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24화
차로 인한 동방과 서방의 무역 전쟁은 이후에도 큰 불씨로 남아 번번이 이런 보복성 고관세 고세율로 인해 일반 서민들은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주안 역시 빈민이 된 이후, 간간이 벌어진 이 동방과 서방의 무역 전쟁으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쓰레기조차 구하지 못 해서번번이 굶던 일까지 있었으며, 그래도 가끔 빈민 구제로 오던 사제들조차 발걸음을 끊어 수많은 빈민이 굶어 죽는 것을 목격했던 증인이었다.
그러한 무역 전쟁의 시발점이 될 이 차는 결국 서방에서 재배되었지만 너무 늦었고, 차 종자를 수입하고 기술자들을 영입해 차 밭을 만들고 가꾼다 해도 시간은 너무나 오래 걸린다.
그사이 차는 계속해서 수입될 것이며 급등한 차의 가격을 낮추는 한편, 수익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현재 수입되는 차는 비싸도 너무 비싼 탓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현재의 비싼 차 값을 저희 공작령이 나서서 억지로 낮추고,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차 재배를 통해서 그 낮아진 값 그대로 유통시켜야 해요. 차를 사치품이 아닌 기호식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저희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어찌 되었든 동방의 물품은 저희 마를렌을 통해서 들어오니…… 거기에 대한 희생도 저희가 짊어져야 할…….”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가주님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따르는 귀족이다, 이것이냐.”
“네.”
“큭……. 하하, 하하하하!”
벡브란의 그 웃음에 주안이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조용히 그런 할아버지를 지켜보았다.
한참을 웃던 벡브란이 주안을 인자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안아.”
“네.”
“……네가 정말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내 손자가 맞는지, 지금은 의심스럽기만 하단다.”
“전 언제나 할아버지의 손자이자 아빠와 엄마의 아들인 주안 마르티네스예요.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거예요.”
“그래. 나의 손자, 주안 마르티네스.”
주안이 미소를 짓자, 벡브란 전대 공작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어주며 그런 주안을 마주 본다.
“이 차를 그런 이유로 손해를 감수하고 수입하려는 것을 보면 이 약초도 마찬가지더냐?”
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차는 몇 년 뒤 급변할 정세와 현재 무너져가는 홈멜스 상단 때문에 생각해 낸 것이지만, 그와 부가적으로 떠올린 것이 바로 약초였다.
“할아버지는 혹시 어디 아프거나 다치면 어떻게 하세요?”
“응? 그야 신관을 부르지. 아니면 의사 녀석들을 부르던가.”
“네. 맞아요.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평범한 영지의 시민들이 그분들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흐음……. 그건, 아니겠지.”
“대부분 참거나, 자체적으로 해결하거나, 민간요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토미나 토미의 여동생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일반적인 하층민들은 결국 이런 참고, 견디고, 알아서 해결하며 민간요법에 의지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약초라는 것은 우리도 쓰고 있지 않더냐.”
“맞아요. 쓰고는 있죠……. 하지만 체계적인 동방과는 달리 대충 산에서 보이는 것들을 뜯어 쓴다는 것이죠. 할아버지도 동방에서 약초가 어떻게 키워지고 사용되는지는 아시죠?”
“그야 알긴 하다만…….”
서방 대륙은 그래도 고위 귀족들과 돈이 있는 이들이라면 신관이나 의사들을 통해 충분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방 대륙은 조금 달랐다.
신관의 신성력이나 마법사의 마법 같은 것은 사술로 통하여 엄격히 금지되었고, 이로 인해서 그들은 자체적으로 몸을 치료하는 방법들을 알아내고 발전시켰다.
서방 대륙의 의사들과 같은 의원들은 이런 의술과 더불어 약초를 통한 치료는 서방의 치료보다 매우 우수했다.
신관이나 마법사의 힘을 빌린다면야 서방 대륙의 치료는 기적에 가깝지만, 서민들이 그것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 약초들을 배합하여 환단으로 만들거나, 탕약으로 만들거나 하면 효과를 더 높일 수 있지만, 단순한 약초의 그 효능만 가지고도 기초적인 상처나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충분했다.
그 때문에 동방 대륙에서는 서민들도 기본적인 약초들을 알고 있을 정도였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약초란 매우 가까운 치료제와 같았다.
