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57화
미리 사람을 보냈다고는 하나 매우 갑작스럽게 일정을 당겨 방문한 사절단이었다.
그럼에도 네빌 슬렌더 백작은 당황하지 않고 그 일족과 가신들, 그리고 도시의 시민들까지 모아서, 여기까지 오면서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제대로 된 환영을 해주었다.
그리고 사절단은 저택으로 안내받았는데, 한때 후작의 가문이라 그런지 슬렌더 가문의 저택은 매우 컸고, 사절단은 모두 잠시 쉴 수 있다는 점에 매우 다행스러워했다.
저택까지 안내받는 동안에도 큰 소란이 없던 것을 보면, 슬렌더 백작이 이곳에선 나름대로 유능한 인물이 아닌가 하는 평이 흘러나왔다.
“아스란 왕국, 슬렌더 가문의 가주 네빌 슬렌더라고 합니다.”
40대의 중년인 그는 매우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남성이었다.
옅은 금발은 단정하게 쓸어 넘겼으며, 기사의 가문답게 드러난 그의 몸은 전체적인 근육이 좀 적다뿐이지 단단함과 유연함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도 당당했고, 예의 발랐으며, 두려움도 전혀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갑자기 급히 방문하게 되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절단의 호위 총 책임자인 실버론 하셀 자작이라고 합니다.”
“자작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신 것, 가문의 영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실버론 하셀 자작은, 슬렌더 가문이 전쟁을 반대하다 작위 강등이 된 것을 아는 듯, 네빌 슬렌더 백작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때와는 조금 달랐다.
“저 아저씨……. 꽤 강한데?”
“응? 강해요?”
곁에 있던 워랜의 말에 주안이 갸웃했다.
“강해. 여기 아스란 왕국에서 본 인간 중에서는 가장 강해 보여.”
실버론 하셀 자작의 태도나 워랜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확실한 실력자인 듯했다.
‘아, 그렇구나. 슬렌더…….’
주안도 곰곰이 생각하다 마법 팔찌에 저장되어 있던 아스란 왕국 주요 귀족들에 관한 인적사항이 떠올랐다.
아스란 왕국 최초로 랭크 7에 도달했던 가문.
그리고 그 후로도 꾸준하게 고랭크의 기사를 배출하는 아스란 제일의 무가.
그래서 그런가. 단순히 네빌 슬렌더 백작과 슬렌더 가문이 친 제국 성향이라는 것 이전에, 그가 지닌 기사로서의 강함이 어느 수준인지 알기에 실버론 하셀 자작도 좀 더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듯했다.
저런 가문이 유우나 공주의 편이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했다.
“그런데 워랜 경.”
“응? 왜?”
“……볼 때마다 얼굴이 수척해지고 계시네요?”
“큭……!”
늘 푹 자고, 늘 게으르던 워랜의 행동 패턴에 변화가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풍신이 게으른 워랜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난 검을 배우고 싶은 건데……. 대체 그놈의 정신 수양이 뭐라고 온종일 앉아서 명상을 하라는 거냐고.”
“……명상하는데 왜 다크서클이 생겨요?”
“잠도 못 자게 곁에서 동방의 말로 자꾸 이상한 말을 내뱉는단 말이야.”
“……고생하시네요.”
“크으……!”
풍신에게 검을 배울 수 있다는 것에 좋아하던 워랜이었지만, 검은커녕 매일 정신 수양을 명목으로 가만히 앉아서 명상만 하니, 아주 죽을 지경인 듯했다.
그래도 뭐라 반항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것은, 주안의 단단한 주의도 있었지만 워랜의 결심도 컸다.
‘뭐, 이대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검을 배울 거 같지만.’
워랜은 투덜거렸지만, 최근 풍신은 워랜이 이렇게 투덜거려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런데 이곳은 사그레스가 잠잠한 듯하군요.”
“예, 이틀 전부터 잠잠해지더니, 오늘은 대부분 병세가 회복되어 외출이 가능한 정도까지 왔습니다.”
