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38화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와 문화 사절에 대한 소문은 비밀스럽게 진행이 되긴 했지만,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나마 최대한 숨겼기에 신년 행사쯤까진 어떻게 넘어갔지만, 신년 행사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한 외교 사절 준비에 귀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제국민들의 귀에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었다.
문제는 아스란 왕국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한 제국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많았다는 점이다.
가장 큰 목소리는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와 문화 사절이 필요하더라도, 어째서 대국인 자신들이 저런 속국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가냐는 것이었다.
그게 꼭 필요하다면 아스란 왕국이 숙이고 먼저 들어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저지른 일을 본다면 그런 외교도 불필요하다는 말들이 오가면서 결국,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전대 가주였던 벡브란 전대 공작이 아스란 왕국을 그대로 놔두고 온 것에 대한 비판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평화를 위한 외교와 문화 사절을 이끄는 사람이 다름 아닌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 주안 마르티네스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이런 비난은 더욱 거세졌고 소문도 좋지 않게 흘러갔다.
가문 내에서라면 모를까, 아직 주안은 귀족 사회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던 어리숙하고, 소문도 좋지 못한 마마보이라는 점이 더욱 크게 작용을 하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안은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며,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도 조금씩 줄여가고 있었다.
최대한 다양한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먼 미래의 그리고 멍청함이 극에 이르렀던 머리를 억지로 쥐어짜며 필요한 부분들을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주안이 작게 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쭈욱 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사람들이 급할 땐 주입식 교육이 최고라고 하는 건지, 이해가 간다니까.”
게다가 주안은 이 주입식 교육을 최고의 교육으로 만들어버린 마법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주안은 슬쩍 왼쪽 팔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긴 해.”
주안이 입고 있는 옷들과는 달리 크게 화려한 부분이 없는 팔찌였지만, 그 가격을 듣게 된다면 놀랄 수밖에 없는 마법 아이템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공부를 하려는 이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기도 했다.
주안이 싱긋 웃으며 팔찌를 매만졌다.
“수고했어. 나 대신 잘 기억해 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건 책 내용을 강제로, 머릿속이 아니라 이 팔찌에 집어넣는 아이템이었다.
이 팔찌는 작은 도서관을 팔찌 형태로 만들고, 착용자가 읽은 책 내용을 저장한 뒤, 원할 때 그 부분을 꺼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주안처럼 공부에 흥미도 없고, 기억력도 형편없는 이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아이템은 없겠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점은 말 그대로 그 책을 착용자가 한 번은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는 점이며, 팔찌를 벗는 순간 저장된 내용이 모두 소실되어 다시 읽어야 했다.
비싼 값치고는 여러 제약이 많아서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멀리 보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이 급한 주안에겐 이보다 좋은 마법 아이템은 없었다.
“난 그냥 책이 좀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주안이 공부를 시작하고, 남부 귀족들과 아스란 왕국에 관련된 책을 읽어나가며 외웠지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안 그래도 안 쓰던 머리를 쓰려니, 집중도 안 되고 겨우 책을 읽어도 금세 까먹어 버리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의 시간을 읽고 까먹고 다시 읽고, 짧게 기억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런 주안의 힘겨워하는 모습을 절대 두고 볼 인물이 아닌 안젤라가 황실 마탑에 직접 의뢰해서 구해준 것이 바로 이 마법 팔찌였다.
그 외에도 집중력을 높여주는 반지나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를 꼿꼿하게 펼 수 있게 해주는 허리띠 등 다양한 것을 준비해 주는 바람에 정말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비싸…….”
심하게 비싼 마법 아이템들을 단지 공부 때문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황당해할까.
특히 허리를 꼿꼿하게 펼 수 있게 해주는 마법 허리띠는 왜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에게 허리는 생명이라고 주장한 어느 미친 마법사가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는 마법 아이템이긴 했다.
게다가 이것도 매우 비싸다.
어쨌든 당장은 너무나 필요한 것들이고, 엄마의 정성 때문에 사용하기는 했다.
