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36화
저녁은 항상 엄마와 함께 둘이서만 먹던 것과는 달리 요즘은 아빠를 기다리며 함께 저녁을 먹는 게 주안의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아빠인 주레인 공작이 황성에서 조금 늦는다는 연락을 받는 바람에 오랜만에 안젤라는 주안과 단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주레인 공작의 잔소리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함께 티타임도 가지고 황도에서 펼쳐지는 유명한 공연까지 보러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물론 이런 계획은 안젤라의 계획이었지만, 주안도 오랜만에 그럴까 싶었다.
단지…….
“……왜 그런 눈으로 노려보는 거요.”
“흥!”
막 저택을 나가려는 그 순간, 돌아온 주레인 공작으로 인해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안젤라의 기분이 영 별로인 듯했다.
그리고 주레인 공작을 맞이하러 나온 주안이 미소를 지으며 엄마의 손을 꼬옥 잡아주는 것으로 기분을 조금 풀어주었다.
이런 주안과 안젤라의 모습에 잠시 갸웃하던 주레인 공작도 안젤라가 토라진 이유를 대충 파악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 주안이 안젤라의 손을 잡고 달래주는 모습을 보고는 기분 좋은 미소로 변했다.
“참, 부인과 주안이에게 할 이야기가 있소. 지금 좀 괜찮겠소?”
“할 이야기요?”
엄마인 안젤라가 여전히 뚱한 표정이 답도 하기 싫다는 듯 느껴져서 그런지 주안이 대신 아버지인 주레인 공작에게 물었다.
그런 주안의 물음에 주레인 공작이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주안이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오.”
중요한 이야기라는 말에 주안이 갸웃하긴 했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주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주레인 공작 역시 미소를 지어주며 안젤라와 주안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 *
응접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안젤라는 당연하다는 듯 주안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주레인 공작은 그러려니 하며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하녀들이 차를 준비하는 사이, 먼저 주레인 공작이 말을 꺼냈다.
“외교와 문화 사절 일정이 잡혔소. 내년 신년 행사가 끝난 후 그다음 달 1일에 출발할 것이라오.”
“그건 제가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외교? 문화 사절?
그것이 뭔지 몰라 갸웃하는 주안과는 달리 이 사실을 이전에 미리 들었던 안젤라는 격하게 반응을 하며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그것만이 아니라 주안을 보호하듯 꼬옥 껴안으며 남편인 주레인 공작을 노려보기까지 한다.
그런 안젤라의 행동을 이미 예상했기에 주레인 공작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주레인 공작은 이내 하녀가 내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롭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주안이 싫다고 한다면 나 역시 보낼 생각은 없으니. 이것은 부친께서도 허락하신 말이라오.”
“아버님이요?”
가문의 명예를 크게 생각하는 벡브란 전대 공작이 그런 허락을 했다는 말에 안젤라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리고 이런 부모님의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던 주안이 엄마인 안젤라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외교, 문화 사절이라는 게 뭐예요?”
“이번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와 문화를 위한 사절을 보내기로 했단다. 그리고 오늘 그 날짜가 확정되었지.”
“아스란 왕국…….”
주안이 아스란 왕국이라는 말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그런 모습을 감추며 심호흡을 하였다.
‘아스란 왕국의 외교, 문화 사절이라…….’
사실 제노폴 제국 입장에서 아스란 왕국을 좋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주안에게도 아스란 왕국은 좋은 쪽이라고 말을 하기에는 어려웠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특별했다.
외교와 문화 사절이라는 것은 자신도 잘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었지만, 그렇기에 큰 문제가 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아스란 왕국이라는 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주안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에 주레인 공작이 하녀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필두로 남부 귀족들의 자손들이 대표가 되어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평화를 나아가자는 취지란다.”
주레인 공작의 뒤이은 그 말에 주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남부……!’
“주안아?”
주안의 표정이 잔뜩 굳은 채 몸을 흠칫 떠는 것에 곁에 있던 안젤라가 갸웃한다.
하지만 이내 이런 주안의 모습에 안젤라가 주안을 꼬옥 안아주며 남편, 주레인 공작에게 한 소리를 하였다.
“이거 보세요. 주안이도 싫어하잖아요.”
“으음…….”
주안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젤라의 언급에 깨달은 주레인 공작이 침음을 삼켰다.
아스란 왕국이 전쟁 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다들 알고 있기에, 이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소문에 소문이 거듭되며 부풀려져 아이들에게 아스란 왕국민은 야만인으로 통할 정도였다.
그들은 아이들을 산채로 솥에 넣어 삶아 먹는다는 어이없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고, 그것을 일부러 조장하는 듯 이야기들도 심심찮게 퍼졌다.
하지만 주안은 아스란 왕국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언급한 남부. 그 귀족들 때문이었다.
‘그 인간들…….’
주안이 엄마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그런 험한 생각을 하더라도, 억지로 참아내며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참아낼 뿐이었다.
사실 남부는 절대 주안과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마르티네스 공작가에 반기를 들고 제국을 무너뜨리는 시초가 된 땅이었고,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집어삼킨 역적들의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 * *
크게 심호흡을 한 주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주레인 공작을 바라보았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그때와는 전혀 상관없어. 앞으로가 중요한 거야.’
지금은 남부를 대표하는 것이 하스웰 맥도넬 후작이라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처럼 황가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지는 않으나, 중도를 지킬 줄 안다.
