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64화
“아으, 진짜! 꼭 중요할 때만 날 떼어놓고 간다니까.”
다들 내일 출발에 대비해 바쁘게 움직였지만, 볼을 잔뜩 부풀린 채 저택 복도를 걷는 소니아는 아니었다.
그런 소니아의 곁에 있는 세라타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소니아에게 말했다.
“그래도 도련님이 저희 걱정하셔서 그러는 거잖아요.”
“난 걱정 받을 나이도, 실력도 아니거든! 거기다 완전히 다 큰 애를 돌볼 보모도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여전히 시무룩한 솔이 세 걸음이나 뒤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며 사과를 하였다.
그런 솔의 모습에 세라타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라타야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주안의 배려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소니아는 그게 너무 불만인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오빠, 토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것에 갸웃하며 말했다.
“오빠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에휴, 왜 그러겠니. 우리만 따돌리니 토미도 화난 거지.”
“그런 건…….”
“아니라고? 진짜?”
“…….”
토미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화가 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아스란 왕국으로 오면서 사실 주안과 소원해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주안이 바쁘다는 것은 안다.
특히 최근은 더욱 심했다.
바쁘고 복잡한 생각에 고민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토미는 주안이 자신에게도 조금은 도움이 될 기회를 주었으면 하였다.
워랜이나 아르베리아 경처럼 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안과 함께 계속 그 곁에 있고 싶었다.
‘보호받고 싶지 않아…….’
마를렌에서부터 쭈욱 다짐하였던,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강해져서 주안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곁에 있고 싶다는 바람.
‘아직도 난…….’
여전히 모자란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토미, 너도 이런 취급받는 거 싫지?”
소니아의 말에 토미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 모습에 소니아가 토미를 어깨동무해 주며 히죽 웃었다.
“그래, 이 누나도 똑같거든. 그래서 말인데…….”
소니아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졌고, 곁에 있던 세라타와 세 걸음이나 떨어져 있던 솔이 흠칫 놀라며 한 걸음씩 소니아에게서 물러났다.
토미와 뭔가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썩 좋은 대화로는 보이지 않았다.
* * *
다음 날이 되어 길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로 인해 슬렌더 백작가의 저택은 매우 분주했다.
준비하고, 재차 점검하며, 다시 일정을 확인하고 안전을 다시 검사하고, 짐들을 챙기고…….
거의 반나절을 정신없이 보냈지만, 모두를 배웅하고 나니 슬렌더 백작가의 저택은 매우 한산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떠나고, 그런 그들을 배웅한 뒤의 휴이 훼스턴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비록 아르베리아의 대신이긴 하나 자신이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의 안전을 주안에게 직접 부탁받은 것은, 자신 역시 인정을 받았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
“후후훗……. 그래, 뭐. 삼인자도 나쁘지 않지.”
자신의 방에서 여유 있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면서도 휴이 훼스턴의 즐거운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권력에 관심 없는 워랜은 논외로 치더라도, 이미 인정을 받은 최측근 아르베리아는 거의 확정된 2인자.
그리고 그다음으로 인정받은 게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기회를 잘 살려서 우리 훼스턴 가문도 남부에서 떵떵거릴 수 있는 그런 일이 될 수 있도록…….”
이미 주안의 눈에 띄었다는 것은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시, 선택받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
이 일을 정말 잘 처리한다면 훼스턴 가문의 앞날은 완벽하게 평탄할 것임을 알기에 매우 뿌듯했다.
아버지에게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남부 다른 귀족들의 부러움과 주목을 받을 것이다.
“좋아. 오늘은 다들 고생했으니 내가 거하게 한턱내는 것도 좋겠지?”
미래의 삼인자로서, 모두를 이끄는 입장으로서 큰 배포를 보이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아무래도 메리다는 제국과 교역을 많이 하는, 아스란에서 거의 유일한 도시이다 보니 제국의 사람들 입맛에 맞는, 그리고 잘 어울리는 고급 식당도 있었다.
