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67화
“지내시는 곳이 참 아담하군요.”
집 안으로 들어온 주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베이더 커그에게 그렇게 말을 해주었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고, 그를 비꼬기 위해 한 말도 아니었다.
아담하고 잘 정리된 가정집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누추한 곳에 초대하여 죄송합니다, 공자님.”
“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저 신기해서 말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소파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것은 주안과 베이더 커그, 그리고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는 유우나 공주뿐이었지만, 이 아담하다고 생각되는 집무실에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주안의 호위나 베이더 커그의 호위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이더 커그의 호위라고 해봐야 함께 온 막스 셀리온 경과 수수한 인상의 글라리스라는 젊은 관리 하나뿐이었다.
집무실이 북적거리는 건 주안의 호위로 온 워랜이나 아르베리아, 그리고 황실 근위대 조장 알튼 경과 훼스턴 가문의 마법사인 덴젤 그리고 유우나 공주의 호위로 온 풍신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면서 보았지만, 이곳은 참 신기하더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동부 경계 지역의 영지들의 인구, 혹시 이쪽에서 수를 쓴 것입니까?”
북부에서 내려오며 거친 경계 지역 영지의 영주민들 숫자는 지극히 적었고, 유우나 공주 역시 의아할 정도였다.
셀리온 경의 말에 따르면 전염병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옮겼다고 하지만, 아무리 전염병이라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부족한가 싶었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쳐 막스 셀리온에게 안내를 받으며 동부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게 보였다.
“저희가 한 짓은 아닙니다. 알아서들 영지를 버리고 오더군요.”
“알아서, 말입니까? 영주들이 허락을 안 할 텐데요?”
“그게 허락이 필요한 일입니까?”
“그야…….”
“영지민은 소유물이 아닙니다, 공자님. 그들이 어디를 가든 그들의 자유입니다.”
“……그 자유라는 게 일반적인 상식은 아니지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상식입니다. 떠나는 자 붙잡지 않고, 오는 자 굳이 막지 않는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왜 아스란 왕국 동부가 혼란스러운지 대충이나마 짐작을 할 수가 있었고, 그런 발상을 실현시키는 이 반란군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갔다.
영주에게 영주민은 곧 재산이었고, 그 재산이 뻔히 다른 곳으로 가는데도 말리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반란군의 눈치를 본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았다.
“조금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생각이군요.”
“뭐, 제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쁘진 않더군요.”
“저기 뒤에 있는 분의 생각입니까?”
“예, 맞습니다. 꽤 똑똑한 친구이지요.”
주안이 글라리스에게 눈길을 주자 그가 조용히 고개만 숙이며 인사를 해온다.
“그런 인재를 노예로 쓰던 아스란 왕국이었으니, 안타깝지 않습니까?”
“……노예?”
주안이 본 그는 멀끔하고 단정하게 생긴 그 외모 때문에 어디 귀하게 자란 도련님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말에 주안이 글라리스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으나, 그는 자신의 이전 신분이 별로 부끄럽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주안의 눈길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다가 왠지 낯설지 않다는 인상에 주안이 갸웃했다.
단지 얼굴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이들이 상식이라고 한 파격적인 발상이 낯설지 않았다.
이동의 자유가 보장된 발상.
떠나는 자들을 붙잡지 않고, 오는 자들을 막지 않는다.
그것은 신왕조의 중심이 되는 내용 중 하나였다.
‘잠깐…… 글라리스?’
곰곰이 생각하던 주안의 눈이 커졌다.
‘설마…… 신왕조의 재상, 글라리스 에란?!’
사람을 모은 것은 유우나 공주였고, 황가와 마르티네스를 무너뜨리며 신왕조의 문을 열게 만든 것은 토미였다.
그리고 그 신왕조가 반듯하게 설 수 있게끔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다져온 인물, 신왕조의 명재상 글라리스 에란.
주안은 그를 몇 번 본 적 없었지만, 유우나나 토미보다 더 많은 소문을 접했던 인물이었다.