맥도웰 후작은 황가와 남부의 징검다리가 되어서 남부를 달래는 역할을 정말 잘 해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벌어지지 않은 남부 귀족의 반란에 대해서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할 필요가 없었다.
주안이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런 과거를 계속 생각했다면, 주안은 토미도 품지 못했을 것이니까.
“그 외교와 문화 사절이라는 게 꼭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가야만 하는 건가요?”
“황가는 그리해 주길 바라나, 우리 가문이…… 네가 싫다고 하면 그러지 않아도 된단다.”
굳이 가문이 아니라, 주안의 의사를 물어본 것은 안젤라가 노려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레인 공작은 사실 공작령으로 내려갈 때만 해도 꼭 참여를 바랐던 인물이었지만, 되돌아왔을 땐 주안이 가기 싫어한다면 그 말에 따라 주고 싶다는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땐 그저 주안이 엄마 품에서 벗어나 조금은 세상 밖을 보고, 많은 것을 겪고 경험하고 배워 왔으면 해서 참여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주안을 본다면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강요를 하지 않았다. 이런 주레인 공작의 말에 담긴 의미를 느낀 듯 안젤라도 뭐라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주안만이 곰곰이 생각에 빠졌을 뿐이었다.
‘남부라…….’
그들이 당장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딱히 제국에 이를 드러낸 것도 아니다.
하스웰 맥도넬 후작이 살아 있는 한, 그리고 공작가와 제국이 강성한 이상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안은 한 가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남부를 집어삼키고 아스란 왕국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확실히 맥도넬 후작가의 후계자이자, 하스웰 맥도넬 후작의 뒤를 이었던 에반드리안 맥도넬이었다.
하지만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무너뜨린 후에는 그에 대한 소문은 전혀 없었다.
남부를 통일하고 아스란 왕국과 마르티네스 공작가까지 집어삼킨 뒤 신왕조를 열었던 것은 다른 인물이었다.
유우나 맥도넬.
에반드리안 맥도넬 후작의 아내이자 신왕조의 여왕이 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주안은 그녀로 인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그녀의 감시 아래 빈민의 생활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안전하게 말이다.
가문이 무너지고 주안이 길바닥에 내쫓겼을 때 그를 원망하는 이들이 많았음에도, 주안을 건드린 이는 없었다.
그가 어디 살고, 어디서 지내는지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은 바로 신왕조의 여왕이 된 유우나 맥도넬의 힘이라는 것을 주안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개처럼 짖으며 비참하게 목숨을 건졌던 주안은…… 그녀의 마지막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던 토미의 경멸 어린 눈빛도 말이다.
‘그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목숨이 참으로 아깝구나. 그렇게 살고 싶다면 살아라. 벌레처럼 땅을 기어서라도 살도록 해라. 네가 다치지 않도록, 내 보호해 주도록 하마. 그러니, 너의 비참한 모습을 내게 계속해서 보이도록 하거라. 저주받은 마르티네스의 후손이여.’
그 말은 주안의 가슴에 박혀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었다.
주안은 확실히 그때, 공작성을 버렸고, 많은 이들, 엄마인 안젤라와 소니아, 피터 그리고 가론 자작 등을 내버려 둔 채 도망쳤다.
하지만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듯, 그 길목에 기다리고 있던 토미와 유우나 맥도넬에게 붙잡혔고, 그렇게 개처럼 짖고 벌레처럼 기어서 살아남았다.
이후 두고두고 그녀의 말마따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녀에게 보였다.
‘지금의 그 여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유우나 맥도넬이란 인물은 사실 잘 알려져 있던 인물도 아니었고, 신왕조가 열린 뒤에도 그녀의 과거에는 비밀이 참 많았다.
신왕조가 열리고,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근거지였던 마를렌은 불탔으며, 그곳에 새롭게 지어진 도시의 뒷골목…… 빈민가에서 살아가며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면 뭐든 할 수 있었던 그때에도, 주안은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그녀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하찮은 그 목숨을 앗아갈 것 같았으니까.
비참하게, 그렇지만 계속 살아가고 싶었던 그런 벌레였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구걸을 하며, 쓰레기통을 뒤지며, 신관들의 적선을 받으며 오가는 이야기들과 소문만 귀에 담았을 뿐이었다.
“전…….”
주안은 재차 심호흡을 했다.
지금은 과거와는 다르다.
남부가 어떻고 아스란 왕국이 어떻고, 유우나 맥도넬이 어떻든 상관없다.
지금의 현재, 이 장소 그리고 이곳에 있는 자신이 중요한 것이다.
“……가고 싶어요. 그 외교 사절, 꼭 가고 싶어요.”
“주안아!”
안젤라가 놀라 소리쳤지만, 주안의 귀에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그런 결심을 했을 뿐이지만, 심장이 크게 요동쳤고 숨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가고 싶다.
자신이 직접 그들과 마주하고 싶었다.
그리고 직접 겪어보고 싶었고 느껴보고 싶었다.
자신의 집을 집어삼킨 그들은, 대체 무엇이 그렇게 얻고 싶었기에 마르티네스 공작령을 탐냈던 것일까.
마르티네스 공작령에는 조금 모자라지만 제국 내에선 손에 꼽히는 부유한 남부에 만족하지 않은 것인지,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