가격은 꽤나 나가지만 공작령 남부의 나름 부유한 가문의 후계자답게 휴이의 입장에선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들과의 친목도 재차 다지면서 선택된 자의 주목을 받는 것.
그리고 차후 돌아온 주안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 훼스턴 가문은 주안의 곁에서 당당하게 서서 공작가를 보필하는 공작가 남부 명문가로…….
“후, 후후후후…… 흐흐흐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먼 미래의 자식 계획까지 생각하였다.
아빠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삼인자로 어떻게 올라선 것인지.
어떻게 권력의 중심에 들어 훼스턴 가문을 드높인 것인지.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떻게 쉽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런 그의 쓸데없는 망상을 일깨우고 말릴 사람은 곁에 없었다.
아니, 딱 한 사람.
그의 호위 책임자인 로첸 산타나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도련님!”
하지만 이내 그의 즐거운 상상을 깨듯 문을 박차고 들어온 로첸 산타나로 인해 화들짝 놀란 휴이 훼스턴은, 심장에 무리가 온 것인지 가슴을 부여잡고 두근거리는 것을 진정시키며 놀란 눈으로 로첸 산타나를 바라보았다.
“가, 갑자기 왜 그래?”
“크,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 혹시 병자들이 갑자기 몰려들기라도 한 거야?”
이미 소문이 나서 그런지 점차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듯했지만, 충분히 수용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런 휴이의 모습에 로첸 산타나가 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가, 가출…….”
“응?”
웬 가출? 갸웃하는 휴이에게 로첸 산타나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소니아 펜 아가씨가, 쪽지 하나 남기고 가출하셨습니다.”
“…….”
즐거운 삼인자 계획, 미래 아빠의 자랑, 나는 권력에 어떻게 올라섰나–저자, 휴이 훼스턴.
그런 즐겁고 행복한 상상이,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어 나락으로 떨어진 훼스턴 가문, 그 원인은 단 하나.
그 하나의 원인을 휴이 훼스턴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 * *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거예요?”
다각다각.
말발굽의 소리와 흔들거리는 짐 마차.
짐칸에 앉아 여유로워 보이는 소니아의 모습에 토미가 물었지만, 느긋한 소니아는 그저 싱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리가 어디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말도 없이…….”
“쪽지 남겼으니까 괜찮아.”
“…….”
왠지 휴이 훼스턴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 듯한 기분에 토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니아가 제멋대로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자신 역시 그 행동에 동의했기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단지…….
“……세라타, 너까지 올 필요는 없었잖아.”
다소곳이 앉아 짐 마차의 한쪽에 잔뜩 쌓아둔 짐들을 정리하고 있는 세라타의 모습에 토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오빠의 모습에 오히려 토라진 듯 세라타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오빠야말로 나 혼자 놔두고 갈 생각이었어?”
“그야, 위험하잖아.”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나아.”
“혼자라니……. 다른 분들도 많이 계시잖아.”
“아냐, 혼자야. 오빠도, 도련님도, 소니아 언니나 워랜 경……. 다들 없으신데, 거기에선 나 혼자만 남는단 말이야.”
주안의 전속 하녀라고는 하나, 결국 섞일 수 없는 귀족가의 사람들인지라, 주안과 매우 가까운 몇몇 인물들과만 겨우 이야기하는 수준인 세라타였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이 슬렌더 백작가를 떠났고, 남겨져야 할 오빠인 토미나 친한 소니아마저 자리를 비우면, 그곳에 혼자 외톨이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혼자는 이제 싫어……. 나도 다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하아…….”
몸이 아픈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남겨지는 일이 많았던 세라타였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모두와 함께 있는 즐거움, 행복을 이미 알아버렸기에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혼자 남아 기다리는 것만큼은 세라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세라타의 마음을 알기에 토미도 뭐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러엄~ 우리 귀염둥이 세라타 혼자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그런 곳에 어떻게 남겨두겠어.”
