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59화
슬렌더 백작의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인 하나같이 심각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어두운 사람은 다름 아닌 주안이었다.
‘결국 올 게 왔어…….’
현재 집무실에 있는 사람은 슬렌더 백작과 그의 아들인 사미르.
사절단의 사람으로는 실버론 하셀 자작과 남부 귀족의 대표인 에반드리안 맥도넬, 그 호위인 밴들리 쿼빅.
남부에서 합류했던 신관들의 대표, 커즈 신관과 황도의 신관 대표인 포른.
그리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대표인 주안과 베일 리 준남작이 함께였고, 그 곁에 일행이자 아스란 왕국 공주로서 참석하게 된 유우나도 있었다.
이곳에 모여 슬렌더 백작이 황도에서 올라온 서찰의 내용과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무언가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말했다.
“하셀 자작님, 돌아가도록 합시다.”
에반드리안 맥도넬의 말에 실버론 하셀 자작이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슬렌더 백작에게 물었다.
“상황이 그리 심각한 것입니까?”
“폐하께서 주신 서찰의 내용이나 이것을 전하러 온 전령의 말로는 꽤나 심각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괜찮았지 않습니까?”
“주안 공자와 신관들께서 힘을 써주신 덕분입니다.”
슬렌더 백작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주안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주안은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으며, 그저 깊은 고민에 빠진 어두운 표정을 지을 뿐이다.
“사실 그런 병이 있는지, 주안 공자에게 듣기 전까지도 저는 몰랐습니다. 그토록 사그레스를 오래 겪은 아스란 왕국의 국민임에도 말입니다.”
“흠…….”
슬렌더 백작의 말에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이상하다는 듯 주안을 바라본다.
그 역시 남부인.
사그레스에 대해서는 아스란 왕국만큼 겪는 것은 아니나, 충분히 알고 있는 입장이었다.
“주안 공자는 대체 어떻게 이 병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에반드리안의 말은 마치 추궁을 하는 듯하였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단지 베일 리 준남작만이 그런 에반드리안의 말에 있는 가시를 느끼고 찌푸렸다.
“책에서 보았습니다.”
“……책, 이라고요?”
“예, 책입니다.”
주안이 소문답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고, 책을 자주 읽는 것은 남부 귀족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였다.
“대체 무슨 책을 읽으셨기에 남부인도, 아스란 왕국의 사람도 모르는 병마에 대해서 알게 되신 것입니까.”
“글쎄요.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워낙 많은 책을 마구잡이로 읽어서 말입니다.”
“하하……. 마구잡이라.”
약간 비웃음이 담긴 웃음을 흘리는 에반드리안의 행동에 실버론 하셀 자작마저 살짝 찌푸린다.
“무엇보다도…….”
하지만 주안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말했다.
“이 병에 대해서 먼저 알아낸 것이, 에반드리안 공자에게 이런 추궁을 당할 일입니까?”
“…….”
“남부인도, 아스란 왕국의 사람도 몰랐던 일을 알아내 주었다면, 고마워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요? 아무것도 모르셨던 남부 사람들에게 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말입니다.”
주안 역시 도발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주자, 에반드리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것을 금세 미소로 바꾸어 말했다.
“예, 제가 실례를 하였군요. 그럼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말했다시피 저는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만, 주안 공자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남부의 파벌을 이끄는 게 에반드리안 맥도넬이라면 동부의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이끄는 것은 주안이다.
에반드리안의 말에 주안이 간단히 답했다.
“돌아가야지요.”
주안의 말에 슬렌더 백작과 사미르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라, 이곳에 모인 사절단의 사람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스란 왕국의 왕도 사절단이 발걸음을 돌리기를 바란다는 서찰을 보낸 이상, 지금 돌아간다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저와 신관들은 아닙니다.”
“……예?”
주안이 손바닥을 펼쳐 성흔의 신성력을 끌어내었다.
하얗게 서린 빛무리에 다들 눈에 이채가 서렸고, 남부에서 합류한 커즈 신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디안의 치료 방법은 순수한 신성력, 단 하나뿐입니다. 신관들이 거의 없는 아스란에서, 그 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신성력을 가진 것은 저희 사절단의 신관들뿐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아스란 왕국의 신관들은 이 병에 대해서 제대로 모른다.
그들은 분명 치료에 가장 앞장설 사람들이지만, 그들마저 감염이 된다면 신관들도 치료하지 못 하는 병이라며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주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아스란 왕국에 신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우리가 빠진다면, 이곳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안을 보며 에반드리안이 비웃음을 날렸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입니까?”
“…….”
“현실을 직시하시죠, 주안 공자.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시나 본데, 신관 몇이 간다고 그 병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에반드리안이 슬쩍 슬렌더 백작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왕도에서 직접 사절단을 돌려세운 것을 보나, 슬렌더 백작의 말을 들어 보나, 상황이 매우 심각해 보이는데 우리 제국의 소중한 신관들의 희생될 수 있는 장소로 보내겠다? 허락할 수 있는 일이라 보십니까?”
“무언가 잊고 계시군요, 에반드리안 공자.”
“음? 무엇을 말입니까?”
주안이 조용히 에반드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에반드리안 공자의 허락이 필요한 일도 아닙니다.”
“주안 공자…….”
“우린 남부에 손을 빌릴 생각이 없습니다.”
어차피 에반드리안이 이런 태도인데, 남부에게 손을 빌려달라고 해서 도와줄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더욱이 사실상 남부든 마르티네스 공작가이든 힘은 크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병마에 사람의 힘은 무의미하다.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신성력.
