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10화
“할아버지 생신이요?”
저녁이 되어 돌아온 아빠인 주레인 공작과 저녁을 먹던 주안은 아빠의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곧 네 할아버지 생신이라 오랜만에 공작령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구나.”
‘아, 그러고 보니 곧 할아버지 생신이시지.’
주안의 할아버지인 벡브란 마르티네스 전대 공작은 황도에서 지내는 아들 내외를 대신해 공작령의 전반적인 업무를 모두 담당하고 있었다.
주안의 아빠인 주레인 마르티네스 공작과는 달리, 벡브란은 한때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지낸 일도 있었다.
아스란 왕국과의 분쟁에서 남부의 고릴라라고 불렸을 정도로 검술에도 매우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현재의 주레인 공작을 보면 인자하고 학식이 뛰어난 학자로 보이겠지만, 벡브란 전대 공작은 완전 반대였다.
남부의 고릴라라 불렸던 만큼, 그는 엄청난 근육질의 소유자였다.
나이를 먹고 공작령의 업무만 본 탓에 지금은 검술의 랭크도 떨어졌지만, 그래도 웬만한 기사는 맨주먹으로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정정했다.
‘할아버지 안 본 지 좀 되긴 했지…….’
외할아버지야 바로 옆집이라 할 수 있는 황궁에 살고 있어서 조금만 걸음을 옮겨도 볼 수 있었고, 얼마 전에도 직접 봤었다.
하지만 마르티네스 공작령은 황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탓에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안이 할아버지인 벡브란 마르티네스 공작을 마지막으로 본 시기는 거의 30년도 더 전이었다.
“할아버지…….”
“……응? 주, 주안아?”
주안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곁에 있던 안젤라가 대신관을 찾으려 했지만, 소니아의 만류에 조용히 손수건으로 주안의 눈물만 훔쳐 주었다.
하지만 주안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정정하시지만, 주안의 나이 서른쯤에 할아버지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고,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았다.
무엇보다 주안에게 가장 후회스럽던 일 중 하나는, 바로 그런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않고, 엄마와 타국의 유흥가에서 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장례식 역시 아빠인 주레인 공작 혼자 지켰다.
이쯤부터 주레인 공작은 아내인 안젤라와 아들인 주안을 포기한 듯 더 이상 신경을 쓰지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도 없이 남처럼 지냈다.
그때의 그 기억 그리고 후회가 떠오른 것인지, 주안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허…… 그래, 보러 가자꾸나. 그래야지.”
주안이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눈물까지 흘리니, 주레인 공작은 오히려 큰 기쁨을 느꼈다.
엄마만 찾던 아이가, 다른 가족을,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울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지.
하지만 흐뭇해하는 주레인 공작과는 달리 안젤라는 그런 아들을 꼬옥 안아 달래주며, 웃음 짓는 주레인 공작에게 잔뜩 핀잔을 주었다.
* * *
평소 같았으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주안과 안젤라은 따로 산책을 하러 갔을 것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남편인 주레인 공작 탓에 자리에 남은 안젤라가, 불만이라는 듯 잔뜩 볼을 부풀리며 주레인 공작에게 투덜거렸다.
“이제 주안이랑 씻고 산책하고 밤에 야경 구경하러 갈 계획인데, 왜 부른 거예요?”
“……할 일이 많아서 참으로 좋겠소.”
“흥!”
서른 중반이 되었어도 여전히 젊었을 때의 말투와 행동을 보여주는 아내의 모습에 주레인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 그 외모는 여전히 젊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서로 알 것 다 아는 사이인 자신이 보기엔 주책처럼 느껴진다.
하녀가 차를 가져오자, 조용히 한 모금 마신 주레인 공작이 말했다.
“이번에 황성에서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 사절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소.”
“그 야만인들이랑요? 아빠가 웬일이시람.”
제노폴 제국은 서방 대륙 동부의 절대 강자였다.
주변 국가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으며, 딱히 어딘가를 침공해 땅을 넓힌다는 팽창주의자들도 아니었기에 사이가 나쁠 수가 없었다.
단 한 곳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바로 제국 남쪽에 자리 잡은 아스란 왕국이었다.
“그들이 호전적인 것은 맞지만, 야만인은 아니오. 그들에게도 그들의 문화가 있고 역사가 있소.”
“그래 봐야 남부 밀림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일 뿐이죠.”
안젤라의 쏘아붙이는 그 말에 주레인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자신 역시 남부의 야만인들이라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었다.
남부 지역의 영주들이나, 전대 마르티네스 공작이자 아버지인 벡브란 역시 그들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종자들이라고 늘 그랬었다.
남부나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이 조금 심하긴 하지만, 제국 전체로 봐도 아스란 왕국은 절대 좋게 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덜하지만, 주레인 공작의 아버지인 벡브란이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지낼 당시, 지긋지긋하게 침공해 오는 그들로 인해서 벡브란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심한 고생을 했었다.
