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47화
“으아, 완전 피곤하다!”
“도, 도련님…….”
황성에서 돌아온 주안은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흐느적거리며 방으로 걸어가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져 버렸다.
곁에서 세라타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주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그대로 잠들어 버리려 했다.
‘하아, 졸려……. 자고 싶어.’
술 마시고 벌인 일치고는 너무 눈에 띄는 짓이라 황성에서도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신관이 나서서 대신 잘 설명해 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할아버지의 질문이나, 마이스터 모레노의 호기심. 그리고 아빠의 꾸중까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주안은 아직 너무나 미숙했다.
빛나는 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하며, 몇몇 신관들이 찾아와 기도를 드리려거나, 마법사들은 찾아와 살펴보고 싶어 했다.
주안이 없는 사이에도 저택은 참 소란스러웠다.
그것을 집에 와서 다 들은 주안은 엄마나 아빠 그리고 다른 이들을 볼 낯이 없었다.
매우 부끄러웠다.
주안이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살며시 눈을 뜨고 왼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특히 아빠에게 이 성흔을 통한 신성력을 너무 남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소리까지 들으니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라타.”
“네?”
주안이 제멋대로 벗어놓은 겉옷을 챙겨 들고 정리하던 세라타가 주안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주안 역시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쭈욱 켠 후 세라타를 보았다.
어제의 그 일 때문인지, 피부나 머릿결이 몰라보게 좋아진 세라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거동도 못 하던 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아니, 오늘은 특히 그 혈색도 무척 좋아 보인다.
“이 신성력 있잖아, 내가 너무 마구 쓰는 거 같아?”
“우음…….”
세라타의 고민에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만 봐도 주안이 정말 생각 없이 이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세라타는 이내 배시시 웃으며 주안에게 말했다.
“헤헷, 좋은 일 아닐까요? 다들 즐거워하고 행복해하시던걸요.”
“즐겁고 행복하다라…….”
“전 신성력이 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그걸 받은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했던 건 알아요. 저도, 많이 행복했거든요. 그때만큼은 아프지 않고, 오빠도 걱정하지 않았던 유일한 시간이었으니까요.”
“아…….”
세라타는 아주 가끔, 빈민가를 찾아오는 신관들에 의해 조금이지만 신성력의 치료를 받았던 아이였다.
아프던 시간 중 그때만큼은 세라타에게 행복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아?!”
세라타가 갑자기 주안의 옷가지들을 내려놓더니 자신의 치마를 조금 들어 올리며 종아리 쪽을 주안에게 보여주었다.
“세, 세라타?!”
당황해서 소리치는 주안의 모습을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세라타가 갸웃하며 말했다.
“저 도련님 덕분에 있죠, 흉터도 없어졌어요.”
“……뭐?”
주안이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지만, 세라타의 말에 손가락 틈을 벌려 세라타를 힐끗거리며 바라보았다.
“흉터가 있었어……?”
“어렸을 때 뜨거운 물에 조금……. 하지만 어제 자고 일어났더니, 없어진 거 있죠? 저 깜짝 놀랐었어요.”
“아…….”
어제라면 주안이 술 마시고 벌인 그 일 때문일 것이다.
“하, 하지만 전에도 내가 신성력 써줬었잖아? 그땐…….”
“저뿐만이 아니에요. 어떤 여기사님도 그렇고, 공작령에서 오신 분들도 여럿 놀라셨어요.”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단순히 피부 미용을 시켜준 것치고 지나칠 정도로 존경 어린 시선으로 보던 그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다들 주안 도련님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특히, 여성들에게 이런 상처는 조금 그렇잖아요.”
“헤에, 꼬맹이 주제에 세라타 너도 여자다, 이거야?”
“흥, 저도 여자에요.”
볼을 통통하게 부풀리고 삐친 듯 주안을 노려보는 세라타였지만,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진짜 아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감사하고 고맙지만……. 주안 도련님이 무리하시는 거라면 절대 고맙지 않을 거예요.”
“무리라…….”
그게 무리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술 마신 후유증인 숙취 때문에 좀 고생했어도 크게 힘들거나 피곤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 황성에 갔다 잔소리를 듣고 온 현재가 훨씬 더 피곤하다.
이런 주안에게 세라타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안 도련님 몸이 나빠질 정도로 그 힘을 사용하지는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주안 도련님 몸을 신경 써주세요. 아셨죠?”
조금은 아이다운 세라타의 말에 주안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응, 나도 그럴 생각은 없어. 그래도 가족이 아플 때는 조금 어길 수도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몸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현재의 자신은 가까운 이들에 대해선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주안이 침대에서 내려와 기지개를 쭈욱 켜며 말했다.
“좋아, 지금은 좀 더 힘내볼까.”
“파이팅이에요, 도련님.”
“응, 파이팅.”
세라타의 응원에 기운이 난 것인지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몸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 *
황도에 거대한 빛이 반짝였다.
밤임에도 휘황찬란한 마법등은 평소보다 더 밝게 빛났고 황성 역시 환하게 빛을 비추니, 황도 전체가 빛나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바로 내일, 제국을 떠나 아스란 왕국으로 외교와 문화 사절을 떠나는 이들을 위한 성대한 파티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국내의, 황도의 주요 귀족들만 참석하는 게 아니라 동방 대륙에서 온 이들도 있었고, 타 국가의 귀족들도 섞여 있었다.
