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69화
“어머니의 나무, 세계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에 주안이 갸웃하며 물었다.
“그거 동화책에서 나오던 엘프라는 이종족의 터전 이름 아니에요?”
“호오, 기억력이 좋구나.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도 다 기억하고 말이다.”
딱히 어렸을 때 읽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구잡이로 책을 읽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오래전, 드래곤이라는 생명체가 이 땅에 거주할 당시 엘프라거나 드워프, 오크라는 인간 외의 지성을 가진 이종족이 있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설이고, 전래 동화였으며, 아이들이 좋아할 동화책의 내용으로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주안은 믿지 못했지만, 여타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드래곤을 통해 마법이 퍼졌으며, 그 마법은 대륙에 거대한 흔적을 남겼고, 또한 드래곤 하트라는 것을 통해 그 동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타 이종족은 그게 아니었다.
아니, 드워프만은 고대의 유물 중 그들이 만들었다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출토되었지만, 엘프나 오크라는 이종족은 남겨둔 것도 거의 없었다.
그저 각 지역, 각 지방에 전해져 오는 전설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전설 중 하나가 예전, 주안이 엄마와 온천에 가서 피부 미용으로 썼던 밤피노 꽃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게 왜 대밀림의 원주민들이 모시는 나무의 이름이 된 거예요?”
게다가 그 나무에 성흔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그래, 나 역시 그게 좀 이상했단다. 엘프라 한다면 호리호리하고 예쁘장하게 생겼다고들 하지 않느냐. 한 번쯤 보고 싶었다만…….”
“……어르신이 주책이세요.”
“시끄럽다, 어린 녀석아. 나이를 먹어도 예쁜 여자를 찾는 건 남자의 본능이다.”
너무 당당해서 주안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뻔했다.
“어쨌든,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만,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쿠단 녀석의 부족들이었을 뿐이다. ……엘프 같은 예쁜 여자는 없어.”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은 것이 아쉬운 것일까, 아니면 예쁜 여자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후자 같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면 앞서 쿠단에게 해주었던 머리 꿀밤을 맞을 것만 같았다.
“대신 네가 격리된 그 건물에 해준 것처럼, 신성력의 힘이 넘치던 장소였을 뿐이지.”
“신성력…….”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을 곱씹던 주안이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혹시 디안이 해결되었다는 게, 그거 때문이었나요?”
“그래. 그, 디안? 그게 그 이름이었느냐?”
“아, 그, 그게…….”
“하긴 뭐, 쿠단 녀석의 부족이 부르는 ‘어머니의 화남’보다는 훨씬 낫구나.”
“…….”
원주민들의 말이야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좀 촌스러운 이름이긴 했다.
“하지만 뭔가 너의 것과는 좀 차이가 나는 듯하구나. 자연적으로 치료가 되긴 하나, 너의 그 신성력의 힘만큼도 아니고, 깨끗해진다는 것도 매우 특이하구나.”
“제 신성력이 좀 특별하긴 하죠.”
주안이 조심스레 왼손바닥의 성흔에서 신성력을 끌어올리자 성흔의 상처에 따라 새하얀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다른 신관들도 놀란 주안의 신성력이었고, 놀란 것은 마누엘 전대 대신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보다 나무에 있는 성흔이라……. 그게 진짜 가능한가.’
주안도 이 성흔이 생긴 뒤 그와 관련된 종교 서적도 꽤나 읽었지만, 신성력이 자리를 잡은 물건이 있을지언정 성흔이 새겨진 이는 사람…… 성녀와 성자들뿐이었다.
생명체, 그것도 나무에 새겨진 성흔이 주안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런 주안을 보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말했다.
“왜 그러느냐? 궁금하느냐?”
“……그게, 조금…….”
마누엘 대신관이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 녀석들도 자세한 건 모르더구나. 그저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살며, 그 어머니의 나무를 지키면서 친구들을 기다린다는 그 말밖에 하지 않더구나.”
“친구?”
“원래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은 세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였다만, 현재는 쿠단 녀석의 부족 하나만 남고 모두 사라졌지.”
“아, 밖에서 본 그 남자분이요?”
“그래, 그 녀석…….”
주안도 쿠단이 남부 대밀림의 사람이라고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 모습은 동방의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외모만이 아니라 그 말투나 행동도 일반적인 상식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뭐, 한 부족이라고 해도 대밀림 곳곳에 퍼져 있는 녀석들의 부족원들은 상당하겠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이미 정벌을 당해도 여러 번 당했겠지요.”