처음에는 아깝게 느껴지고 황당했지만, 점차 이 물건들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을 체감하고는 이젠 그러려니 하는 수준까지 왔다.
“그건 그렇고, 이 간지러운 건 영 나을 생각을 안 하네.”
주안이 마법 팔찌가 채워진 왼쪽 손바닥을 매만지며 잔뜩 찌푸렸다.
무슨 부작용인지 이 마법 팔찌를 사용한 후부터 왼쪽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밤에도 잠에서 깨어나 손바닥을 긁어댈 때도 많았다.
이 때문에 엄마가 이 마법 팔찌를 만들어 판 마법사를 잡아내어 주리를 틀겠다며 난동을 부리는 것을 막느라 꽤나 힘들었다.
“그래도 이걸 버릴 수는 없지…….”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 해도 이 마법 팔찌는 너무나 유용한 것이기에 버릴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다행히 대신관님이 찾아와 직접 치료도 해주었고, 밤에 자기 전에는 약을 바르고 나면 중간에 깨는 일 없이 편하게 잠을 잘 수도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주안은 대충 서랍에 넣어둔 약을 꺼내어 손에 바른 후 붕대를 감고 장갑을 꼈다.
장갑 역시 마법 도구 중 하나로 상처 회복에 도움이 되면서 상처가 덧나는 것을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음……. 그보다…….”
주안이 책들을 정리하고 고개를 돌려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주안은 따로 서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지라 자신의 방에서 공부하였고, 그런 주안을 위해서 항상 곁에 하인이 있었어야 했다.
최근 바쁜 토미를 대신해 새로운 하인, 아니, 하녀가 배정되었지만, 주안의 이런 공부에 집중하는 것 때문에 크게 할 일이 없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일까…….
“음…….”
주안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하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뻗었다.
“세라타, 세라타.”
“핫?!”
주안이 흔들어 깨우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세라타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 죄송해요, 도련님!”
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풀거릴 정도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을 반복하는 세라타의 모습에 주안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모두의 도움으로 인해서 건강이 많이 좋아진 세라타는 직접 나서서 주안의 개인 하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덕분에 매우 곤란했지만, 그 진지한 표정이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결심을 굳힌 세라타를 말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안의 하녀 일이라는 게 사실 크게 힘든 부분도 없었기에, 집 안에서만 지내고 따로 친구도 없는 세라타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허락해 주자, 매우 기뻐한 세라타였다.
다행히 처음 하는 일치고는 정말 적응을 잘해서 그런지, 오히려 지금은 토미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잘해내고 있었다.
“나 책 읽고 있을 땐 그냥 토미랑 있다 와도 괜찮다니까.”
“아, 안 돼요. 전 도련님의 하녀인걸요. 도련님이 원하실 때 언제 어디서든 부탁하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그런 하녀가 되어야 해요.”
“으응……. 그보다 입가에 침 자국이…….”
“하, 핫?!”
작은 주먹을 꼬옥 쥐고 대견하게 말하는 것치고는, 잘 잤던 것인지 입가에 침 자국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그런 주안의 말에 세라타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황급히 옷깃으로 입가를 닦으려는 세라타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그런 세라타의 행동을 멈추게 한 주안이 손수건을 꺼내 직접 세라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우, 에…….”
“너무 무리하려고 하지 마. 이제 겨우 걷고 뛸 수 있는데……. 다시 아프고 그러면 안 되잖아.”
“하, 하지만…….”
“응, 좋아. 다 닦았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주안이 세라타의 입가를 닦아준 후 손수건을 정리해 주머니에 넣으려 했지만, 그보다 앞서 세라타가 그 손수건을 빼앗아 가버리며 말했다.
“제가 깨끗하게 빨아드릴게요.”
“응? 하지만, 크게 더럽지도 않은데…….”
“아, 안 돼요. 꼭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으응…….”
