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52화
주레인 공작과 유우나의 대화는 꽤나 오랜 시간 지속되어,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유우나가 응접실을 떠나자, 주레인 공작은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주레인 공작의 모습을 보다 못한 안젤라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유우나라는 공주랑 이야기는 잘 안 되셨나 봐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말이오. 하지만…… 조금 안쓰럽긴 하오.”
“흥, 안쓰럽기는 무슨…….”
하지만 안젤라 역시 거의 맨몸으로 그 먼 아스란 왕국에서 제국까지 찾아와, 좋은 대접도 받지 못하면서도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는 타국의 공주가 대견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아스란의 공주라는 점은 그 대견함도 가릴 만큼, 아스란 왕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컸고, 그러한 감정은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아스란 왕국의 사정이 나쁜 것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듣게 되니 썩 유쾌하진 않더이다.”
“자업자득. 몰라요?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받고 있는 거예요.”
안젤라가 조용히 비어 있는 주레인 공작의 찻잔에 차를 채워준 후 자신의 잔에도 채워나갔다.
그 죗값으로 한두 해도 아닌,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을 혼란 속에서 지내는 아스란 왕국이다.
그리고 제국은 그들이 연명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는 있지만, 마치 오래도록 그 죗값을 치르고 반성하라는 듯 왕국이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지원해 줄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사절단 역시, 이대로 망하지 말라는 배려처럼 보였다.
“알고는 있소. 그렇기에 동정은 하여도 도움을 주는 것은 꺼려지는 것이니 말이오.”
“그 공주라는 아이는 뭘 바라고 당신을 만나려, 우리 주안이까지 꼬드긴 거예요?”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오.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우리와 합작 사업을 하나 추진해 주었으면 하더이다.”
“웬 합작 사업?”
찻잔을 들고 차의 향을 음미하던 안젤라가 주레인 공작의 말에 갸웃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가문의 힘을 방패막이로 삼아 민생을 안정시킬 사업을 좀 벌였으면 하더이다. 허허, 그렇게 대놓고 반대파 귀족들의 방패가 되어달라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어지더이다.”
“……참 당돌한 아가씨네요.”
“그만큼 절박하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오.”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힘을 빌려 아스란 왕가와 함께 국책 사업을 하나 추진하며 민생을 안정시킨다.
특히 왕가를 좌지우지하는 귀족들에게 제국은,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은 치를 떠는 것보다 두려움이 더 큰 존재.
만약 반대를 외치고, 방해를 하려 해도,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유우나 공주는 그것을 통해 왕국의 안정과 왕가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와 가깝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 귀족들의 압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비록 작은 사업이라도, 그들에겐 너무나 큰 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들어주시려고요?”
“말했잖소. 나 혼자 결정할 부분은 아니라오. 마를렌에 계시는 아버지와도 상의해야 하고, 허락도 받아야 하며 가신들의 동의도 구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오.”
가주라고 해서 그 전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벡브란 전대 공작이나 많은 가신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황가의 허락도 필요한 사안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겠소? 도움을 주겠소, 아니면 매몰차게 내치겠소.”
“무슨 당연한 소리를…….”
안젤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절대로 안 도와줄 거예요.”
“하하……. 당연한 질문이었나 보오.”
제국의, 그리고 그 제국의 황녀였던 안젤라였기에 그들과 엮이는 것 자체에 불쾌해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아스란 왕국의 왕가는 사실 전쟁을 일으켰던 왕가와는 아주 옅은 피만 이어져 있다뿐이지 거의 남이나 다름없었다.
유배된 채 버려졌던 왕가의 자손을 억지로 앉혀놓은 장식품 같은 꼴이었지만, 어쨌든 그나마 남아 있는 유일한 전통성 있는 왕가라는 점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전쟁범죄자의 후손이라며 조롱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가 전쟁범죄를 일으킨 자의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주레인 공작은 안젤라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과 국가와 가문의 일은 별개다.
유우나 공주의 사업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통해 제국과 가문이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인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물론 이 사업을 통해 제국의 비판을 쏙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이득이 없다면 제국도, 마르티네스 가문도 유우나 공주의 손을 잡아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일을 유우나 공주가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는 차후 판단해야 할 문제며, 지금은 다른 일이 우선이기에 주레인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내인 안젤라에게 말했다.
“그만 자도록 합시다. 내일, 아니 오늘이구려. 아들 배웅하는 자리에서 졸면 안 되잖소.”
“오늘은 주안이랑 잘 거예요.”
“음? 나도 같이 잘 생각이었소만…….”
“으…….”