“약초를 좀 더 널리 알릴 필요가 있어요. 기초적인 약초를 키우고 퍼뜨리는 것만이 아니라, 서방 대륙에 어떤 약초가 있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조사할 필요도 있어요.”
“그래서 그 기본적인 약초들을 수입해서 싼 가격에 파는 것도, 일반적인 영지민들이 익숙해지게 하기 위함이라고?”
“네, 그래야 직접 재배하고 그것을 알릴 때 더욱 편할 테니까요. 그리고 더불어 약초학에 정통한 인물들을 영입해 서방 대륙의 약초에 대해서도 조사해서, 일반 서민들도 돈이 없다 해도 스스로 약초를 구해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해요.”
“흐음…….”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이 조금 고민하는 듯했지만, 주안은 이것을 굽히고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빈민의 삶 속에, 작은 병이 커져서 고통에 죽어가던 이들을 수차례 보았다.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세라타만 봐도 그랬다.
분명 작은 병이었지만, 마땅한 치료법을 몰랐기에 병이 커진 것이 원인이었다.
만약 간단한 약초라도 있어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세라타나 토미도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대규모 차 수입과 약초 수입 그리고 그것을 재배하는 것은 여러 부가적인 효과를 가져올 거예요.”
“부가적인 효과라니?”
“먼저, 배를 만들어야겠죠. 저희 가문에는 마땅한 상선은 없잖아요.”
군선이라면 있지만 사실 상선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런 군선 중에서도 사용 가능한 수송선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을 상선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방 대륙과 거래를 하던 홈멜스 상단에는 상선이 있겠지만, 그들이 수입하던 것은 값비싼 귀족들을 위한 물품이었기에 거대한 선박도, 다수의 선박도 필요치 않았다.
“그 배들을 만들려면 또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통해서 영지 내의 쉬고 있던 많은 노동력을 끌어모을 수가 있어요.”
“확실히 배를 건조하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긴 하지. 이건 제레미아 백작의 조선소를 이용하면 되겠군.”
공작령 내에 위치한 가신들의 영지 중 하나인 제레미아 소벡 백작의 영지에는 대규모 조선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최근 마땅한 일이 없어 곤란해하던 그를 금세 떠올렸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에요. 배를 만들려면 당연히 목재가 필요하죠.”
“브리마……. 아니, 포스키아 자작령이라면 소벡 백작령과 가깝고 목재 수급도 원활할 거다. 그리고 그 목재 수급을 위해선 또 인력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추가로…….”
“그것을 운송할 운송 인력, 그들을 호위할 호위 인력, 그들을 먹고 입히기 위한 인력, 그것을 가공할 인력, 그들이 지낼 주택을 건설할 인력, 배를 띄워도 그것을 움직일 인력……!”
그 외에도 그들이 사용할 도구들을 만들기 위해서 가동될 대장간들과 그런 도구들을 만들기 위한 원자재 수급과 끝없이 돌아갈 광산들, 거기에 또 운송할 인력 등등…….
하나의 큰 사업에 수없이 많은 작은 사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짜로 돈을 풀어버리는 것은 무책임하고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죠.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고, 그들이 그것을 이용해 공작령 내에서 사용하며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면……. 저희 공작령의 지출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닐 거예요.”
“허허…….”
돈은 절대 고여 있어선 안 된다.
돈이란 자고로 돌고 돌아 끝없이 움직여야 하는 물건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다시 위로…….
높은 곳에서 돈을 풀어주고, 아래에서 그것을 받은 뒤 다시 그것을 사용해 위로 끌어 올려준다.
부의 이동은 높은 이들에게서부터 아래로 끝없이 이동되어야 하고 아래가 부유해질수록 다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자연스레 늘어난다.
당장 공작가 내에서 많은 지출을 하며,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일을 진행시킨다면 장기적으로 봐선 절대 손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공작가의 돈의 지출은 당연하겠지만, 그 돈은 결국 다시 공작령 내에서 쓰여 지고 공작령 자체의 경제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초석이 될 것이다.