네빌 슬렌더 백작은 주안의 곁에 자국의 공주가 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간단히 고개를 숙여 인사만 건냈을 뿐 완벽히 무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도 유우나는 불쾌감이나 분노 같은 그런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사절단에 사그레스로 의심되는 분이 계십니다. 죄송하지만, 그분이 지낼 만한 방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으로 마련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네빌 슬렌더 백작이 실버론 하셀 자작의 말에 답한 후 근처의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이내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가 준비를 하려는 듯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리고 가주인 네빌 슬렌더 백작이 직접 사절단의 주요 귀족들을 안내하였고, 그를 따라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 * *
전 후작가라 저택은 컸지만, 아스란 왕국의 사정이 썩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가문 자체가 기사의 가문이라 검소하게 지내는 것인지 몰라도 꽤나 삭막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요 귀족들은 딱히 할 일이라는 게 없었다.
원래 일정은 저녁쯤에 도착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몇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슬렌더 백작가에서 준비한 것이 모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남고 할 일은 없는 이 심심함이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주안이 침대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쭈욱 켜자 근처 의자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세라타가 갸웃했다.
“도련님?”
“도시 구경하러 가자, 세라타.”
“네?!”
주안의 말에 세라타가 화들짝 놀랐다.
“가, 갑자기 왜…….”
“여기 오는 동안 제대로 구경도 못 했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사그레스 때문에 외출을 금지시켜 버린 실버론 하셀 자작 때문에 막상 아스란에 들어왔어도 제대로 된 구경조차 못한 사절단이었다.
맞이하는 영주의 저택이나 시장 공관에서 지낼 뿐이었으며,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늘 아랫사람들과 정말 일 때문에 온 사람들뿐이었다.
물론 그 바쁜 사람에 주안은 늘 제외되어 있었다.
“여긴 사그레스도 이미 다 나았다고 하잖아? 게다가 다른 도시들보단 상황도 훨씬 좋아 보이니, 조금 둘러볼 만하지 않을까?”
3일 동안 여러 도시와 마을을 지나왔지만 나갈 수 없었으니, 답답함이 매우 심했다.
이건 주안뿐만이 아니라 사절단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 하는 게 우리만이 아닐걸?”
주안의 그런 예상은 정확했다.
실제로 이미 몇몇 귀족 자제들은 바깥에 나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실버론 하셀 자작도 이곳 메리다는 나름대로 치안도 잘 유지되고, 여타 영지들과는 달리 친 제국적인 성향의 영지인지라 딱히 막지는 않았다.
단, 외출할 때 반드시 호위와 함께라는 전제를 달았을 뿐이다.
“뭐, 일단 하셀 자작님에게 물어보고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우음…….”
“자, 갑시다. 이왕이면 토미랑 솔도 데리고 나가자.”
주안이 세라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후 등을 밀며 방문으로 인도하였다.
이런 주안의 말에 잠시 갸웃하던 세라타가 말했다.
“그런데 소니아 언니랑 워랜 경은요?”
세라타의 말에 주안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방문을 직접 열어 세라타와 함께 방을 나서며 말했다.
“소니아 누나는 자고 있겠지……. 마법 거울 충전을 잔뜩 시켰으니까.”
“……불쌍해요.”
몇 번인가 마법 거울 충전을 시키는 모습을 세라타도 보았지만, 한 번 할 때마다 반쯤 기절해, 반나절은 잠들던 소니아를 떠올리니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왜 이 통신용 마법 거울이 팔리지 않은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워랜 경은 못 나올 거야.”
“네? 어째서요?”
“또 풍신 경이랑 같이 정신 수양을 목적으로 명상을 하고 있을 거니까.”
“……그거 정말 괜찮은 거예요?”
“아마도……?”
나날이 수척해져 가는 워랜의 얼굴을 떠올리니, 걱정스러운 세라타였지만, 주안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설마 사람이 명상 좀 한다고 죽겠어?’
그리고 쉽게 죽을 워랜도 아니기에 주안은 안심하며 세라타를 데리고 토미와 솔을 찾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오…… 외국!”
“흐익?! 다, 다들 옷이 너무……?!”
“과일이 잔뜩?!”
시장으로 나온 일행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주안이 감탄사를 터뜨렸고, 토미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손가락 틈으로 주변을…… 특히 여성들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솔은 시장의 가게마다 가득 쌓인 과일들에 눈이 반짝였다.
남쪽 지역인지라 열대 과일들을 주로 파는 듯했지만, 고급 과일들은 대부분 수출하는 탓에 흔한 과일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흔하다 해도 아스란 왕국이나 제국의 남부에서나 흔하지, 동부지방 태생인 솔이나 주안에겐 신기한 것들이 잔뜩이었다.