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나풀거릴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세라타는 강하게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할 수 없이 주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허락하자,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세라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이내 세라타가 황급히 옷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더니 시간을 확인한 후 주안에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안젤라 님이랑 약속하신 시간이세요. 얼른 준비해 주세요, 주안 도련님.”
“벌써 그렇게 됐나…….”
주안은 공부를 한다고 해도 절대 엄마와의 시간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정하고 반드시 그 시간만큼은 엄마와 함께 보냈다.
외교 사절로 아스란 왕국에 가기 전,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안심을 시켜주고 싶었던 주안이었다.
최근은 이런 공부 시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정해서 엄마를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물론 이 마법 팔찌와 마법 장신구들을 구해준 것도 이런 시간을 내기 위한 엄마의 배려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바깥 외출이기도 해서 세라타가 주안의 겉옷을 준비해 주었다.
그 외에도 부스스한 머리카락의 정리 정돈, 옅은 화장까지 해준 후 외출 준비를 마치고 함께 방을 나올 수 있었다.
토미는 하지 못했던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겨주는 것을 보니, 엄마가 세라타를 자신의 하녀로 배정해 준 것이 이해가 되었다.
* * *
황도는 매우 들떠 있었다.
새해의 첫날이 되면 신년 행사로 인해서 축제가 벌어진다.
황실에서는 많은 자금을 풀어 그날만큼은 모든 황도의 시민들이, 가난한 이까지도 배불리 먹고 편안히 보낼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게다가 신전의 신관들 역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직접 빈민가를 오가며 아픈 이들을 치료해 주고, 먹을 것을 베풀었으며,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옷가지 등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모두가 그날만큼은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고,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로 인해서 거리가 복잡해지는 관계로, 사실 귀족들은 그날 그냥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게 아니라면 신년 행사가 되기 전날 볼일을 보거나 뒤로 미루거나 하였다.
“와아~!”
세라타는 대신전의 웅장한 모습에 잔뜩 들떴는지 고개를 들고 눈에 다 담기지 않는 대신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복잡해지기 전날, 볼일을 보는 일행들로는 주안과 안젤라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특히 안젤라는 일부러 대신전을 찾았으며, 매년 새해의 전날 막대한 금액을 황도의 대신전에 기부해 왔다.
주안을 건강하게 낳게 도움을 준 것도 있었고, 이후로도 틈틈이 안젤라의 부탁에 대신관이 직접 찾아와 준 그 배려에 대한 감사의 인사이기도 했다.
“……이게 다 돈으로 이룬 신전이구나. 배불뚝이 대신관 할아버지, 완전 부자잖아.”
“꿈과 희망도 없으신 말이에요, 소니아 누나.”
게다가 버릇도 없었지만, 워랜과 함께 오래 지낸 소꿉친구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자, 들어가자.”
안젤라의 말에 주안과 소니아, 그리고 세라타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신년 행사 전날이라 황도는 매우 떠들썩했지만, 대신전을 방문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일반적인 신전이라면 모를까, 대신전쯤 되면 방문하는 이들은 귀족들이 절대다수였고, 일부가 돈이 많은 상단의 주인들 정도뿐일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라면 소란스럽지 않고 조용했을 대신전에 오늘은 그나마 방문자들이 꽤 있었지만 크게 차이는 없었다.
대신전의 정문에서부터 입구까지 거리는 꽤나 있었고, 게다가 대신전의 내부의 부지는 굉장히 컸다.
신전답게 순백색의 돌들로 꾸민 신전은 화려함보다는 큰 규모로 인한 웅장함과 별다른 장식 없는 수수함으로 경건함을 가지게 만든다.
안젤라가 대신전 정문에 들어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두 명의 남녀 신관이 안젤라와 주안에게 인사를 한 후 앞서가며 안내를 시작했다.
그들은 최우수 고객인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공작부인이 매년 새해의 전날에 방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을 하고 오는 것이 아닌지라, 이렇게 정문 앞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교대해 가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행동들 때문에 주안은 미리 약속을 잡고 온 줄 알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