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46화
“술은 다 깼니, 우리 아들!”
“…….”
주안이 엄마의 방에 들어서자, 책을 읽고 있던 안젤라가 그런 주안을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저기, 엄마…….”
“한 살 더 먹었다고 벌써 술이라니. 우리 아들, 참 빠르기도 하지.”
“아, 아니, 이건 이유가 있어서…….”
“열여덟 성인이 되면 이젠 무슨 짓을 할지 엄마는 참 걱정이다?”
분명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에는 그늘이 지어져 있었다.
따뜻하고 훈훈한 공기만이 감도는 방이 어째서인지 엄마를 중심으로 싸늘한 한기가 주안에게 집중적으로 불고 있었다.
생긋거리며 웃는 엄마의 그 모습과 말에, 주안이 할 수 있는 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엄마에게 사과하는 것밖에 정해진 것은 없었다.
그런 주안의 모습에 안젤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어휴, 정말. 대체 이게 무슨 꼴이니. 호기심에 술을 입에 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술주정이라니…….”
“저, 전 정말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대체 집이 왜 이 꼴이에요?! 사람들은 왜 다 저렇게 되었고요.”
엄마의 방으로 달려오면서 만난 하인들이라거나 하녀들, 거기다 마르티네스 공작령에서 올라온 젊은 귀족들마저 하나같이 반짝반짝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존경이 담긴 눈으로 주안을 바라보고 인사까지 해오는 바람에 주안은 극도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엄만 거기 없었거든? 우리 아들의 술주정을 그곳에서 못 본 게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되는데, 주안이는 어떠니?”
“으…….”
가만 보니 이 방도 반짝반짝하는 것이, 아무래도 저택 전체가 이 꼴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엄마의 입에서 술주정이라는 말까지 나온 것을 보니, 누군가가 또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닌 게 아닐까 싶었다.
“……소니아 누나가 뭐라고 했죠?”
“하아……. 워랜, 그 아이는 엄마가 따끔하게 혼을 냈지만……. 앞으로 술은 절대 금지야. 알겠니.”
“……네.”
소니아 그리고 워랜에게서 대충 이야기를 들은 안젤라는 정말 아들이 처음으로 부끄러워졌다.
귀족가든 평민의 아이든, 어릴 때의 호기심이 가득해 몰래 술을 입에 대는 것이야, 흔하디흔한 일이다.
하지만 단 한 잔에 취해서 술주정을 부리고 이 사달을 내버린 아들이 참 한심스럽고 걱정도 되었다.
그나마 주안의 몸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었기에, 이 일을 저지른 워랜에 대해선 따끔한 훈계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주안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자, 안젤라도 이번 일은 이쯤 해서 넘어가기로 하며 주안에게 말했다.
“그보다 주안아. 오늘 저녁에는 황성에 잠시 가봐야 할 것 같아.”
“네? 황성이요?”
“응, 네 외할아버지가 좀 보자고 하시네.”
“우와?! 설마 저 술 마신 거 벌써 소문 난 거예요?!”
“아마도?”
“대체 누가……?! 설마 또 소니아 누나가?!”
주안이 발끈하자, 안젤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사랑스럽지만, 오늘만큼은 사랑해 줄 수 없는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가 말한 거야. 집을 이 꼴로 만들었으니, 네 외할아버지가 많이 놀라신 듯해.”
“으윽…….”
주안은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지만, 저택을 감싼 그 빛은 황도를 밝게 빛낼 정도로 환했다.
그 때문에 황성에서도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현재 황도에선 묘한 소문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에 방문한 이들은 회춘해서 나온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치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하인과 하녀는 물론 마부와 심지어 말까지 몰라보게 달라진 외모로 나타나니, 평소 그들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최근 방문한 마르티네스 공작령에서 올라온 귀족들과 그 일행들마저 반짝반짝해져서 황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니, 그저 소문만 무성하던 일이 거의 확실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거기에 못을 박듯 마르티네스 공작가, 아니, 정확히는 주안에 대한 신의 증표인 성흔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대신전의 대신관이 직접 공표하자 소문만 무성하던 것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저택은, 아니, 주안 마르티네스가 머문 땅에는 축복이 내려 젊음을 되찾게 해준다.
실로 황당한 소문이 점차 더 크게 부풀려져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저녁에 갈 거니까, 그전까진 공작령에서 올라온 이들이랑 친분을 좀 다져놓으렴. 어제 그런 몹쓸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란다.”
“……엄청 존경하는 모습이던데.”
“응? 존경?”
“아, 아니에요.”
차마 술주정으로 피부 미용시켜 줬더니 모든 것을 다 바칠 것처럼 존경하고 있다는 말을 엄마에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절대 다수의 여성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엄마가 어떻게 나올지 솔직히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 * *
순백의 방 안을 장식하는 것은 중앙의 거대 원탁과 방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 거대한 벽화만이 유일했다.
그리고 이 방의 원탁에는 오로지 한 사람만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었다.
새하얀 법의를 걸친 신관은 원탁에 빛이 나는 것을 보고는 앞에 놓여 있던 수정구를 매만졌다.
