪어 보니, 두 사람의 성격을 생각해 보건대 절대 친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끄응…… 그보다 나도 그냥 걸을 걸 그랬나. 몸이 영 찌뿌둥한 것이 영…….”
“연세를 생각하세요.”
“너야말로 나이를 좀 생각하거나. 이 팔뚝 하며, 다리 하며……. 운동을 하긴 하느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주안의 팔을 만져보고, 허벅지도 한 손으로 붙잡으며 조물거린다.
말랑말랑한 주안의 팔다리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원……. 아무리 애가 귀하다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 대체 벡브란 그 녀석은 아들도, 손자도 이렇게 내버려 두고 뭘 한단 말이더냐.”
“딱히 운동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은데…….”
“떽. 그러다 남자 구실도 못 한다, 녀석아. 자손이 귀한 가문의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대를 끊을 생각이더냐?”
“웬 남자 구실?!”
그리고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손을 뻗어 주안의 옆구리를 붙잡더니 그대로 돌려세워 허리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큰 손바닥은 주안의 허리를 그대로 감쌌다.
“마, 마누엘 신관님?!”
“허리 운동이라도 좀 하거라, 이 녀석아. 남자 구실도 남자 구실이지만 그러다 아내한테 소박맞겠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공주님?”
무슨 말인지 몰라 갸웃하는 주안과는 달리, 어째서인지 유우나 공주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가락만 꼬물거리고 있다.
게다가 볼이 지나칠 정도로 빨개졌고, 슬쩍 눈을 돌려 주안을 바라보다가 주안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더더욱 숙여 버린다.
“끄응……. 공짜는 별로다만, 벡브란 녀석과의 옛정이나 이번 신전에 기부한 돈을 봐서 남자 구실 정도는 할 수 있게 만드는 운동법이라도 좀 알려주마.”
“아니, 전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런 거 하면…… 엄마가 엄청 싫어하시는데.”
“……너 몇 살이더냐?”
“예? 열여섯…… 인데요.”
“열여섯이나 먹고 엄마, 엄마, 하면 안 부끄러우냐?”
“그, 그게…….”
……입에 붙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런 것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거 녀석, 소문은 좀 들었다만 그 이상인 것 같구나.”
“…….”
어떤 소문인지는 대충 알기에 주안이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유우나와 재차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할애비 성격에 그냥 놔둔 게 참으로 신기하구나.”
“같이 안 살고 있거든요.”
“거참. 좀 늙었다고 버려둔 것이냐? 녀석, 자식 복도 없었구나.”
“그,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저희는 아빠, 아니, 아버지 일 때문에 황도에 살고, 할아버지는 마를렌에 계신 것뿐이에요!”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일까.
주안이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매우 의심스럽다는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눈빛은 변하지 않는다.
“그, 그보다 쿠단이라는 남자는 대밀림의 원주민인데, 용케 여기까지 따라 나왔네요.”
“말까지 돌리는 걸 보니 눈치가 영 없는 것은 아니구나.”
“으…….”
주안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시선을 회피했지만,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는 유우나 공주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서로 민망해질 뿐이었다.
“뭐, 녀석은 결혼을 하고 싶다고 신부를 찾아 따라 나온 것뿐이다.”
“웬 결혼?!”
“보기보다 눈이 엄청 높은 녀석이라서 말이다. 원, 취향도 특이한 게 부족들의 미인상인 통통하고 우람한 여성이 아니라, 바깥 주민들같이 호리호리하지만 빵빵한 여성을 원한다나?”
“……취향 참 특이하시긴 하네요.”
손으로 잘록한 허리를 표현하다 빵빵한 가슴을 표현하는 거구의 노인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쪽 여인들의 취향이, 쿠단과 같은 원주민들이 아닌지라 결혼이든 연애든 무리일 듯싶었다.
“그래서 대밀림에 다시 가기 엄청 싫어하셨군요.”
“어쩔 수 없지. 가출한 것이라 가면 제 아비에게 다리가 부러질 수 있으니까.”
“여기나 저기나, 어디든 가출은 일상인가 보네요.”
“응? 여기도 가출한 애가 있느냐?”
“…….”
