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2화
마르티네스 공작령은 제국의 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바다를 끼고 있어 많은 항구를 소유한 제국 최대의 영지였다.
공작령에 속한 영지들은 백작령이 셋, 자작령이 일곱, 남작령이 열 한곳이었고, 그 외에 작위를 가진 다수의 귀족과 준귀족들이 공작가를 모시고 있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성이 위치한 곳은 항구도시 마를렌으로, 서방 대륙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근거지였다.
도시 이름은 시조 힉스 마르티네스 초대 공작의 아내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제국으로 들어오는 동방 대륙의 물건은 마르티네스 공작령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마를렌을 포함한 다수의 항구들은 크고 거대했다.
이런 물류 운송을 위해 만들어진 편의 시설과 창고, 도로 그리고 세금 혜택은 대단했다.
남부나 북부에 항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런 이유로 인해 동방 대륙의 물류든, 서방 대륙의 물류든 대부분은 마르티네스 공작령을 거쳐 서로 왕래하는 실정이었다.
다시 말해, 제국 최대의 항구를 포함한 제국 최대의 영지, 제국 제일의 부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마르티네스 공작가였다.
그런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항구도시 마를렌에 위치한 공작성은 최근 매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나 바쁜 도시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욱 바빠졌다.
바로 황도에 머물고 있던 현 마르티네스 공작의 가족들이 오랜만에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공작가의 가장 큰 어른인 벡브란 마르티네스 전대 공작의 생일로 인한 일이었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벡브란 마르티네스 전대 공작의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거, 바쁜 자식이 얼굴 한 번 안 비추다 이때만 되면 내려오는 거야.”
“그래도 안 오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냥 안 왔으면 좋겠다만?”
불만 가득, 집무실 소파에 앉아 동방 대륙에서 사용하는 곰방대를 이용해 담배를 피우는 벡브란의 투덜거림에 곁에 있던 가론 자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가론 자작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벡브란은 아들 가족을 정말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란 왕국과의 전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해 버리고 유유자적 살던 벡브란을 다시 가주의 집무실에 앉힌 것이 바로 그 아들인 현 마르티네스 공작 주레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며느리인 공작부인, 안젤라를…… 정말 싫어했다.
처음 주레인과의 결혼도 썩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행복해 보였고, 당시에는 안젤라 역시 모두에게 다정하고 살갑게 굴어서 벡브란도 서서히 마음을 열었었다.
문제는 안젤라가 유산한 후 몇 년이 지나서 가진 아이로 인해서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다.
아들을 치마폭에 감싼 채 힘든 일은 절대 시키려 하지 않았다.
귀를 틀어막고 좋은 말만 하며 세상을 보는 눈도 막아버렸고, 엄마만을 세상 전부로 만든 안젤라의 행동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도로 올라간 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 듯, 좋지 않은 소문이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을 정도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런 소문은 이미 배를 타고 동방 대륙까지 퍼졌다.
가문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했고, 다음에 이 가문을 이끌어갈 아이가 마마보이 주안이라는 점은 걱정을 넘어 절망을 안겨줘도 모자라지 않았다.
“빌어먹을…….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만 더 있었어도. 하다못해 손자든, 손녀든 하나만 더 있었어도……. 아니, 나한테 동생이라도 있었어도……!”
“지금이라도 새 장가라도 가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끄응……. 차라리 그랬었어야 했는데.”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애가 생길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벡브란 전대 공작에겐 최대의 아쉬움이었다.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아이가 무척 귀한 집안이었다.
저주인지, 축복인지 몰라도 반드시 아이는 태어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가 끊어지지 않고 아이는 태어났지만, 문제는 그 태어난 아이들이 대부분 하나였다는 점이었다.
물론 몇 대에 한 번씩 형제가 생기긴 했지만, 전대 가주였던 벡브란은 형제가 없는 외동이었고, 아들이자 현 가주인 주레인 역시 외동이었다.
비록 형제가 될 뻔한 아이가 있었지만, 주안은 안젤라가 유산 후에 태어난 아이이며 외동이었다.
선대 조상들이 아이를 더 가지기 위해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부부가 같이 몸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먹으며 노력하기도 했고, 아내의 허락하에 두 번째 아내를 얻기도 해봤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고, 지금에 와서는 그저 대가 끊어지지 않는 것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 때문에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은 여자라도 가주가 될 수 있는 특이한 가문이기도 했다.
벡브란 역시 주레인이 태어날 때 아내를 잃었지만, 그 후 새 결혼을 통해 아이를 가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가문의 천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내를 잊지 못했던 이유가 컸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인지, 후회만 가득했다.
“그런데 생신 준비는 정말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가론 자작의 말에 뻐끔뻐끔 곰방대를 피워대던 벡브란 전대 공작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뭘 번잡스럽게 그런 걸 챙겨.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한테. 그냥 적당히 창고나 열어서 영주민들에게 먹을 거든, 뭐든 필요한 것들을 좀 나누어 줘. 하는 김에 이번 달 세금도 좀 줄여주고.”
벡브란 전대 공작의 말에 가론 자작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세금을 줄여주는 것에 영주민들이 크게 기뻐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 거대한 영지의 세금을 줄여준다는 말을 하는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재력에 새삼 놀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황도에서 이번에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 사절 겸 교류를 위한 인원을 파견한다고 합니다.”