주레인 공작이 웃으며 말하자, 안젤라가 볼을 잔뜩 부풀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레인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안젤라가 투덜거리며 응접실을 나와 주레인 공작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방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주안의 허락은 전혀 필요가 없었다.
두 부모님이 이미 결정한 상황이니 말이다.
* * *
아버지와 유우나 공주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것인지, 아침이 되었지만 주안은 알 수가 없었고, 알아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바빴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사절단이 떠나는 일로 저택은 매우 바쁘게 돌아갔고, 짐들을 다시 점검하고 말을 관리하며, 마차를 살피는 등 할 것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물론 주안은 나름 여유로웠지만 상대적인 것이지, 그 역시 엄마인 안젤라에게 붙잡혀 이런저런 일들을 당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새로 산 마차에 내재된 마법적 기능을 알려주고, 황립 마탑에서 주문한 마법 물건들을 다시 점검하며 주안에게 꼼꼼하게 알려주기도 하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단단히 주의도 주었다.
아주 주안의 안전을 과하게 걱정하여 마법 무구 물품들로 아들을 완전 무장시키는 바람에 주안도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누가 보면 적진으로 몰래 침투해 왕의 목이라도 가지러 가는 줄 알겠네.’
그 정도로 다양한 마법 무구들을 설명해 주지만, 주안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대충 설명서만 마차 안에 넣은 후 가면서 살펴봐야 할 듯했다.
그래도…….
“마법 통신은 하루에 몇 번이라고 엄마가 말했지?”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자기 전……. 더해서 엄마가 생각 날 때와 엄마가 신호를 보낼 때마다…….”
“좋아. 꼭! 엄마가 연락하면 받아야 해, 알겠지?”
“……네.”
울며불며 매달릴 엄마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주안을 배웅하는 게 매우 깔끔했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초장거리 영상 통신용 마법 거울.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비싸고 커서 이게 팔릴까 싶었던 황립 마탑의 쓸데없는 정수가 잔뜩 담긴 이 마법 물품은, 대륙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과도 대화가, 아니, 단순한 대화가 아닌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개발된 것이었다.
문제는 일단 크기가 커서 휴대가 불가능하고, 장착된 마나석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어 줄 마법사가 필요했으며, 한 쌍으로 제작된 이것을 상대방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다른 마법 통신구와는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지나치게 크게 개조된 마차에 잘 설치가 되었다는 게 다행이지 싶다.
‘……왜 이딴 걸 만들었을까.’
마법사들은 분명 천재들이 많지만, 천재와 바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처럼 정말 이상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 같았다.
이 마법 거울 담당이 된 소니아의 안색이 처음으로 새파랗게 질린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었지만, 위체니아도 도와준다는 것에 울음까지 터뜨리진 않았다.
“그럼, 갔다 올게요.”
“응! 엄마도 나가서 주안이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게.”
“네…….”
주안을 한 번 안아준 후 해맑게 웃으며 배웅해 주는 엄마의 모습은 밝아 보이긴 했지만, 주안은 엄마가 억지로 밝은 척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봐온 엄마였고, 가장 가깝게 지낸 엄마였다.
마법 통신용 거울로 매일 볼 수 있다지만, 손을 잡고 안아줄 수 없다는 사실이 적잖은 허전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배워올게요, 엄마.’
황도와 마를렌, 그것도 저택과 공작성만이, 과거와 현재의 주안이 가장 잘 알던 세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주안은 자신의 둥지를 벗어나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딜 날이 왔다.
* * *
중앙 광장에 모인 사절단과 그 사절단을 축하해 주기 위한 시민들.
그리고 귀족들과 함께 황제 폐하까지 참석하자, 하나의 거대한 행사처럼 변했다.
물론 지겨운 황제 폐하의 연설은 졸아도 이상하지 않았었고, 그게 끝났을 때 나온 우레와 같은 박수는 연설의 멋짐이 아니라,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의 박수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말과 마차에 오르며, 중앙 광장에서부터 쭉 뻗은 대로를 따라 행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안 역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자신의 마차에 오르려 하였다.
“주안 공자님!”
“응?”
밝은 그 목소리에 마르티네스 공작가 일행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안 역시 마차에 오르던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 틈에서 작은 망아지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난 유우나 공주와 풍신이 주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공주님?”
그리고 금세 주안의 앞까지 달려온 유우나 공주가 넙죽, 주안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공작님과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었어요.”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고…….”
“아니에요. 정말 그것만으로도 저에겐 큰 힘이 되었는걸요.”
“아, 네.”
사실 주안은 아침을 함께 하면서도 그 이야기에 관해 묻지 않았고, 아버지인 주레인 공작 역시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무슨 이야기가 오간 것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밝은 유우나 공주의 모습을 보니 이야기는 잘된 듯했다.