유우나는 두려움을 가지게 만드는 존재였고, 토미는 경외심을 느끼게 만드는 존재라면 글라리스 에란은 우러러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예라니…….’
그 누구보다 귀족다운 인물이라 평가를 받던 그였다.
신왕조의 초석이 된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그가 노예였다는 사실에 주안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반란군의 곁에 있다는 것에, 그의 삶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제국은 노예 거래를 엄히 금하고 있다.
아니, 노예 거래를 허용하는 나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노폴 제국 인접국들은 아니다.
제국이 두려운 것도 있지만, 보고 배울 만한 점들이 많기에 스스로 따라 하는 것도 그만큼 많았다.
그중 하나가 노예 제도에 대한 금지였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노예 제도는 노예를 가진 이에게는 돈이 되지만, 나라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돈을 벌지 않고, 돈을 쓰지도 않는 노예보다 오히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백성들이 나라에겐 더 큰 이득이기 때문이다.
“노예 거래는 금지가 아니었나요, 커그 경?”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우나 공주가 놀라서 커그 경에게 물었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베이더 커그 역시 그런 유우나의 행동을 이해하였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법으로는 금지가 되어 있지요.”
“그럼 어째서…….”
“어디 아스란 왕국에서 법을 제대로 지키는 이가, 그런 귀족들이 있답니까?”
“…….”
“노예 거래, 암시장, 밀수, 마약, 도굴, 세금 포탈, 청부 살인……. 셀 수도 없는 일들이 현재도 이 왕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 높은 인간들이고, 피해를 보는 것은 모두 아래의 이들입니다.”
담담하게 말했지만, 커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왕가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을 하였지요. 당신들이 버린 이들을 우리가 거두었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스스로 찾아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커그 경.”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고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하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실패한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왕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방관자였습니다.”
“…….”
왕가를 원망하거나, 분노를 쏟아 내는 일 없이 그저 담담하게 말하는 커그 경의 모습은 매우 특이했다.
마치 감정이 메마른 그런 모습이다.
침울해져 있는 유우나의 모습도 안타깝고, 분위기도 많이 경색되어 있기에 환기라도 시킬 겸 주안이 말했다.
“이곳에 오면서 보았습니다. 바깥에선 그대들을 반역자, 반란군이라 부르지만, 이 안쪽의 사람들은 꽤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더군요.”
“그렇게 보였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위태로운 평화고, 행복일 뿐이지요.”
“사정은 꽤나 좋아 보였습니다. 전염병에 대한 걱정도 별로 없어 보이고 말이지요.”
“예, 다행히 대밀림에서 이미 겪고 오신 신관 분께서 알아차리고 조언해 주신 덕분입니다.”
“대밀림에서 겪고 오신 분이라고요……?”
대밀림을 갔다 온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것이 신관이라는 말이 더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무엇보다 이미 겪고 왔다는 그 말의 의미.
그게 중요했다.
“설마, 이 병을 대밀림에서 미리 겪었다는 말씀입니까?”
“사실 저 역시 긴가민가하였습니다. 그분의 빠른 조치 덕에 어느 정도 해결은 하였지만, 병중이 심한 이들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어떤 분이…….”
“그것은 직접 만나 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아, 그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커그 경의 말에 주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커그 경이 주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주안의 외손을 보며 말했다.
“외람되오나, 주안 공자님의 왼쪽 속 바닥에는 성흔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메리다에서 온 정보가 사실이었군요. 그럼 그것을 통해 치료가 가능한 장소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희가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주안이 왼손바닥을 펼쳐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베이더 커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확실히 그분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문양이군요.”
“예?”
갸웃하는 주안의 모습에 커그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병자들은 외곽에 장소를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곳에 그분께서 계시니,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뒤의 글라리스를 보며 말했다.
“글라리스, 주안 공자님과 일행분들의 안내를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커그 경.”
그 말에 주안이 무언가 더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미 고개를 숙이며 주안에게 인사를 하는 베이더 커그의 모습에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애초에 말을 못 타는 주안이지만, 글라리스의 안내에는 마차도 이용하지 않았다.