게다가 제국으로 따지면 지금은 봄일 터인데, 습하고 더운 아스란 왕국인지라 다들 옷차림이 매우 가벼웠다.
주안 일행 역시 가볍게 한다고 나왔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오빠…….”
“윽?!”
싸늘한 세라타의 말에 토미가 움찔 놀란다.
“안 꼬집힌 게 다행이지……. 쯧쯧. 한 살 더 먹더니, 애가 왜 이렇게 된 거람.”
“도, 도련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신 거예요?”
“훗,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지. 내가 몇 살인데 애들을 보며 헬렐레 하겠냐.”
“……저랑 동갑이시잖아요.”
“정신적인 연령을 보라고, 정신적인 연령. 이 엉큼한 어린애야.”
“으…….”
뭐, 눈길이 안 간다면 그건 어딘가 문제가 있는 남성이겠지만, 주안은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좀 철이 없는 노인네였긴 했지만, 가릴 거 다 가리고 있는 여성들을 보며 토미처럼 행동할 나이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도시는 확실히 이전 도시들이랑은 완전히 다르네.”
“정말 활기차 보여요, 도련님.”
“응, 그렇지?”
사그레스가 한번 휩쓸고 갔지만, 그거야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주안도 그 밝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근처 찻집으로 걸음을 옮긴 주안은 바깥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와 이곳의 과일 디저트를 주문한 후 바깥 풍경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긴 슬렌더 백작님이 정말 잘 다스리는 것 같네.”
이 찻집 역시 꽤 고급스러워, 평범한 이들은 방문하기 꽤 어려울 것처럼 보였지만, 다수의 인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부분 외지인으로, 제국의 사람들도 다수 있었지만, 사절단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곳은 아스란 왕국에서 그나마 기사와 병사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영지라 그렇습니다, 주안 공자님.”
“응?”
낯선 남성의 목소리에 바깥을 보던 주안이, 그리고 과일 디저트를 더 시키려는 솔과 주문을 받으며 돌아다니는 여성 직원을 훔쳐보던 토미까지 갸웃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미르 공자?”
“사미르 슬렌더가 주안 공자님께 다시 한번 인사 올립니다.”
남방의 사람답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제국 남부의 사람들과는 달리 짧고 옅은 금발 머리카락의 젊은 남성, 슬렌더 백작가의 첫째인 사미르 슬렌더가 주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시, 시아 슬렌더가 주안 공자님께 인사 오, 올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미르 슬렌더 뒤에 숨어 있던 자그마한 체구의 꼬마 여자아이가 아이답지 않게 과한 예를 갖추며 주안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미르 공자가 여긴 왜…….”
사절단을 맞이하면서 그를 보고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런 그가 이곳에 왜 있는지 몰라 주안은 갸웃했다.
사미르 슬렌더가 하얀 이를 드러낼 정도로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다들 바빠서 제가 대신 차를 주문하러 나왔습니다. 많은 양을 준비했다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행분이 많으셔서 말이죠.”
이곳은 찻집을 겸해서 같은 건물에서 다양한 찻잎도 파는 곳이기에 그런 듯했다.
“시아 양도 함께 말입니까?”
“저는 차가 뭔지 도통 몰라서……. 제 동생이 이런 쪽에 박식하거든요. 제국을 동경해서 그런지 저희 집에서 차를 마시는 건 시아뿐인지라…….”
아스란 왕국 사람들은 차를 썩 좋아하지 않으며,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과일의 즙을 짜서 만든 주스였다.
그래서 사절단을 위해 준비된 차가 있었겠지만, 모자란 부분을 보충할 만한 차를 집에서 소비하지 않기에 그것을 사러 나온 듯했다.
“그런데 병사들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아, 저희 왕국 사정이 썩 좋지는 않다는 건 주안 공자님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미르 슬렌더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다지 밝은 미소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제국의 많은 귀족과 상인에게 선이 닿아 있어서 그런지 여타 귀족들이나 뭐, 자칭 아스란 왕국 해방군인지, 반란군인지 하는 것들도 저희 영지는 건들지 못하거든요.”
“아…….”
제국과의 전쟁 이전에도 거의 유일하게 전쟁을 막고자 했던 가문이었고, 여러 고초도 겪은 끝에 작위까지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은 게 바로 슬렌더 가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전쟁을 일으켰던 이들은 주안의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에 의해 모조라 목이 잘렸고, 아스란 왕국 고위 귀족의 대부분이 물갈이되었다.