처음에는 대체 이 종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제국에 칼을 들이밀고 미친 듯이 달려오나 싶었다.
이후 그 이유를 알게 되자, 이해는 되었지만, 그렇다고 침공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들도 다 살기 위해 그랬던 것이오. 바닷길은 막혔고, 남부는 밀림에, 대흉년까지 겹쳐 우리 제국을 지나오던 식량 길이 모조리 끊겼으니, 그들로서 선택지는 없었겠지.”
“그렇다고 선전포고도 없이 남의 나라를 기습적으로 침공한다고요? 게다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제 열 살이나 될 법한 아이들을…… 그것도 남녀를 가리지도 않고, 전쟁 통에 밀어 넣는 것들이 야만인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이에요.”
“어차피 뒤에는 죽음밖에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제국에서 검을, 연습용 검이 아닌 진짜 검을 쥐기 위해서는 성년으로 인정받는 열여덟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정식으로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후견인이 필요하고 해당 지역 영주의 허가도 필요했다.
그 후 스물이 되어야 정식으로 검을 쥘 수 있었다.
군역 역시 마찬가지다.
의무이긴 하나, 입대 가능한 나이는 스물이었다.
집안에 일할 수 있는 이가 군역을 져야 하는 청년 하나라면 면제를 받을 수도 있으며, 군역을 지는 대신 그 기간 모자라지 않게 금전적인 지원도 해준다.
하지만 이런 제국과는 달리 당시 아스란 왕국은 말 그대로 야만인이나 할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손에 검을 들 힘만 있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조리 전쟁 통에 밀어 넣었다.
제국은 그런 아스란 왕국의 행태에 분노했고, 전쟁 당시 이런 이유로 아스란 왕국의 많은 이가 희생당했다.
아스란 왕국뿐만이 아니라 제노폴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검을 들이댈 수 없는 우리 제국민이 그때 얼마나 희생당했는지 아시면서 그러세요? 게다가 그놈들은 그 점을 이용하기까지 한 극악무도한 놈들이었단 말이에요.”
안젤라가 분노에는 바로 이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아이들을 이용해 제국의 기사들을 죽이는 만행. 난민으로 위장해 테러를 일으키던 아이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종한 아스란 왕국의 귀족들.
그들은 사람이 해선 안 될 짓들을 너무나 많이 저질렀고, 그렇기에 제국의 국민들은 아스란 왕국이라면 치를 떨었다.
“그때와 상황은 변했소. 당시 그런 명령을 내렸던 왕은 오히려 국민들의 손에 목이 잘렸고, 다수의 유력 귀족들도 모두 바뀌었으니 말이오.”
“흥. 그걸 그들 스스로가 한 게 아니죠. 우리 아빠가, 우리 제국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아버님이 앞장서셨고.”
이런 아스란 왕국의 행태에 처음에는 제국의 피해가 심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아스란 왕국을 대륙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생각을 품진 수많은 젊은 제국민이 자원하여 입대하였고, 이미 병역을 마친 이들도 수없이 몰려들었다.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이던 벡브란 마르티네스 공작은, 대륙에서 아스란의 이름을 지워 버리겠다며 가문의 정병까지 모조리 끌어모았다.
현 황제의 허락하에 제국은 방어가 아닌 침공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실제로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정병과 남부군 그리고 남부 영주들의 군사를 합한 숫자만 30만이 넘었다.
중앙군은 참여도 안 하였고, 자원하여 입대한 군사들 역시 전혀 없는, 순수하게 남부와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힘만으로 모은 숫자였다.
기습으로 남부의 성과 요새 그리고 도시에 피해를 준 아스란 왕국이었지만, 방어가 아닌 침공.
그것도 나라 자체를 지워 버리기로 마음먹은 제국의 힘 앞에서는 소용없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달.
아스란 왕국의 수도로 가는 길이 보름.
협상 겸 전범 처리에 오 일.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길이 열흘이었다.
그 한 달 만에 아스란 왕국은 왕이 바뀌었고, 전쟁을 주장하던 귀족들은 목이 잘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나라와 아스란 왕국 국민들을 모조리 지워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던 당시의 마르티네스 공작인 벡브란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최고위 귀족들과 왕만을 처단하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그 후 마르티네스 공작 벡브란의 보고를 받은 황실은 아스란 왕국에 무상으로 원조를 하게 되었고, 흉년이 끝난 지금까지 무상 원조는 계속 이어졌다.
이에 제국민들은 황실에 많은 실망을 했으며, 그 후 아스란 왕국과는 별 탈 없이 지냈지만, 여전히 제국민들은 아스란 왕국이라고 하면 이를 갈았다.
“아버님은 대체 왜 그때 그 야만인들을 그대로 두고 오신 것인지,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어디든 위가 썩으면 아랫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이라오. 부친께서도 화가 많이 나셨지만, 아스란 왕국민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아셨을 뿐이라오.”