숫자도 숫자지만 그동안 쌓여 온 정보들을 본다면,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은 하나같이 그 실력들이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정말 바깥의 사람들과는 종 자체가 다르다는 듯, 임신을 하면 한 번에 대여섯은 잉태했고, 열 달도 안 되어 아이들을 낳았다.
그 아이들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걷기 시작했으며, 채 열 살이 되기 전에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인정받아 전사가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성장이 빠른 만큼 수명도 짧고, 대밀림에는 동방의 요물에 필적하는 마수들이 많아 항시 마수들의 위협 속에서 뺏고 빼앗기는 전쟁을 하기에 일정한 숫자가 유지된다고 한다.
그게 아니었다면 대륙으로 눈을 돌린 그들과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러지 못했다면 대밀림은 이미 모조리 밀렸겠지. 그리고 그 마수 녀석들을 막는 방패도 사라진 만큼, 다음은 우리들이 그것들과 싸워야 했을 거다.”
“마수라는 게 그렇게 위협적인가요? 그래 봐야 동물들일 뿐인데.”
“쯧……. 대밀림 바깥의 애들은 이리도 경각심이 없어서야…….”
갸웃하는 주안의 모습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작게 혀를 찼다.
하지만 주안이 알고 있는 마수들은, 확실히 대단히 위협적이라고는 하나 결국 동물일 뿐이었다.
이 시대의, 이 대륙의 기사들이라면 능히 상대하고도 남을 것이다.
별다른 무장도 없이, 거의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싸우는 원주민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계적인 방식이 이곳에는 있었다.
앞장서서 싸우는 실력자들인 기사들과 뒤에서 지원해 주는 마법사, 그리고 보조해 주는 신관.
하나하나는 약점이 뚜렷하고 약할 수는 있어도, 이들은 모이면 그 실력이 몇 배나 상승한다.
이런 자신만만한 주안을 보며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고 오줌이나 지리지 말거라.”
“……다 큰 사람한테 오줌을 지리지 말라니요.”
나름 열여섯, 아니, 이전 나이까지 합하면 눈앞의 마누엘 전대 대신관보다는 좀 더 어리긴 해도, 나름 먹을 만큼 먹은 것이다.
“어쨌든 나 역시 성흔이 새겨진 나무라 신기해서 조사해 보긴 하였다만,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었단다.”
“결국 알 수 있는 건 없나 보네요.”
“그래, 그렇긴 하다만…….”
조금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주안에게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싱긋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그 나무에 새겨진 성흔은 말이다, 하나가 아니란다.”
“예?! 하나가, 아니라고요?!”
“성흔은 총 세 개가 있더구나. 하지만 하나를 빼고는, 그 흔적만 미미하게 남아 있을 뿐, 아무런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세 개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의 말을 주안이 곱씹었다.
호기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진 이 성흔이라는 게 하나도 아닌 세 개나 된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런 곳에 세 개나 되는 성흔의 흔적이 있는 거지.’
의문은 잔뜩이었지만, 풀리는 것은 전혀 없었다.
고민하는 주안의 모습을 보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말했다.
“가보고 싶으냐?”
“…….”
당연히 가보고 싶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실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미 병마는 물러갔다 하고, 아스란 왕국 남부와 서부 지역만 치료하면 대충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기에 대밀림에는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안 들었다면, 말이지.’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자신의 몸에 새겨진 이 성흔은 이전의 삶에서는 없었던 것.
자신이 되돌아오고, 이전에는 없었던 이 성흔이 몸에 새겨진 것도 어떻게 보면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주안이 생각을 정리한 뒤, 왼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그곳에 저도 갈 수 있을까요?”
“갈 수 있다면?”
“꼭, 가고 싶어요. 제 눈으로 그걸 보고 싶어요. 이게 뭔지, 또 그건 이 성흔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요.”
“대밀림이란다.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위험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가고 싶다고?”
주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가만히 지켜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벡브란 그놈의 손자가 맞긴 하구나. 정말 무대포에, 무모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려는 구나.”
“할아버지도 이런 무모한 짓을 하셨었나요?”
“그래, 그 녀석도 기사 수행을 한답시고 멀쩡한 산적 소굴에 쳐들어가고 그랬었는데 말이다.”
“……일단 산적 소굴이 멀쩡하진 않잖아요.”
할아버지는 대체 젊었을 때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신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기분 좋게 웃던 마누엘 전대 대신관이 주안에게 말했다.