그러자 수정구가 놓여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탁을 가득 채워 나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형상들은 몇몇 자리는 빠져 있었지만, 더 이상 나타나는 이가 없자 홀로 앉아 있던 중년의 남성이 조용히 말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갑자기 모이시라 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케들락 대신관님. 갑자기 원탁회의를 주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케들락 대신관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법의를 걸친 노인의 물음에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각 대신전들의 대표들이 모여 하는 원탁회의는 몇 달 전에 미리 일정을 잡고 하는 게 원칙이었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때문에 몇몇 대신관들이 불쾌감을 드러내었지만, 케들락 대신관은 담담하게 그들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제노폴의 페트롤 대신관님에게서 온 연락 때문에 여러분을 급하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갑자기 무슨 연락입니까? 돈 되는 일이 아니면 얼굴도 비추지 않으시는데.
그 말에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고, 노골적으로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제노폴 황도의 대신전의 주인인 페트롤 대신관의 돈 욕심은 꽤나 유명했지만, 그만큼 신도들도 많았고 많은 신전을 거느린 이였다.
제국 내에서 가장 큰 대신전인 것도 있지만, 그의 영업에 가까운 교리 전파는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비어 있는 자리들은 대부분 제노폴의 대신전을 가진 대신관들이었고, 페트롤 대신관과 친분이 대단한 이들이었다.
“최근 그분에게서 매우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어 이렇게 급하게 여러분들을 모신 것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
케들락 대신관이 고개까지 숙여 사과하자 웅성거리던 대신관들의 불만 어린 소리도 쏙 들어가 버렸다.
다른 대신관들보다 훨씬 젊은 이였지만, 그는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종교가 최초로 전파된 무라디안의 성도 다예프의 대신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케들락 대신관이 많은 대신관을 부른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제노폴의 황도에서 성흔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성흔?!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마, 페트롤 대신관이 전한 소식이라는 게 그것이란 말입니까!
제멋대로 원탁회의를 열었다는 것보다 더 큰 혼란이 퍼져 나갔다.
이곳에 있는 이는 케들락 대신관 하나뿐이었지만, 수정구를 통해 나타난 영상 속의 대신관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또 분노하고 있는 것인지 그대로 전해져 온다.
-성흔이라니! 그자가 드디어 돈에 미쳐 버려 할 것, 안 할 것 구분도 못 하고 있답니까?!
그리고 가장 분노하는 것은 같은 무라디안에 속한 대신전의 주인인 프린 대신관이었다.
그 역시 매우 젊은 편에 속한 이로, 이곳에 모인 대신관 중 유일한 여성이기도 했다.
그녀가 이토록 흥분하며 거친 말을 쏟아내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는 없었다.
그녀라면, 아니, 무라디안의 신관들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성흔은 대대로 우리 무라디안에서만 나타나던 신의 흔적입니다! 이미 성도에 성녀님이 계신데, 또 다른 성흔이라니……!
그녀의 말대로 무라디안은 대대로 신의 흔적이 내려오는 매우 특이한 곳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아니었으며, 그저 종교로 뭉친, 종교를 위한 이들의 땅이었다.
서방 대륙의 유일한 종교이자 북방의 절대다수가 믿는 종교이다.
그렇기에 최초로 신의 이름이 나타난 땅이자 종교가 설파된 무라디안은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고, 주변의 그 어떤 나라도 무라디안에 대한 무력행사를 하지 않았다.
단지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겐 언제나 신의 흔적, 성흔을 지닌 이들이 태어났고, 성자와 성녀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 성자와 성녀가 사망하면 또다시 새로운 성자와 성녀가 태어났다.
모든 종교인을 이끄는 자들이 대신관이라면,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흔을 지닌 성자와 성녀였다.
각 대신전은 독자적인 길을 걷고 지역마다 교리가 조금씩 다르다 해도 모든 대신전에선 이 성녀와 성자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절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여러분에게 급히 연락을 드려 모신 것입니다. 정말 페트롤 대신관님의 말대로 성흔을 가진 이가 나타났다면…….”
-알아봐야지요! 당장 알아봐서, 만약 그 돼지가 정말 돈을 벌 목적으로 그랬다면 엄벌을 내려야 합니다!
가장 크게 흥분한 프린 대신관이 소리쳤지만, 케들락 대신관이 손을 들어 조금은 자제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야 프린 대신관이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프린 대신관을 대신해 케세니아 왕도의 대신전의 주인인 바르바트 대신관이 조용히 말했다.
-그건 좀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제노폴 황도의 대신전입니다. 아무리 하나의 교리로 묶여 있다 해도 대신전들은 독립된 단체입니다. 설령 사실이 아니라 해도, 제재를 가할 방법은 없습니다.
-큭……!
그것을 알기에 프린 대신관은 더욱 분노를 드러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프린 대신관을 보던 바르바트 대신관이 케들락 대신관에게 말했다.
-일단 전후 사정을 좀 더 알아봐야 할 듯하군요. 한데, 그 성흔을 지닌 이가 누구인지는 들으셨습니까.
“예, 꽤나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의외의 인물? 게다가 한 번쯤 들어봤을 인물이라는 말에 모두가 갸웃했다.
