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53화
겨울의 끝자락이라 그런지 황도에서 남부로 내려갈수록 날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주안의 마차는 날씨에 상관없이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환기도 알아서 잘되기에 쾌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꺼운 옷을 입고 있던 이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사절단이 하는 일이라고는 남부로 이동하고, 중간에 도시나 영지에 들러 환영을 받은 뒤, 쉬고 다시 정비 후 이동하는 게 전부였다.
제국 내에서는 할 일이 딱히 없었으며, 목적지인 아스란 왕국에 도착해야 할 일이 생기는, 참 재미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사절단에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들과 교류하는 사람들은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단지 외교만이 아닌 문화 사절이기에, 문화와 예술 분야의 여러 유명한 사람도 있었고, 신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귀족들에겐 그들에게 직접 듣는 이야기만큼 재미난 일도 없을 것이다.
“주안 공자님은 책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매일 책을 읽으시는데…….”
크고 거대한 것도 모자라 화려하고 흔들거림이 전혀 없는 마차를 타는 것은 처음인 듯 유우나 공주는 매우 신기해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딱히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그녀는 그나마 편한 주안에게 자주 질문을 던졌다.
“……할 일이 없으니까요.”
책을 썩 좋아하는 주안은 아니지만, 많은 지식을 억지로 마법 팔찌에 담아내야 했기에 웬만해선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억지로 읽으려 하였다.
새 도시에 들리면 새 책을 구입하였고, 이전의 책들은 이 지나치게 큰 마차의 짐칸에 얼마든지 들어갔다.
‘경량화 마법이란 참 좋아.’
이번에 읽고 있는 이 책에 담긴 마법과 환상의 동물에 관한 내용을 떠올리다, 주안이 픽 하고 웃었다.
드래곤이라는 전설적인 동물이 이 서방 대륙에 있을 당시에는, 다양한 마법들이 있었다고도 하며, 지금 사용하는 마법들은 모두 그 동물에게서부터 전해졌다는 전설도 있었다.
‘무슨 동물이 마법을 쓴다고…….’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주안을 따끔하게 혼냈을 생각이었지만, 이미 수천 년도 더 전에 사라진 드래곤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나이 지긋한 학자나 마법사, 전설을 좋아하는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뭐, 드래곤 하트라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먹을 뻔했지만, 드래곤 하트가 대단한 영약이라는 것 정도는 주안도 알고 있었다.
특히 마법사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구하려고 한다는 사실도 최근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확실히 그 드래곤이라는 게 대단하긴 한 듯했다.
마치, 지금의 동방 대륙에 존재하는 용과 비슷한 존재가 아닐까.
‘그러면 좀 무섭긴 한데…….’
과거이자 먼 미래의 일이긴 하나, 당시 동방 대륙의 슌 제국을 수호하던 용 파사가 자신이 지키던 제국의 수도를 불태우고 자살한 사건은 동방 대륙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황가와 고위 귀족 대부분이 몰살당한 그 사건으로 인해 슌 제국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동방 대륙은 순식간에 전란에 휩싸였다.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먼 서방의 땅, 마를렌에도 다수의 난민이 몰려왔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수호룡 파사가 진짜 실존하고 있나, 소문만 무성했었는데…….’
슌 제국의 수호룡 파사는 그 이름과 소문만 많고 그 실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긴 했지만, 다른 용들은 아니었다.
서방 대륙과 동방 대륙을 잇는 항로에 자주 나타나는 해룡 카르카노와 동방 대륙 천밀 사막의 지룡 사련화.
그리고 동방 대륙의 천산이라 불리는 신령산의 주인인 궁룡 하랑.
슌 제국의 수호룡 파사를 제외하곤 모두 확인된 용들이었다.
‘한 번쯤 보고 싶기는 하지만…….’
특히 해룡 카르카노는 사람들 앞에 등장하기를 좋아하는 용이었다.
태풍이 오기 전, 항로의 배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도 하며 무풍지대에 갇혀 버린 배를 구해준 일화도 있을 정도로 그 용은 인간에게 매우 친밀했다.
‘여기도 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으려나.’
주안이 다시 책을 고쳐 잡고 읽으려 하자, 유우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주안 공자님. 그 소문, 사실이에요?”
“무슨 소문 말씀이시죠?”
“주안 공자님의 손길이 스치면 미남 미녀로 변한다는 소문이요.”
“…….”
주안이 스윽 고개를 돌려 서로 어깨와 머리에 기대어 곤히 낮잠을 자고 있는 소니아와 세라타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넓고 크고 푹신하여 누워서 잠을 청해도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저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잔소리하긴 좀 미안하다.
“헛소문입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런 것치곤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만은 왠지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미남 미녀들만 계셔서요. 말까지 예쁘잖아요.”