“뭐, 좋구나.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다시 대밀림으로 갈 생각이었으니 함께 가도록 하자. 나와 함께 가면 녀석들도 이방인으로 취급하진 않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마누엘 신관님.”
“감사하면 가기 전에 여기 신전에 기부나 잔뜩 하고 가거라. 너도 돈은 많지 않으냐?”
“……예.”
역시 전대 대신관님.
황도의 대신관님이 누구에게 돈 버는 방법을 배운 것인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 * *
“후우…….”
정해진 숙소로 돌아온 주안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가서 침대에 몸을 던져 누웠다.
마누엘 대신관과 헤어진 후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주안 자신도 병자들을 돌보러 다녔지만, 사실 주안이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이미 많은 신관이 있었고, 체계적으로 잘 관리해 놓은 곳이라 그런지 손이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단지 늘 마차를 이용하던 주안이 자신의 튼튼하지 못한 두 다리로 이리저리 움직이려니, 그게 더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곳의 일은 하루 이틀이면 끝내고, 금방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피곤하다…….”
이런 주안 때문에 식사 초대도 다음 날로 미루어준 눈치 빠른 글라리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만, 사실 식사를 초대해도 거절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는 주안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여긴 반란군의 땅이었고, 그 수장의 초대로 식사를 함께하는 모습은, 썩 보기 좋지도 않을뿐더러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이름에 먹칠만 하는 꼴이 될 테니까.
“벌써 밤인가…….”
주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쭈욱 켠 후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스란 왕국에 오면서 느낀 것은, 역시나 제국과는 너무나 낙후된 장소라는 것이다.
제국은 큰 도시나 마을에서는 마법등을 이용해 저녁이라도 늘 밝게 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는 집들의 창문 사이로만 간간이 빛이 흘러나왔다.
하늘에서 달빛이 구름에 가리는 날이면 도시에는 어둠만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을씨년스럽구나.”
“……조금 삭막하긴 하죠?”
“응?”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주안이 고개를 돌리자, 옆방의 테라스에 나와 있는 유우나 공주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습니까?”
“한참 전부터요.”
“흠…….”
피곤해서 그런지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었나보다.
무안해하는 주안의 모습에 유우나 공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신전에서의 일은 잘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이곳의 대표 신관님이 황도 대신전의 전대 대신관님이라지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포른 신관님이 그렇게 당황하며 허둥거리는 모습을 공주님도 보셨어야 했는데.”
주안의 농담에 유우나 공주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제국은 정말 다르네요. 그런 훌륭한 분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정말 대단해요.”
“어디든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인재는 어디서든 나오고, 그것은 아스란 왕국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아뇨. 저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도 지키지 못하니까요.”
“…….”
자조적인 그 미소에 주안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유우나 공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커그 경조차 지켜주지 못한 나라였고, 백성들조차 품지 못한 왕가였으니……. 그나마 남아 있고 따라주는 이들이 아직도 있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그만큼 왕가에 대한 충성이 대단하다는 소리이겠지요. 적어도 지금의 왕가는, 믿고 따라도 된다는,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고 보호해 드릴 가치가 있다는 것이잖습니까.”
“가치라……. 정말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네요.”
왕국이 아직도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숨을 붙여놓고 있는 게 아니라, 조금이지만 남아 있는 충성스럽고 귀족다운 귀족들이 숨을 붙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안은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진즉에 무너졌을 것이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 도시, 동부를 보니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반드시 커그 경이, 메리다의 슬렌더 백작님이 왕가를 다시 지지해 주는 날이 올 때까지 노력해야지요.”
베이더 커그와 만난 뒤로 침울해져 있던 유우나 공주였지만, 주안과의 이런 대화를 통해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듯했다.
뭐라고 할까, 귀족답지 않은 귀족인 주안 때문일까.
주안을 보고 있다면 자신도 이런 좀 더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리고 재차 다짐하듯, 그녀가 보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안에게 말했다.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주안 공자님.”
“예……. 공주님은 포기를 모르는 여성이셨지요.”
“후훗, 그렇게 보였나요?”
그렇게 보인 게 아니라 그렇게 직접 실천에 옮기셨지요, 라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주안 역시 미소를 지으며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조용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나도 포기하지 않고 변할 거니까요.’
노력하고 변화하고 싶은 마음은 유우나 공주에게도 절대 지지 않을 주안이었다.
그러기 위해 고집을 부리고 찾아온 곳이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