영주민들이 부유하고 윤택한 삶과 만족도가 오르면 오를수록 공작가에 대한 충성은 자연스럽게 오를 것이고, 그 부가 결국 공작령 자체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대규모 인력이 필요할 때 필시 가진 것이 없는 빈민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그들을 빈민에서, 하층민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만든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공작령의 가용 인력으로 바뀌게 되고 그들이 모은 돈은 다시 공작령에서 쓰게 마련이니…….
“공작령의 경제는 탄탄해질 거예요. 그들이 돈을 벌고, 돈을 쓰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말이죠.”
이런 일은 가끔 성채를 짓거나 요새를 만들며 가도를 건설하는 등의 국가적인 대규모 사업들을 통해 보여지는 일이긴 하지만, 개인의 영지 내에서 시행되는 것은 매우 드물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규모가 너무나 차이가 난다.
그것은 제국 내에서도,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고 풍부한 마르티네스 공작령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주안의 계획을 알아차린 벡브란 전대 공작은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주안이 말하는 것은 사실 매우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쉽게 시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행하는 가문의 희생이 필요한 일이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며, 그 손해를 감당해 낼 자신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이 일을 일개 영지에서 시행한다고 하면 그냥 망하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자금을 댈 능력이 있는 공작가와 그것을 실행에 가능하게 하는 휘하의 여러 가신의 영지 그리고 그것을 도울 대규모 인력들까지.
공작령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이 할애비를 이 나이에 고생만 시킬 생각이구나.”
“헤헷, 죄송해요.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분이 엄마랑 아빠랑 할아버지뿐인걸요.”
“그래, 그래도 네 어미와 동급으로 놓아주어서 참 고맙구나. 네 아비와 동급인 점은 매우 불편하다만.”
엄마인 안젤라와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을 기뻐해도 될지 조금 고민이 되긴 했지만,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다던 주안이었기에, 그 정도 선에 놓아준 것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하는 것 없다고 생각하는 아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조금 싫은 듯한 벡브란 전대 공작이었다.
그리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손자인 주안 앞에서는 피우지 않으려 했던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인 후, 한 번 그것을 느긋하게 빨아들인 후 연기를 내뱉었다.
“홈멜스 상단은 확실히 동방과의 큰 교역을 하던 상단이긴 하였지만, 그들은 사치품만 다루던 상단이었단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 해도 사치품이 아닌 차와 약초를 수입 할 수 있을 것인지…….”
“로닐 상단주의 인맥이라면 가능할거라 생각해요. 적어도 그는 신용이 있던 인물이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는 신용이 있던 친구였지.”
아들 문제가 커서 그렇지 로닐 상단주 자체를 보면 매우 괜찮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벡브란이나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의 상단이 무너질 때 여럿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그렇게 깨끗한 인물은 몇 없었기에 다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가신 회의를 소집해야 할 것 같구나.”
“헤헷. 고생하세요, 할아버지.”
“넌 황도로 가면 끝이다, 이거냐?”
주안이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을 꼬옥 껴안으며 애교를 부리자, 그 행동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주안을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담배 냄새가 독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이런 행동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벡브란 전대 공작에겐 기쁨으로 다가왔다.
“주안아.”
“네?”
“이 할애비는, 네가 온 이 며칠이 너무나 좋더구나. 달라진 너의 모습이 너무나 꿈같아.”
“할아버지…….”
“정말 이대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정도란다.”
“그런 말 마세요. 제가 결혼하는 것도 보시고, 증손자도 안아 보셔야죠.”
“허허……. 결혼할 생각은 있고? 네 어미가 절대 허락 안 할 것인데?”
“으음……. 그, 그건…….”
“쯧, 사내 녀석이 엄마 무서워서 결혼도 고민하다니.”
엄마인 안젤라를 떠올리니, 주안도 그렇지만 할아버지인 벡브란 전대 공작도 마찬가지로 안색이 조금 나빠졌다.
실제로 주안은 엄마로 인해 결혼을 못 했었고, 벡브란 전대 공작은 그런 안젤라의 성정을 잘 알기에 주안의 결혼이 매우 불안했다.
“나, 나중에 설득해 보면 돼요. 그래도 엄마는 제 부탁이라면 잘 들어주시잖아요.”
“……그건 절대 안 들어줄 것 같다만.”
“으…….”
그 말에 주안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엄마인 안젤라의 그 집착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