“그래? 그런데 그게 왜?”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남부 영주들과 저희 마르티네스 공작가에서 인원을 파견한다 합니다. 그것도, 혈족으로 말이죠.”
가론 자작의 그 말에 벡브란 전대 공작이 곰방대를 입에서 떼고 하얀 연기를 토해내며 한숨을 쉬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
“확실히 쓸데없는 짓이긴 하죠.”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이라면 그게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야만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다른 인물들도 아니고 당시 전쟁에 참여한 가문의 인물을 보낸다는 생각을 대체 어떤 멍청한 놈이 한 것인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을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벡브란 전대 공작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며느리가 그것을 찬성할 리도 없지 않나.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빠지겠지. 그리고 또 손가락질당할 거고.”
“아무래도 공작 각하와 벡브란 님이 가실 수는 없으시니까요.”
“쯧. 가론, 자네가 가보지그래?”
“……거기 가면 저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겁니다.”
“하긴……. 자네도 그놈들 여럿 썰었지. 가면 괜히 소란만 일어나긴 하겠군,”
당시 젊은 기사였던 가론 자작은 아스란 왕국의 행태에 크게 분노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특히나 형이 아스란 왕국의 어린 아이들을 이용한 자살 공격에 희생당한 탓에, 그 분노를 그대로 아스란 왕국 침공에 쏟아내었다.
지금이야 점잖은 중년이지만, 당시 제노폴 제국의 젊은 기사 중에서는 미친놈으로 통할 정도였다.
전쟁 당시에 피를 뒤집어쓰고 돌진하는 그를 오히려 벡브란이 말렸을 정도였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인지 가론 자작이 괜히 점잖게 보이려고 기른 콧수염을 매만졌다.
“후우……. 대체 가문이 어떻게 되려고…….”
“오래 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손자 녀석이 아이를 보고, 그 아이를 제대로 가르칠 때까진 살아 있을 거니, 걱정 말게.”
이미 손자는 포기했고, 손자의 아이인 증손자에게 기대할 정도로 아들 내외에 대한 실망은 컸다.
그것은 이곳, 공작령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주레인 공작은 나라의 재상을 겸하고 있는 탓에 공작령에 신경을 쓸 틈도 없었고, 공작부인은 아들을 끼고 사느라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손자인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는, 엄마만 보는 마마보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영주민들은 그가 정식으로 공작이 되어 공작령을 다스리는 것에 매우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벡브란 전대 공작도 그것을 잘 알기에 가능하면 오래, 그리고 손자가 아이를 낳고, 자신이 그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켜 어엿한 한 사람으로, 공작가의 가주가 되는 것을 볼 때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와아~!”
수많은 마차가 오가고, 수많은 사람이 오갔으며, 다양한 인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황도에서 출발해 마르티네스 공작령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약 20일. 거기다 마르티네스 공작령에서 다시 항구도시 마를렌까지 가는 데 20일이 걸렸다.
아무래도 공작령에 들어서며 오랜만에 휘하 가문들의 영지에 방문해서 만나다 보니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것을 제외한다 해도 마르티네스 공작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서부에서 동부의 넓이보다 북부에서 남부의 길이가 더 큰 마르티네스 공작가다.
만약 황도가 북부에 있고, 공작령 남부에 마를렌이 위치해 있었다면, 공작령에 들어서고 한 달은 족히 걸려 도착할 수도 있었다.
“세라타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토미가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마차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던 주안도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토미가 아주 목이 아프도록 이리저리 돌아보며 좋아하는 것을 보니, 몸이 아직 정상적이지 못한 세라타를 황도에 남기고 온 것이 괜히 후회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안은 품에 꼬옥 안고 있는 작은 상자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생신 선물은 엄마랑 같이 다 준비했는데……. 꼭 그런 걸 선물해 줘야겠니?”
황도에서 출발하기 전 엄마인 안젤라와 함께 할아버지 생신 선물을 위해 쇼핑을 했던 주안이었다.
보통은 직접 주문을 넣고 잔뜩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주안 자신이 직접 다양한 것을 보고 구입하고 싶다 하였고, 그것은 엄마뿐만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한 쇼핑이기도 했다.
이때만큼은 아빠인 주레인 공작도 뭐라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 생신 선물을 위한 쇼핑이니 말이다.
거기다 오랜만에 다 함께 하는 외출이었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함께 준비한 선물 외에도 주안은 따로 토미와 함께 외출해서 할아버지의 선물을 준비했다.
안젤라는 그것을 알고 마땅치 않아 했다.
“이런 건 처음이잖아요. 처음으로 제 손으로, 제가 직접 고른 선물을 할아버지한테 전해주고 싶어요.”
사실 그동안 함께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모두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고, 이번 선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안젤라는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따로 준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괜히 침울해졌다.
주안이 그런 엄마를 달래듯 안젤라를 꼬옥 안아주며 말했다.
“다음 엄마 생신에도 비밀 선물 해드릴게요. 화 푸세요, 네?”
“이미 말을 해놓으면 비밀 선물이 아니지 않니?”
“앗?!”
실수를 깨달은 듯, 깜짝 놀라는 주안의 모습이 마냥 귀여웠던 것일까?
안젤라는 언제 심통이 났냐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주안을 꼬옥 안아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을 주레인 공작도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주안이 스스로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고, 엄마에게 휘둘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엄마를 달래는 모습이 주레인 공작을 안심시키는 한편 흐뭇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