“흠…….”
주안이 술에 취해서 공작가의 저택 전체에 신성력을 부여했더니, 거기에 포함된 사람이나 말, 벌레, 새, 물고기, 거기다 물건들까지 번쩍번쩍해졌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령의 땅이 좀 좋아서요. 미남 미녀만 태어나는 듯하군요.”
“솔 씨를 보면 아닌 듯한데…….”
“살 빼면 미남이 될 겁니다. 그 형님이신 아르베리아 경을 보시면 알 겁니다.”
그 살을 언제 빼냐가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주안은 솔이 죽기 전의 살이 빠진, 근육질 모습을 알고 있었다.
“도련님, 잠시 괜찮겠습니까?”
“응? 무슨 일이세요, 아르베리아 경.”
아르베리아가 말을 타고 마차 곁으로 다가와 열어놓은 창 너머로 주안에게 물었다.
“실버론 부단장님이 여기 앞의 호숫가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고 합니다. 점심때이기도 하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면 어떨까 하여 공자님의 의사를 묻고자 하셨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하세요.”
“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호위 책임자가 베일 리 준남작이라면, 남부 귀족들의 호위 책임자는 맥도넬 후작가를 모시는 쿼빅 자작가의 후계자인 밴들리 쿼빅이었다.
하지만 이 두 파벌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바로 황가에서 보내준 황실 근위대 부단장, 실버론 하셀 자작이었다.
그는 제국 내에서도 몇 안 되는 랭크 7의 절대자 중 한 명이었으며, 그와 함께 그가 이끄는 황실 근위대 일개 조와 중앙 기사단 일개 대대가 함께하게 되었다.
사실 호위로는 정말 과하다 할 정도로 실력자들이 집중된 이번 사절단은, 사절단이라는 타이틀만 뗀다면 아스란 왕국 정벌군 최정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니 주안의 엄마인 안젤라도 안심하고 아들을 배웅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엄마한테 점심 먹는다고 연락해야 하나.”
책을 덮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 말에 유우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 점심, 저녁도 모자라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에게 마법 통신용 거울을 통해 연락하는 주안의 모습이 참 신기했지만, 사이가 좋아 보이는 그 관계가 유우나로선 매우 부럽기도 했다.
* * *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일행들과 남부 귀족들은 같은 사절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예 무시하는 듯했지만, 주안은 오히려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괜히 트러블이 생기는 것보다 서로 각자 할 일만 하는 것이 나았다.
“후웁, 하아…….”
주안이 마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며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했다.
주변에서는 이미 점심 준비에 들어갔고, 넓게 펼쳐진 호수를 보니 실버론 하셀 자작이 왜 도시가 아니라 이곳에 멈추어 점심을 먹자는 것인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뭐, 가끔 이런 것도 좋겠지.’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도시와 영지에 들러 또다시 환대를 받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가끔 소풍을 나온 느낌도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뒤를 이어 유우나가 마차에서 내렸고, 소니아와 세라타가 멍한 모습으로 뒤따랐다.
“하암…….”
소니아가 길게 하품을 하며 아직 졸립다는 듯 눈을 비비는 모습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밤에 안 자고 뭐 하셨기에 아침부터 워랜 경처럼 계속 잠만 자세요, 소니아 누나.”
“밤에도 잘 잤어요……. 저 마법 거울, 마나를 엄청나게 잡아먹는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적당히 통화 좀 하세요.”
“제가 안 걸면 엄마한테 연락 온단 말이에요.”
“으……. 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몇 시간이나 통화하시는 거예요. 제발 티타임 정도는 혼자 하시라고 말씀드려요.”
흔들림이 없는 마차 안에서 갖는 티타임이라니……. 그게 가능하다는 것도 놀랍지만 마법 통신용 거울을 통해 먼 거리의 황도에 있는 엄마와 티타임을 가지는 아들도 진짜 이상했다.
주안도 처음에는 좀 이상하고 어색했는데, 하다 보니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그리고 솔직히 엄마를 설득할 자신이 없기에 주안은 고개만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들을 바라보다, 살짝 찌푸렸다.
“그것보다, 저쪽은 또 시작이네요.”
“어휴, 워랜 쟨 질리지도 않나. 이쯤 되면 그냥 숙이고 들어가도 되잖아.”
“고개를 숙이는 워랜 경은 상상이 안 되네요.”
“하아……. 저 멍청이.”
소니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주안도 솔직히 워랜의 모습을 보면 비슷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주안과 소니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곳을 보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 워랜이 풍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 * *
“크억?!”
워랜이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그대로 바닥을 굴러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풍신은 그런 워랜을 내려다보며, 왼손으로 옷깃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고는 차갑게 말했다.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네, 워랜 경.”