“그런데, 옷차림이 왜…….”
아버지와의 야기보다, 아까부터 영 신경 쓰이던 유우나 공주의 간편한 옷차림이나 작은 망아지의 등에 위태롭게 올려놓은 짐들이 갸웃하게 만든다.
이런 주안의 말에 유우나 공주 대신 곁에 있던 풍신이 말했다.
“저희도 이번 사절단과 함께 왕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절단과요?”
“아무래도 그게 더 안전해서 황제 폐하에게 무리한 부탁을 좀 드렸습니다.”
“아…….”
그 안전이 무엇인지 주안도 들어서 알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일행들은 함께 가시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황도에서 다른 여러 귀족분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남게 되었어요. 잘될지, 솔직히 확신도, 자신도 없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씁쓸한 미소를 짓는 유우나의 모습에, 힘이 없다는 게 얼마나 처량한 것인지 너무나 잘 느껴져 매우 안타까웠다.
그래도 그녀에게 많은 시달림을 당했던 기억도 있어서 마냥 측은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 그리고 망아지. 거의 맨몸의 풍신을 보다, 주안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설마, 그, 그 말을 타고…… 가시려고요?”
어디 마차를 두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부러 망아지를 끌고 오는 게 더 이상하다.
그리고 이런 주안의 예상이 맞다는 듯, 유우나 공주와 풍신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안의 시선을 피했다.
“황도의 물가는 참 높더군요. 무슨 마차의 가격이 그리 비싼지.”
“……왕국으로 돌아갈 여비는 있으신 겁니까?”
“그 정도는 있어요. 가다가 적당한 마을에서 마차를 살 거예요.”
“그 망아지가 마차를 모는 건 아니겠죠?”
“…….”
주안의 말에 또다시 두 사람이 어색하게 시선을 교환하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설마 오실 때도 이렇게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중간에 마차를 버려야 할 이유가 있어서.”
풍신의 말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기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단한 여정을 겪은 공주님이시다.
“아르베리아 경, 저희에게 남은 마차가 있습니까?”
“짐을 조금 덜어낸다면 자리는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공자님.”
“짐 마차 말고, 탈 수 있는 마차는…….”
“없습니다. 억지로 자리를 마련한다면 할 수 있지만, 일행의 여성분들과 마법사분들이 마차를 비워야 할 것입니다.”
단호한 그 말에 주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대부분이 기사고 마법사들인지라 각자의 말과 마차를 소유한 이들이었다.
특히 마법사는 체력적으로 좋은 편은 아닌지라, 그들이 소유한 마차를 이용할 것이다.
그런 마차를 주안이 멋대로 비우라고 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저 의외로 말을 잘 타거든요.”
“……중간에 망아지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저 안 무겁거든요?!”
무겁고 안 무겁고의 문제가 아니라 망아지의 상태가 별로라는 것이다.
“……타십시오.”
“네?”
“제 마차에, 타고 함께 가시죠.”
“하, 하, 하지만…….”
유우나 공주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는 주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는 건 좀…….”
“…….”
의외로 망상이 심한 공주님 같다.
이런 유우나의 모습에, 예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모습과 괜히 겹쳐 보여 주안이 살짝 짜증을 내듯 말했다.
“둘만 있는 것 아닙니다. 가문의 마법사분과 제 하녀도 함께입니다.”
주안의 마차에는 장거리 통신용 마법 거울을 작동시킬 소니아와 주안의 하녀인 세라타도 함께 탈 것이었다.
사실 너무 멀기도 하고 위험할 수도 있어서, 주안은 세라타의 동행을 매우 반대하였지만, 세라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주안의 하녀로서, 최선을 하려는 그 마음 씀씀이를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풍신 경도 함께하시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이 망아지 녀석 걱정도 되고 말이죠.”
“……절대 타지 않는 걸 추천드리니, 다음 도시에 가서 팔아버리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주안이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아도 영 기운이 없어 보이는 망아지를 타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걷는 것이 더 편하고 좋은 그였기에, 망아지를 처분한다 해도 말을 구입할 생각도 없었다.
“하아……. 그럼 가죠. 아르베리아 경, 출발을 알리세요.”
“네, 공자님.”
워랜은 자신이 가장 편하게 여기는 짐 마차에 이미 드러누웠고 그것을 몰고 가는 것은 솔이었다.
토미는 일전에 가론 자작에게 선물 받은 말을 이용했다.
각 가문의 기사들이 말에 오르고, 일부는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주안이 유우나 공주와 함께 마차에 오르자, 아르베리아가 베일 리 준남작에게 말을 몰고 가 출발의 신호를 알렸다.
아스란 왕국으로의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