“…….”
그곳에 남겨진 여기사와 여마법사들이 들었으면 소니아에게 결투를 신청해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세라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한 말인 듯 소니아는 세라타를 껴안은 뒤 볼을 비비며 다정한 애정표현을 해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다 토미가 물었다.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사실 주안 도련님을 따라 동부로 가고 싶지만, 그건 정말 위험해서 안 돼. 애초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니까. 이해하지?”
“네.”
아무 생각 없이 가출한 것은 아닌 듯한 소니아의 그 말에 토미나 세라타도 작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니아가 손을 뻗어 세라타가 정리하던 짐들 사이에 있던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짐 마차 바닥에 펼쳐 보여주었다.
“우리가 갈 곳은 아스란 왕국의 왕도, 제다야.”
“왕도라고요?”
“응, 어차피 주안 도련님은 왕도로 오게 되어 있으니까.”
“아…….”
지도에 표시된 아스란 왕국의 왕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소니아가 말했다.
“거기까지 온 우리를 설마 쫓아내기야 하겠어? 그리고 도련님의 최종 목적지는 왕도가 아닌 더 아래, 대밀림인 이상…… 우리의 이 끈질긴 의지를 보여주면서 따라간다! 어때?”
확실히 가출까지 하면서 쫓아온 소니아나 토미를 쫓아낼 만큼 주안은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소니아의 이런 행동에 두통이나 일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따라갈 거예요. 이번에는 꼭, 곁에서 같이 있고 싶어요.”
토미가 자신의 목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 손가락은 매우 거칠었고, 손바닥에는 상처투성이였다.
그리고 그런 토미를 보며 소니아가 싱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분명 토미는 여전히 미숙하다.
검을 배운 지 겨우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런 아이였지만, 그 남다른 재능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실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토미가 미숙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였다.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수련에 매진해 실력을 쌓았다 해도, 바깥의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한 사람과 수많은 수라장을 건너온 실력자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주안을 바라보며, 주안을 위하며, 주안의 곁에 서고 싶다는 토미의 그 바람이 자신에게도 전해져 와서 그런지, 소니아 역시 기분이 매우 좋았다.
“토미.”
“네?”
“넌 주안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해?”
“제 모든 걸 드릴 수 있는 분이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나온 그 말에 소니아가 조금 의외라는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토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청 든든하겠네. 그만큼 도련님이 소중한 거야?”
“네, 제 소중한 것을 지켜주신 분이셨으니까요.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예요. 반드시 강해져서…….”
토미가 조심스레 세라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도련님과 세라타를 지켜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 토미의 다짐이 소니아만이 아니라 세라타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왔다.
조금의 거짓도 없고, 세상의 때도 전혀 타지 않은 밝게 빛나는 그 눈동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응, 할 수 있어. 좀 많이 게으르고, 못 미덥긴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워랜이 인정했고, 풍신 아저씨도 널 눈독 들인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잖아. 게다가 피터 아저씨나 가론 아저씨나, 다들 네가 대단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이가 토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것도 공작가의 내로라하는 사람들 모두가 말이다.
하지만 토미는 그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고, 중압감에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게 옳았다.
오직 한 곳만을 보며,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토미였기에, 오히려 그 모습을 주변 사람들은 더욱 좋아하였다.
“이번에 제대로 보여주자. 도련님이 더 이상 널 보호해야 하는 아이가 아니라, 너도 같이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그런 남자라는 걸 말이야.”
“네, 꼭 그러도록 할게요.”
무책임하게 따라 나온 것이긴 하지만, 토미는 소니아의 응원에 많은 기운이 났다.
토미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소니아와 세라타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짐칸에서 훈훈하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모두 듣고 있음에도, 강제로 끌려 나와 마부석에 앉아 있는 솔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집에 가고 싶다…….”
솔은 그저 멍하니 마차를 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넓은 목초지에 여유롭게 지내던 말들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