“크으…….”
워랜은 그를 노려보며 일어나려 했지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자네가 제노폴 제국의,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사람이라 하지만.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다네.”
“으윽……. 그러니까, 한 수 좀 가르쳐 달라고요. 이렇게 개 패듯 패지 말고.”
“동방에는 이런 말이 있는데, 알고 있나?”
풍신이 워랜을 흘겨보다 주안과 유우나 공주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미친개에겐 매가 약이라고 하지.”
“으…….”
참으로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워랜을 아는 이들에겐 공감이 가는 말이라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지금도 워랜이 제멋대로 풍신에게 목검을 휘두른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풍신의 행동에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실버론 하셀 자작도 어쩌지 못한 절대 강자.
그가 며칠 전 보여준 무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것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워랜은 풍신이 동방의 무사라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검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대련을 신청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워랜도 아니었고, 기어이 주안과 유우나 공주까지 끌어들여 풍신과의 대련을 성사시켰다.
‘솔직히 나도 동방의 검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도운 것이지만.’
워랜의 부탁으로 시작된 것이긴 하나, 사실 주안도 워랜의 검이 동방의 검과 얼마나 비슷하고, 또 동방의 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방의 천재와 동방 무사의 대련.
심심해하던 사절단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대련은 너무나 간단히 끝나는 바람에 많은 이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었다.
단 한 수.
워랜의 검을 손쉽게 피하는 것도 모자라, 지금처럼 맨손으로 워랜을 상대한 풍신은 한 번의 초식으로 워랜을 무너뜨렸다.
그것을 구경하던 사절단의…… 특히 많은 기사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동부의 마르티네스 공작가만이 아니라 남부 귀족들 중에서도 워랜의 실력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 워랜을 단 한 수만에 제압을 하니, 실버론 하셀 자작까지 대련을 요청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기사도 충만한 집단인 황실 근위대의 부단장인 그였으니까 말이다.
상대의 신분이 어떻고, 나이가 어떻고, 성별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강자면 강자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서방 대륙이었다.
그리고 그는 워랜을 상대하던 때와는 달리 검을 들고 실버론 하셀 부단장과의 대련에 임했다.
거기에서 보여준 무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동수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풍신은 한쪽 팔과 한쪽 눈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런 실력자가 대체 왜 아스란 왕국의 공주를 호위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풍신 경 덕분에 지금은 유우나 공주를 깔보는 사람도 많이 없어졌지만.’
풍신이 워랜에게 보여준 무위나, 실버론 하셀 자작과의 대련이 있기 전까지는, 아스란 왕국의 공주라는 이유로 사절단들이 매우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나마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은 주안에 의해서 잠잠한 편이었지만, 남부 귀족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풍신이 그 실력을 내보이고 나니, 바라보는 시선도 변했다.
그가 아스란 왕국의 사람이든, 동방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강자에 대한 예우를 해주었다.
그런 그가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안과 유우나 공주에게 걸어왔지만, 주안은 그 너머에 있는 인물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워랜과 풍신을 지켜보는 남부 귀족들이 다수 있었다.
얼마 전 실버론 하셀 자작에 의해 서로 통성명 정도는 하였던 남부의 주요 귀족들이 있었고, 그중 에반드리안 맥도넬 역시 보였다.
그는 상당히 젊은 인물이었고, 남부의 귀족답게 머리카락은 매우 길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증거였지만, 그의 눈은 풍신을 집요하게 뒤쫓고 있었다.
‘에반드리안 맥도넬이 유우나 공주와 결혼한 게 풍신 때문인가…….’
풍신의 실력을 단순하게 본다면 랭크 7 이상에 해당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랭크 8에 다다랐던…… 동방의 말로는 초월경에 이른 절대자였을 수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저런 큰 상처를 남긴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놀랄 정도다.
‘정말, 동방 대륙은 괴물들이 많아…….’
소수의 절대자가 포진된 동방과 다수의 강자가 포진된 서방.
서로 정말 상반된 대륙이었다.
다만 그런 풍신의 대단한 실력으로도 아스란 왕국의 혼란이 해결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서방의 대륙은 항상 한 명의 절대자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다수의 강자에 의해 움직이는 땅이다.
토미가 그 절대적인 힘을 앞세워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제노폴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도, 든든하게 받쳐주는 강자 집단인 신왕조 덕분이었다.
그리고 토미의 힘에 반한 집단은 신왕조의 여왕, 유우나에 맹세를 함과 동시에 함께 부패한 귀족 집단을 모조리 정리해 버렸다.
현재 유우나에겐 그녀를 따르던 토미도 없었고, 다수의 강자도 없었다.
그저 혼자인 풍신으로서는, 조금 외롭고 쓸쓸한…… 그런 강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