지금 주레인 공작이, 이 말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안젤라와 주안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주안이 점점 정신을 차리고 있고, 그 영향인지 안젤라도 조금은 공작부인다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 외교 사절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 거예요?”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남부의 영주들과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를 주축으로 외교 겸 교류를 위한 사절을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오.”
“그딴 야만인들에게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교류를 해요? 정말 아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황제 폐하요, 황제 폐하. 제발 말을 좀 가려 해주시오.”
“황제 폐하 이전에 우리 아빠거든요? 흥!”
“하아…….”
그나마 집안에서만 이런 언행을 한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근래 부인이 조금은 바뀌나 싶었으나, 그대로라는 것에 주레인 공작은 적잖이 실망했다.
“일단 당신에게는 말을 해주어야 할 것 같소.”
“뭘요?”
“외교 사절 중 우리 마르티네스 공작가는 주안을 보내려고 하오.”
“…….”
주레인 공작의 말에 안젤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찻잔을 들고 일어나, 주레인 공작에게 집어 던지려고 했다.
“……아니, 그러니까. 찻잔은 좀 내려놓으시오. 이건 황제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란 말이오.”
황제 폐하가 언급되자 안젤라는 찻잔을 도로 내려놓은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주레인 공작을 지나쳐 방을 나서려고 했다.
“어, 어딜 가시는 거요?”
“아빠한테 따지러요.”
“……제발 이야기를 좀 끝까지 들어주면 안 되겠소?”
야밤에 아빠 집이라고 황실로 쳐들어가는 딸이자, 전 황녀 그리고 현 공작부인이라니.
안젤라가 자신의 말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주레인 공작은 심한 두통을 느낀 것인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안젤라를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대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우리 주안이가 왜 그딴 더럽고 무식하고 불결한 야만인의 나라에 외교 사절이랍시고 가야 하는 건데요!”
“꼭 외교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오. 서로 다시는 불행한 일이 없도록, 문화도 교류하고 평화를 다지자는 의미가 강한 것이라오.”
특히나 젊은 귀족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남부의 귀족과 마르티네스 공작가의 후계자가 참여하는 교류단의 의미는 특별했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남부 귀족과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은 여전히 강성하다는 경고의 의미도 있었고, 적어도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제국도 칼을 들이밀지 않겠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이 교류를 통해 아스란 왕국과의 교역 확대라는 이득을 얻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 거라면 꼭 후계자가 갈 필요 없이 가문의 누구라도……!”
“나도 독자이고, 우리 주안이도 독자라오. 그럼 나나 부친께서 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젊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나나 부친께서 갈 입장은 아니잖소.”
제국의 재상이 가는 것도 이상하지만, 당시 전쟁에 참여하고 아스란 왕국의 왕과 귀족들을 처단한 벡브란이 간다면, 외교고 나발이고 다시 전쟁이나 일어나지 않으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럼 거절하면 되잖아요. 왜 꼭 우리예요?”
“대표라 어쩔 수 없다오. 당시 아스란 왕국과의 전쟁을 주도한 것은 결국 우리 가문이니 말이오.”
당시 마르티네스 공작은 남부군 총사령관이었고, 직접 침공군을 이끌고 아스란 왕국의 수도로 진격해 왕과 고위 귀족들을 처단하고 돌아온 인물이었다.
그런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의 외교 사절, 그것도 당시 전쟁에 참여한 귀족의 혈족들이 가는 것이었다.
중심이 되었던 마르티네스 공작 가문이 빠진다면, 이 외교 겸 교류 사절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 반대예요. 절대 반대예요. 아시겠어요?”
“조금 진정하시고, 시간은 아직 있으니 천천히 좀 생각을 해 주시오.”
“천천히 생각하든, 급하게 생각하든 전 절대 허락 못 하니 그렇게 아세요!”
“안젤라…….”
반대할 것이라고는 대충 예상하고 왔지만, 황제 폐하와 중신들의 의견을 모은 것이기에 그래도 설득해 볼 생각이었던 주레인 공작이었다.
하지만 안젤라의 저 모습을 보니 설득 따윈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잘못하면 진짜 친정, 그러니까 황궁으로 쳐들어가서 아빠인 황제 폐하에게 따질 모습이라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주안이를 설득해 봐야 하나.”
예전이라면 이런 생각 따위 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엄마 말만 듣는 그 아이에겐 아빠의 말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안젤라가 저렇게 극렬히 반대한다면 당연히 엄마 말을 듣고 절대 가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여전히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지만, 아빠 말도 잘 듣고, 주변의 말도 잘 듣는 그런 아이로 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 할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주레인 공작은 이번 아스란 왕국과의 외교 겸 교류 사절에 주안을 보내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안젤라에게 말을 꺼낸 것이니까.
“일단 조금 더 설득해 봐야겠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가능하면 안젤라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은 주레인 공작은, 다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주안이라면 모를까, 안젤라를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나라의 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