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60화
슬렌더 백작의 집무실을 나와 저택의 남부 귀족들이 머무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에반드리안과 밴들리.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주군의 모습에 밴들리 쿼빅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공자님, 정말 국경을 막으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상황 돌아가는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니야. 당장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신관들을 남부 국경 도시 쪽으로 보내달라고 해야 해.”
주안이 한 말을 모두 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비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주안 공자는 정말 치료를 하기 위해 아스란에 머물 생각인 듯합니다. 혹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잘못된다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가.”
“……마르티네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밴들리의 말에 에반드리안이 우뚝 멈추어 서서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마르티네스, 마르티네스, 마르티네스……! 그놈의 마르티네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밴들리는 그렇게 소리치는 에반드리안을 말리지 않았다.
“선조들이 그놈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해서 우리까지 마르티네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거냐.”
“…….”
“잊지 마라, 밴들리. 우리는 남부 국경을 지키는 가문이며, 우리의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제국을 전염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 마르티네스가 이 일로 딴죽을 걸면 오히려 그게 반역이야.”
“예, 공자님.”
에반드리안의 말에 밴들리도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지만, 그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맥도넬이 남부의 거두가 되긴 했지만, 마르티네스가 동부를 다스리는 것처럼 맥도넬이 남부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다.
충성을 맹세한 가문도 있었지만, 중립을 지키거나 맥도넬 후작가를 견제하는 가문도 많았다.
아직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힘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에반드리안도 알기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문을 키우고 힘을 키워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은 존재가 마르티네스였다.
아버지인 하스웰 맥도넬 후작은 이미 포기한 듯, 제국과 마르티네스와의 공존을 꿈꾸는 듯했지만, 에반드리안 맥도넬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마르티네스…….”
에반드리안이 뒤를 돌아, 슬렌더 백작의 집무실을 사납게 노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반드시…….”
선조들의 땅을 침범하여 무릎을 꿇린 제노폴과 마르티네스에 대한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다.
남부인들은 그 굴욕을, 그 땅의 주인이었던 맥도넬의 후손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 * *
사절단의 철수는 슬렌더 백작가의 근거지인 메리다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리고 그 이유가 왕국 남부에 퍼진 전염병 때문이라는 소문에 도시가 술렁였다.
사절단에 포함된 신관들이 메리다의 사람 중 일부에게 행해준 신성력이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소문도 서서히 퍼져 나갔다.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도 다수였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도 많았다.
“모두 준비는 끝내셨습니까.”
주안의 말에 마차와 말에 자신들의 짐을 싣든, 정리를 하든, 모든 사람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주안을 바라보았다.
긴장과 흥분, 그리고 기대와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다양한 감정들이 주안에게 전해져 온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주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 갈 곳은, 죽음이 바로 곁에 있는 장소니까…….’
“정말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안의 곁으로 다가온 사람은 실버론 하셀 자작이었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에 걱정스러운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주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전염병의 특징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황실 근위대분들을 호위로 붙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결국 주안의 고집을 꺾지 못한 실버론 하셀 자작은, 대신 자신의 직속 부하들인 황실 근위대 일개 대대를 주안에게 붙여주었다.
그들은 하나하나의 실력이 워랜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인 확실한 강자들인지라, 소수의 인원만 꾸려가는 주안에겐 정말 안성맞춤인 호위였다.
“게다가…….”
주안이 안심하고, 실버론 하셀 자작이 고집을 꺾을 수 있었던 이유.
고개를 돌려 마차 근처에서 유우나의 곁을 지키고 있는 풍신에게 시선을 주며 주안이 말했다.
“풍신 경을 상대할 사람은 이곳, 아스란에는 없을 거니까요.”
“그렇긴 하지요.”
실버론 하셀 자작도 인정한 강자.
풍신이 함께 가는 것만으로도 주안의 안전에 대해선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데,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은 정말 저대로 두어도 괜찮겠습니까?”
“하아……. 그러게 말이에요.”
주안이 고개를 살랑살랑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 닮은 고집인지…….”
“……누굴 닮았겠습니까.”
실버론 하셀 자작이 주안을 흘기며 작게 미소를 짓자, 주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에게도 신관들과 함께 주안이 따로 남부로 내려가 전염병을 치료할 것이라는 말을 해주자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할 것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격렬했기에 주안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서 풍신이 함께 가지 않고, 실버론 하셀 자작이 황실 근위대 일개 조를 붙여주지 않았다면, 단체로 따라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전염병의 위험성, 신성력을 가진 자신은 크게 위험하지 않다는 정보, 다수의 신관과 함께 막강한 호위인 풍신까지 따라간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안심을 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희생당할 수 있다는 주안의 말에 다들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남부 귀족들과 함께 되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아닌 이곳 메리다에 남아 주안을 기다린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사실에 주안이 적잖이 감동하긴 했지만, 이토록 꽉 막힌 사람들을 나중에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에 골치가 아파왔다.
이런 주안을 보며 실버론 하셀 자작이 담담히 말했다.
“남부 귀족들을 파르잔까지 호위한 후 저 역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예?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제 일은 사절단 모두가 안전하게 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과 주안 공자님을 포함한 모두가 사절단임을 잊지 마십시오.”
“으음…….”
이쪽도 한 고집하는 듯하였기에 주안도 더 이상 뭐라 하진 못 했다.
그저 출발 준비를 서두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게 주안으로선 최선이었다.