그가 안내하는 장소는 외곽이라고 해도 크게 먼 곳은 아니었다.
애초에 베이더 커그가 머물던 집도 외곽에 위치한 장소인지라 걸어서 금방이었다.
딱히 호위가 필요 없다는 주안이었지만, 그래도 안심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워랜과 아르베리아, 그리고 황실 근위대 조장 알튼과 포른 신관을 위시한 신관들이 함께 글라리스의 안내를 따라 병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유우나 공주는 커그 경의 말 때문에 조금 충격을 받은 것인지 풍신 그리고 남은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과 함께 손님들을 모시는 장소인 고급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글라리스…… 경?”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공자님. 그냥 편하게 글라리스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으음, 그럼 그렇게 부르도록 할게요, 글라리스.”
“예, 공자님.”
주안 일행을 안심시켜 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원래 이런 사람들인 것인지 몰라도 안내인으로는 정말 글라리스 한 명만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주안은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어딜 가든 북적거리며 자신을 지키려고 하기에, 제대로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지금은 좀 덜한 편이라 그런지 주변을 둘러볼 수도 있었다.
많은 이를, 특히 다수의 평범한 사람을 바로 곁에서 볼 수 있어서 나름 즐거웠다.
“그 전염병을 치료하고 계시는 신관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사실 글라리스,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이곳을 안정시킨…… 아니, 동부를 안정시키고 있는 신관에 대한 것이 더 궁금했다.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노구를 이끌고 남부 대밀림으로 가신다고 하셨을 땐 솔직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뜯어말리고 싶었으니 말이지요.”
“이곳 출신이신가 보죠?”
“그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이곳에 신전을 세우셨던 분이셨습니다.”
글라리스의 말에 주안이 갸웃하며 포른 신관에게 물었다.
“이런 일이 흔한가요?”
“가끔 있습니다. 보통 산골의 마을을 찾아가 여생을 보내시며 교리를 전파하시는 장로님들도 있으셨으니 말이지요. 평생을 공부하시고 또 그 공부한 것을 알려주시고…… 대단한 분들이시죠.”
배움에 끝이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말인 듯했다.
신관들이 그 배움을 타인에게 전하며, 함께 공부하고 배우기를 원하는 집단인 이상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대밀림으로 가셔서, 다시 되돌아오신 것이라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요.”
제국의 사람인 주안도 대밀림이 어떤 곳인지 어느 정도 알고는 있는 상황인지라, 그런 곳으로 갔다 왔다는 신관은 대단함을 넘어 특이해 보였다.
“그래도 놀라기는 조금 이르십니다.”
“예?”
“주안 공자님도 아스란 왕국의 일을 모두 정리한 후, 대밀림으로 가신다지요?”
“……대체 어디에 얼마나 사람들을 심어놓은 것입니까?”
이건 뭐, 반란군이 아니라 정보조직 집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의 일들을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글라리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분께 도움을 받으시면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만, 별 의미는 없을 듯싶습니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소용이 없다니요.”
“그곳의 병마는 이미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들었습니다.”
“……디안의 전염병이, 해결되었다?”
“이 병의 병명이 디안이라는 것입니까? 신관님께서도 딱히 이름이 없는 새로운 병마라고 하셨습니다만…….”
글라리스의 말에 움찔 놀라긴 했지만 답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말을 곱씹으며 되새길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주안은 자신의 왼손바닥을 살펴보았다.
이 성흔을 통해 얻은 막대한 신성력과 그것을 통해 만들어낸 장소로 병마를 물리쳤던 주안이다.
‘……나 외에도 이런 걸 가진 사람이 있는 건가.’
먼 북방의 성도 다예프에 머문다는 성녀도 성흔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종교와는 거리가 먼 이 남방의, 그것도 대밀림의 원주민에게도?
주안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나보면 알겠지.’
주안이 그 병마에 대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글라리스 역시 깊이 묻지 않으며 조용히 주안 일행을 안내했다.
그리고 곧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신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