그 말에 주안은 뭐라 말을 해줄 수 없었지만, 유우나 공주만이 작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 * *
주안 일행이 서부에 방문했을 때는, 동부와는 달리 정말 최악의 환경이나 다름이 없었다.
병자들은 넘쳐나고, 그런 병자들을 고칠 사람도 부족한데, 귀족들이나 있는 이들은 그런 병자들을 바깥으로 내쫓기까지 하니…… 어째 반란군의 지역이 더 평화로워 보였다.
그나마 신관들을 미리 보내 정리하고, 베일 리 준남작이 협박을 가장한 협상을 잘했던 것인지, 크샤나 후작도 굉장히 저자세로 나오며 공작가 일행을 맞이했다.
이곳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주안에게 잘 보이려는 크샤나 후작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뺏긴 듯했다.
상황도 썩 좋지 않음에도 파티다 뭐다 하며 끈질기게 달라붙는 그들로 인해서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었다.
선을 그어버리는 주안으로 인해서 크샤나 후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였지만 말이다.
그런 서부는 이틀만 머문 동부와는 달리 상황이 훨씬 나빠 닷새나 머물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알아듣게 신관들이 머물 장소, 병자들에 대한 태도 등을 알아들을 수 있게, 마르티네스의 이름까지 언급하며 크샤나 후작을 압박한 뒤에 떠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북부에서 시작해 동부, 서부를 거쳐 중남부의 왕도 입성까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 * *
왕도 인근이라 그런지 그나마 도로가 괜찮은 듯 마차와 일행들은 빠르게 왕도로 들어섰고, 많은 이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큰 도로를 따라 왕성까지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주안은 조심스레 손까지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였다.
“왕도는 왕도인가 보군요.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사정이 썩 괜찮아 보입니다.”
주안은 타국의 도시에는 몇 번인가 가보았지만, 왕도를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스란 왕국의 경제가 많이 기울어져 있다 해도 주안의 말대로 왕도는 왕도인 듯, 타 지역보다는 형편이 좋아 보였다.
마누엘 전대 대신관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찌뿌둥하다며 마차에서 내려 버린 탓에 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전보다는 어색하지 않은 듯 유우나 공주도 여유롭게 마차의 창밖으로 자신들을 반기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었다.
“그래도 집에 오시니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유우나 공주님.”
“반년 만에 온 것이니까요. 이러나저러나, 그래도 집이 가장 좋잖아요.”
“그렇긴 하죠.”
유우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며, 주안 역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괜히 향수병을 느끼고 고향과 집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해주는, 돌아올 수 있는 집과 반겨줄 가족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나도, 엄마 보고 싶은데…….’
최근에는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엄마와 연락도 거의 하지 못했고, 하루 몇 번이나 연락이 올 엄마도 어째서인지 최근에는 연락이 뜸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
웬만해선 엄마 품을 벗어나고자 하는 주안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를 완전히 떠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자립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당당해진 아들로 서고 싶었을 뿐이니까.
‘오늘 저녁에는 엄마한테 꼭 연락해야지.’
대신, 전염병의 일이든, 대밀림의 일이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꺼낼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왕성으로 향한 마차는 왕성 앞에 도착했다.
마차는 그곳의 실권자들, 특히 현 아스란 왕국 왕까지 나와서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을 맞이해 주는 부담스러운 자리에 멈추어 섰다.
주안이 아르베리아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내린 후 가장 앞서 나갔다.
아스란 왕국의 왕과 그 곁에 선 대신들 옆에 낯이 익은 이들이 함께 있었다.
“소니아 누나…….”
왕도로 보냈던 위체니아와 신관들, 그리고 소니아의 모습에 주안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소니아도 주안을 보았지만, 양심의 가책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해맑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주안과 일행들을 맞이해 준다.
곁에 있던 위체니아가 소니아의 옆구리를 꼬집지 않았다면, 달려와 반겼을지도 몰랐다.
그런 소니아의 곁에는 침울한 솔과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라타, 묵묵히 자리를 잡고 있는 토미가 있었다.
‘토미…….’
그저 조용히 주안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토미였지만, 주안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해 온다.
다시 고개를 든 토미의 눈에는 주안의 말을 어겼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죄송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보다 더 굳은 결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휴, 저 고집은 정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보면 잔소리를 하고, 혼도 내고 싶었지만, 저런 얼굴을 하면 화도 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