* * *
주안이 생각한 계획이라는 것은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다수의 신관이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아직 심각하지 않은 아스란 왕국 북부의 거점이 될 여러 영지에 일부의 신관들을 배치, 그들을 통해 초기 증상의 병자들을 모아 치료하게 만들며 남은 이들은 병세가 심각한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물론 거기에 대한 영지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주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껍데기뿐인 왕가이지만, 왕은 왕. 그 왕가의 왕명에 힘을 실어줄 아스란 왕국의 귀족인 슬렌더 백작 가문이 있어.’
중립이라고는 하나, 슬렌더 백작 가문은 아스란 왕국 북부에선 가장 강한 가문이며, 친 제국파의 거두였다.
단지 제국과 가깝다 해서 슬렌더 가문에 칼을 들이밀 수 없는 게 아니라, 실제로 슬렌더 가문의 힘은 상당했다.
평화로웠고 부유하였기에 영지민들은 슬렌더 가문을 잘 따랐고, 부유하고, 영지민들의 지지가 크다 보니 군사력을 키움에 큰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다들 아스란 왕국의 사정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이 왕명을 받아든 슬렌더 가문의 이름과 함께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사절단, 아니,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이름……. 협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겠지.’
몇십 년이 지났다 하나, 아스란 왕국에는 공포 그 자체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바로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인 만큼 그 이름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 역시 살기 위해서라면 신관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길 바랄 것이다.
‘전염병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
있는 자들이든, 없는 자들이든 병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치료하는 것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 치료를 담당하는 게 신관들인 만큼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주안은 출발 준비가 거의 끝난 일행들의 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아르베리아 경.”
“예, 공자님.”
“……정말 같이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합니다! 저는 공작부인께서 주안 공자님이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를 넘어, 가까운 곳에서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몸! 이 몸이 병에 걸려 움직이지 못한다 하여도 영혼이 되어서라도 주안 공자님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그놈의 술…….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소리치는 아르베리아는 정말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아서 그런지, 다들 한 걸음 그에게서 물러나 있었다.
사실 주안은 아르베리아가 자신을 대신해 메리다에서 기다릴 공작가 일행들을 돌봐주길 바랐다.
좀 지나치게 의욕적이긴 하지만, 사람을 통솔하는 것에서는 그 누구도 이견을 달리하지 않을 말란체 가문인 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은 아르베리아 말란체뿐이었다.
하지만 아르베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주안의 곁을 지켜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억지로 합류했고, 주안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주안 공자님을 안전하게 지킬 것입니다!”
“하하, 집이라……. 예, 다 같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야…….”
분명 크게 걱정될 것임에도 아르베리아는 의욕 넘치는 말로써 긴장감을 털어내는 듯했다.
그것을 알기에 주안 역시 미소를 지어줄 수 있었지만, 아르베리아가 꺼낸 집이라는 말에 주안이 말을 멈추고 갸웃했다.
“……집?”
“공자님?”
팔짱을 낀 채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주안이 이내 아르베리아를 보며 물었다.
“아르베리아 경, 병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가 뭔지는 아시죠?”
“그야 불결한 환경이나 상처를 통한 감염이 원인 아니겠습니까. 그 외에도 먹고 마시는 것이 오염되었을 수도 있고…….”
“예, 맞아요. 사그레스 역시 좋지 않은 환경에서,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질 때, 겨울을 이겨낸 뒤 허약해진 사람들에게 병마가 퍼진다고 해요.”
남부는 특히 추위에 매우 약하다.
늘 따뜻한 날씨를 유지하지만, 매우 짧은 겨울은 그들이 적응하기 참 힘든 날씨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위생에 취약한 계층에게서부터 시작된 병마는 그렇게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디안은 그 불결함에 퍼져 나간 병마에 숨어 있던 것.
만약, 깨끗한 장소. 그리고…… 신성력이 머문 장소에 병자들을 옮겨서 치료를 한다면 좀 더 안전하고, 신관들이 덜 힘들지 않을까.
아니, 혹시 근본적인 원인이자 신성력에 취약한 디안의 병마를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말이죠, 그, 강제로 깨끗해진 장소에…… 발을 디디기만 해도 깨끗해져 버리는 신성력 가득한 장소가 있다면, 병마가 좀 누그러지거나 하지 않을까요? 결국 디안을 치료하려면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 방법이 필요하니까…….”
“발만 디뎌도 깨끗해지는 신성력 가득한 장소라는 게 어디 있…….”
순간, 아르베리아도 그 발만 디뎌도 깨끗해지는 신성력 가득한 장소가 떠오른 듯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황도의 저택, 말씀이십니까?”
“하하하하……! 집, 그거예요, 아르베리아 경! 우리 집이요!”
신이 머문 땅이라며 대신관과 신관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렸고, 겨울임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었고, 꽃이 피었던 곳.
신성력이 머금고 있는, 바로 주안의 집이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주안이 마치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왼손바닥의 성흔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곳에 황도의 집처럼 그런 장소를 만들 수 있다면…….”
주안이 주먹을 불끈 쥐며 미소를 지었다.
“일이 훨씬 수월할 수도 있겠어요.”
병마가 침범하지 못하는 장소.
병든 이가 찾아와도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장소.
신성력이 머물고 있는 땅.
‘이미 한 번 해본 일, 두 번을 못 하겠어?’
깨끗해지게 만드는 일은 주안의 특기 중의 특기가 되어버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