더군다나 아스란 왕국에서 역시 내일 있을 사절단 파견 행사에 맞춰 사람을, 그것도 왕가의 인물까지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러 왔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들까지 참석하면 정말 양 대륙 전체의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다.
떠들썩한 황도 시내와 마찬가지로 황성도 시끌벅적했으며 수많은 마차가 계속해서 황성으로 들어섰으며, 화려한 옷차림의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후웁, 하아…….”
그리고 이런 귀족들의 틈에 주안 역시 있었다.
마차를 타고 황성으로 들어서면서도 계속해서 심호흡과 신성력을 끌어올려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런 심적인 문제에 대해선 신성력이 썩 효과적이지 않은 듯 주안은 초조하기만 했다.
그런 주안의 모습에 곁에 앉아 있던 안젤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안의 손을 잡아 주었다.
“조금 진정하렴, 주안아.”
“하, 하지만…….”
“어휴, 겨우 파티에 가는 것 정도로 이렇게 떨어서 되겠니.”
“……겨우 파티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전 이런 파티는 처음이란 말이에요.”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하는 무대가 황성의 파티라니.
이것은 황태자나 황가의 이들이 아닌 이상 없다시피 한 일이었다.
태연한 안젤라와는 달리 주안은 계속해서 마차의 조금 열어놓은 창 너머로 바깥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긴장되어 식은땀까지 흐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주안의 모습에 안젤라가 조심스레 손수건을 꺼내 주안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곁에 엄마도 있을 거고, 공작령의 여러 귀족도 너랑 함께 있어 줄 거야. 특히 아르베리아 경이 네 곁을 지켜줄 거니까.”
‘솔직히 그게 더 걱정인데요…….’
물론 워랜이 아닌 점은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워랜은 귀찮다며 이번 황성의 파티에는 빠져 버렸다.
대신 베일 리 준남작이 워랜이 빠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참석했지만, 그 역시 이런 일은 완전 꽝이라 크게 도움은 안 되었다.
그나마 이런 파티에 익숙한 사람이 소니아와 아르베리아 말란체 그리고 위체니아 소벡이었지만, 언제나 의욕적인 아르베리아 말란체 때문에 조금 불안한 주안이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그 넘치는 의욕이 문제란 말이야.’
게다가 목소리도 커서 어디서든 주목을 받게 될 그런 아르베리아 말란체가 곁에 있으면 덩달아 주안에게마저 시선이 집중될 게 뻔했다.
아무리 곁에 엄마와 다른 공작령의 귀족들이 함께라 해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다.
“첫 데뷔이니만큼, 많은 이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렴. 오늘은 네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대표이니 말이야.”
“대표…….”
주레인 공작 역시 참석하나, 그는 황제의 곁에 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있지는 못한다.
따라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대표는 안젤라가 되어야 마땅하지만, 후계자인 주안이 참석하고, 스스로 뒤로 물러날 안젤라이기에 자연스럽게 주안이 대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안젤라는 잔뜩 굳어 있는 주안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다 꼬옥 안아주며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너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행동이 되고, 너의 모습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모습이 된단다. 함께 온 이들에게, 그리고 그곳에 있는 귀족들에게 너의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렴. 모두가 네 등을 보고,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한번 주안을 바깥으로 내보이기로 결심한 안젤라는 이제 이런 주안을 믿고 응원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미 바깥으로 나가기를 결심한 아들을 말리고 사이가 틀어지기보단, 남편의 말대로 주안이를 응원하고 힘들고 지칠 때 쉴 수 있는 그런 보금자리의 역할을 택했다.
물론 그 보금자리는 언제나 자신, 혼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엄마…….”
엄마의 행동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마르티네스 공작령에서 올라온 이들을 맞이하던 그 날 이후로 정말 많이 변한 듯했다.
그런 엄마의 행동에 주안도 살포시 엄마를 안아주며 말했다.
“세라타가 엄청 부러워하면서 지켜보는데요.”
“어머, 그러니. 그럼 세라타도 안아 줄까?”
“에엣?! 부, 부러워한 거 아, 아닌, 아닌데…….”
곁에서 매우 흐뭇하게 지켜보던 열세 살의 소녀가 잠시 당황했지만, 그보다 안젤라의 행동이 훨씬 빨랐다.
주안을 품던 행동에서 벗어나 금세 세라타에게 주안에게 했던 것처럼 꼬옥 안아주고, 등도 토닥여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과 엄마의 전속 하녀인 마리아가 혹시 자신에게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모습에 주안이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모습이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모습이라…….’
이전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저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근거지, 마를렌에선 그딴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멋진 모습을 보일 이유도 없었다.
모든 게 주안,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깨에 짊어진 가문의 무게와 가문을 믿고 따라주는 가신들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그리고 그딴 짐은 버리고 갔을 주안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아무도 버리지 않을 거야. 그들 모두가 나의 사람. 나의 가족이니까.’
그리고 이번 사교계의 데뷔가 정식으로 주안 마르티네스를 알리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