그리고 슬렌더 가문은 오히려 제국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친 제국파로 여겨졌고, 제국 내에서도 슬렌더 가문을 아스란 왕가보다 더 중요시할 정도였다.
그 때문에 여타 귀족들이든 뭐든 슬렌더 가문과 척을 질 만한 짓을 저지르지 못했고, 오히려 눈치를 살펴야 했다.
혼란스러운 아스란 왕국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람들의 미소를 볼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런 걸 동방의 말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던가요, 아하하!”
“흠…….”
꽤 긍정적인 사미르의 모습을 보니 이곳의 사정은 확실히 좋은 듯했다.
“사절단이 딱 도착하기 직전에 사그레스도 해결됐고, 실버론 하셀 자작님도 저희 가문을 잘 대해주셔서 정말 다행이다 싶습니다.”
“사그레스가 정말 일찍 시작되었나 보군요. 국경 근처에서도 벌써 퍼진 걸 보면 꽤나 이른 시간에 시작된 듯한데.”
“예, 이번 겨울…… 이라고는 해도 뭐, 저희 아스란 왕국에선 겨울도 따뜻하지만……. 어쨌든 한 달은 일찍 시작되었죠. 그거 때문에 물류 운송도 상당히 차질을 빚었고, 제 동생도 엄청 고생했거든요.”
“아…….”
사이가 좋은 남매인 것인지, 사미르는 거리낌 없이 시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 보이려고 아침부터 정리한 듯한 머리카락이 마구 헝클어지자 시아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지만, 우악스러운 오빠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응?”
그 모습을 기분 좋게 지켜보던 모두와는 달리, 주안의 눈에는 시아의 몸에 난 이상한 반점이 들어왔다.
오빠의 거친 행동에 버둥거린 탓인지 허리에 감아 놓은 허리천이 흘러내렸고, 매끈하게 드러난 옆구리 부근에 붉은 반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 허리에, 반점은…… 문신 같은 건가요?”
“아?!”
남부 대밀림의 원주민들이나 아스란 왕국에선 문신이 꽤나 흔하였기에, 신기하기도 하여 주안이 물었지만, 시아의 얼굴은 새빨개졌고, 사미르는 동생을 괴롭히던 손길을 멈춘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 가문에서 문신은 금지거든요.”
“네? 하지만 저건…….”
“이번 사그레스가 좀 지독했는지 이런 반점들이 생기는 사람들이 종종 생겼습니다, 공자님. 그나마 크게 흉하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없어질 수 있을지…….”
사미르의 걱정에 시아가 허리천을 끌어당겨 배와 옆구리 부분을 억지로 감추듯 감아버렸다.
‘뭔가 좀…….’
낯이 익었다는 게 문제다.
붉은 반점이라고는 하나, 점처럼 보이는 다섯 개의 점.
그리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것.
‘사그레스……? 설마……?!’
주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아에게 다가갔다.
“시아 양,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네……? 꺅?!”
“도련님?!”
주안이 시아의 앞으로 가서 쪼그려 앉은 뒤 강제로 시아의 허리천을 벗겨내었다.
“고, 공자님……!”
“잠시만, 잠시면 됩니다.”
허리 부근의 점은 다섯 개였다.
새빨갛게 보이는 것은 피부가 부어서 그런 듯했고, 그중 하나의 점은 형태가 달랐다.
“……설마?”
손을 가져다 대려던 주안이 황급히 시아에게서 물러났다.
주안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시아를 바라보자, 다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고, 처음에는 놀랐던 시아 역시 마찬가지로 주안을 바라본다.
“저기, 공자님……?”
주안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사미르와 시아뿐만이 아니라, 세라타나 토미, 그리고 솔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들의 이상하다는 눈에도, 주안은 뭐라 제대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새파랗게 질려서, 더듬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붉은 꽃, 디안……?”
마약으로 분류되는 꽃, 디안은 새빨갛고 꽃으로, 겨울의 끝자락에 피었다가 봄에 지는 신비로운 식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디안이라는 이름은, 이 다섯 개의 점이 꽃잎처럼 활짝 피었을 때, 이 붉은 꽃 디안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고, 이 불길한 마약류 꽃의 이름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과거, 아니, 미래…….
아스란 왕국을 초토화시킨 서방 대륙 남부 최악의 전염병…….
붉은 꽃 디안이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