그렇기에 주안은 에반드리안의 곁에 앉아 있는 커즈 신관에게 말했다.
“커즈 신관님,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황도에서 합류한 포른 신관은 이미 주안의 편이었고, 대신관의 명령이 없었다 하더라도 주안이 손을 내밀면 잡았을 친 마르티네스 공작파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기에, 주안은 남부에서 합류한 신관들도 함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에반드리안 맥도넬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 남부에 손을 안 빌린다고 하시더니, 금세 마음이 바뀌신 것입니까?”
에반드리안의 말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해주었다.
“에반드리안 공자야말로 잘 모르시나 보군요. 신관들에게 남부든 동부든 그런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흥, 커즈 신관. 들을 필요 없습니다. 돌아갑시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커즈 신관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커즈 신관은 조용히 주안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하지요.”
“커즈 신관!”
커즈 신관의 그 말에 에반드리안이 소리를 치며 이를 갈았지만, 커즈 신관의 시선은 에반드리안이 아닌 주안에게 향해 있었다.
이내 에반드리안 역시 고개를 돌려 주안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매우 차가워 보였지만, 격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남부 통일의 야망은 유우나가 아닌 저 남자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 제 말을 거절하신다 이것입니까?”
“아픈 이가 있는 곳이 곧 신관들이 있을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저희 대신전은 맥도넬 후작가의 가신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큭…….”
커즈 신관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이 남부이기는 하지만, 맥도넬 후작가와는 어느 정도 인연이 있다뿐이지 그렇다고 숙이고 들어가는 그런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필요한 게 있어 서로에게 주고받는 그런 관계일 뿐이다.
자신의 말을 차례차례 무시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던 에반드리안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집무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밴들리 쿼빅이 조용히 뒤따랐다.
“……이거 하나는 똑똑히 기억해 두십시오, 주안 공자.”
주안을 스쳐 지나가며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조용히 말했다.
“그 전염병이 국경 인근까지 퍼진다면, 남부는 아스란 왕국의 모든 길을 끊고 막을 것입니다. 병을 가진 그 누구도 통과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방을 나서다 주안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설령 주안 공자라 할지라도, 통과시켜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합니다, 에반드리안 공자.’
애초에 남부는 이 병마가 퍼졌을 당시 황제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국경을 차단했었고, 그 명령을 내린 것이 바로 에반드리안 맥도넬, 당시의 후작이었다.
몇몇 신관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넘어가려 하였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식량 지원를 막은 전례도 있었기에, 그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에반드리안과 밴들리가 집무실을 나서자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있던 실버론 하셀 자작이 입을 열었다.
“주안 공자님.”
“예, 하셀 자작님.”
“……저 역시 에반드리안 공자와 마찬가지로 반대입니다. 황도로 돌아가시지요.”
정중한 하셀 자작의 말이었지만, 주안은 그 역시 동의해 줄 수가 없었다.
“저희 목적은 아스란 왕국의 외교와 문화, 그것을 기반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아닙니까?”
“맞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 할 수 있는 일마저 외면하고, 이 왕국을 버린다면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 것이라 봅니까?”
도움을 바라며 손을 내민 아스란 왕국이었고, 제국은 그 손을 잡아주었다.
물론 이득을 취한다는 목적은 있었지만,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스란 왕국은 이익이 아니라,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구원을 바라는 손길을 뻗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제국, 주안과 사절단에게는 그들을 살릴 힘이 있었다.
이것을 놓는다면 다음은 없을 것이라고 주안은 생각했다.
‘유우나 공주가 변한 게…… 이거 때문이겠지.’
자신을 팔아서 맥도넬에게 갔던 유우나 공주는 바라는 대로 왕국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디안으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졌을 것이다.
남부와 아스란 왕국의 길을 끊어버린 맥도넬.
길이 막혔다 해서 식량 지원을 멈춘 마르티네스.
아스란 왕국의 도움을 외면한 제국.
그렇게 자신을 버려가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행복은 사라지고, 남겨진 것은 껍데기뿐인 아스란 왕국과 살아남은 간신들뿐.
만약, 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유우나 공주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주안의 이런 생각을 모르는 하셀 자작은 더욱 강경하게 주안에게 말했다.
“주안 공자가 잘못되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하고 계시는군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그러신다는 것입니까?”
“알고 있기에 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알고 있음에도 외면한다면, 이 왕국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알면서 외면하라고요?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말입니까?”
주안의 그 말에 실버론 하셀 자작도 뭐라 말을 하지 못 했다.
기사로서, 주군에게 충성하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아스란 왕국을 쉽게 돕는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병을 치료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말했다시피 초기 증상은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많은 신관이 필요한 일입니다.”
지독하게 악화되었다고 해도, 많은 신성력이 필요할 뿐 고칠 수는 있다.
그저, 마지막 꽃잎이 펼쳐진 후 상처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면 전염성 때문에 평범한 사람은 다가가면 안 된다뿐이다.
하지만…….
‘신관과 신성력이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그리고 주안이 믿는 구석은 다른 이들보다 월등하게 많은 신성력을 품고 있는 자신 그리고 이 성흔에 있었다.
“주안 공자님의 신성력에 대한 소문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뜻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주안 공자의 성흔의 힘과 신성력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병과 치료에 관한 것.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이상 치안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디안이라는 전염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치안 공백으로 인한 범죄는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이며, 거기에 대한 지적이었다.
주안 역시 이 병마로 인해 사망한 사람뿐만 아니라, 이 병마를 틈타 범죄자들이 일으킨 일들로 희생당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안도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유우나와 슬렌더 백작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의 힘이, 서로 외면하는 이 두 세력의 힘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