설마 제노폴의 황제나 바스티아노 백작이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라 하더군요.”
-예?!
그의 말에 가장 놀란 것은 제노폴 제국 남부의 대영지 코폴라의 대신전의 주인인 셰블로 대신관이었다.
제노폴 제국의 대신전은 총 네 곳으로 황도와 서부 링베르가 공작령 그리고 북부의 벨라트릭스 후작령, 마지막으로 남부 구 체스커 백작령이자 현 황실직할령 코폴라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제노폴 제국의 대신관 중 유일하게 참여한 셰블로 대신관은 주안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을 듣고 황당해했다.
“혹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게…….
아무리 같은 교리를 믿는 교단이자 신전들이라 해도 모두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다.
특히나 제국 내에서 페트롤 대신관과 셰블로 대신관은 앙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아는 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했다.
하지만 그보다 셰블로 대신관은 주안의 이름이 나오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절대 신의 이름을 받아들일 만한 아이가 아닙니다. 절대로 선하다 할 수 없는, 오히려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30년 안에 망하게 만들 수 있다고 소문난 아이란 말입니다.
-아, 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마마보이…….
셰블로 대신관의 말에 주안이 누구인지 떠올린 듯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지만, 최종적으로 직결되는 것은 마마보이라는 단어였다.
그만큼 주안에 대한 소문은 좋지 않았고 여전했다.
-그런 아이에게 성흔이라고요? 그게 진정 말이 된다 생각하십니까, 케들란 대신관님!
프린 대신관의 말에 케들락 대신관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처음 그 사실을 페트롤 대신관에게 전해 들었을 때 그도 믿을 수 없었고, 주안 마르티네스에 대해서 조사를 하면 할수록 불가능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 신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고할 정도로 페트롤 대신관님은 타락한 이가 아닙니다.”
페트롤 대신관이 신관답지 않게 돈을 좀 밝히고, 청렴함보다는 대신전을 이용해 장사와 비슷한 행위를 일삼기는 한다.
하지만 그의 그런 수완이 있었기에 북부보다 신을 믿는 이들이 현저히 적은 중남부에 막대한 교리를 퍼뜨리고, 신관들을 모아 수많은 신전을 세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신을 믿고, 신께서도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해서 저는 일단 여러분들의 협조 속에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케들락 대신관의 말에 프린 대신관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번 제노폴 제국이 남부 귀족들과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중심으로 아스란 왕국에 외교와 문화 사절을 보낸다 들었습니다. 그 사절 속에 주안 마르티네스 공자가 포함되었다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셰블로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들락 대신관이 말했다.
“그 사절 속에 믿을 수 있는 신관의 파견을 부탁드립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맥도넬 후작가와 선이 닿아 있기에 그들을 통해서 저희 쪽 신관을 파견토록 하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라디안의 근간이 흔들리고, 성도 다예프에 치명적인 타격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케들락 대신관의 침착한 그 모습에 여타 대신관들의 눈에는 그가 더욱 대단해 보였다.
괜히 젊은 나이에 교단의 최고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다른 분들에게도 부탁드릴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협조가 절실하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케들락 대신관의 모습에 다른 이들 역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케들락 대신관이 고개를 들어 원탁회의의 종료를 알리자, 하나둘 수정구의 불이 꺼지며 대신관들의 모습이 원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단 한 사람, 프린 대신관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원탁에서 사라지자 케들락 대신관이 잔뜩 찌푸렸다.
“성흔이라…….”
-거짓입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절대란 없습니다, 프린 대신관…….”
-하지만!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일단 셰블로 대신관을 믿어보아야겠죠.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까? 셰블로 대신관도 어차피 제노폴의 사람입니다. 그가 과연 진실을 알릴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진실이라…….”
프린 대신관의 말에 케들락 대신관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거짓을 고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선조들만큼은 아니나,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눈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프린 대신관.”
케들락 대신관의 말에 프린 대신관이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 일은 성녀님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단속을 잘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프린 대신관, 그대 역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하오나 제노폴의 페트롤 대신관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의 성정대로라면 이미 소문을 내도 열 번은 더 냈을 것입니다.
“제노폴과 무라디안의 거리는 매우 멀답니다. 쉽게 소문이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국 중남부의 제노폴과 북부 대산맥에 둘러싸인 무라디안은 거리도 거리지만, 지형으로 인해 거의 가로막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문은 쉽게 퍼지겠으나, 그 소문이 무라디안까지 오는 것은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흔이 진실된 성흔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사납게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케들락 대신관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성흔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려주신 우리만의 힘. 무라디안의……. 선조들의 수많은 희생으로 일구어낸 힘이란 말입니다…….”
-케들락 대신관님…….
그의 녹색 눈동자는 불길하게 일렁거리며,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인간 따위에게 빼앗길 힘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숨기듯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던 케들락 대신관은 쓸어 올린 머리카락을 주머니에서 꺼낸 머리끈으로 질끈 묶었다.
성녀님을 만나러 갈 때 하는 행동이기도 했으며, 이곳 다예프의 대신전에선 보다 자유롭게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묶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귀가 유난히 뾰족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