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가의 마마보이 9화
“사람은 역시…….”
주안이 책을 덮고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눈꺼풀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피로를 풀며 말했다.
“……갑자기 변하지 않지.”
그리고 그대로 책 위에 엎드린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원래 머리 나빴지. 그래, 그런데 갑자기 책이라니. 말도 안 되지, 그럼.”
안 그래도 안 쓰던 머리였다. 가문이 망하고 빈민이 되었을 때는 먹고 사는 것도 급급한데 책 따위를 읽거나 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머리 안 쓰고 산 것이 60년이 넘었고, 그런 상황에서 안 하던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래, 뭐. 그냥 현상 유지만 해도 되잖아, 원수지는 일 없이. 그리고 아빠랑 할아버지가 오래 사시면 가문도 안전할 거고. 그러면 제국이 망할 일도 없을 거잖아. 응, 그거면 돼.”
게다가 사실 미래도 잘 모르는 입장이라 무언가를 바꾸고, 고치고, 내가 최고가 되자는 그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굵직한 사건들이야 어느 정도 알았지만, 가장 큰 사건인 제국과 가문이 무너진 것 외에는 사실 논외로 쳐도 되었다.
이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에 엮인 사건들도 생기지 않을 것이니까.
“목표는 하나야. 가문과 제국의 안전. 그것만 신경 쓰면 돼. 어차피 가장 큰 문제였던 토미도 여기 있는걸.”
다른 무엇보다 제국과 가문에 칼을 꽂아버린 토미가 지금은 이곳에 함께 있다는 점은 그 무엇보다 든든했다.
아직도 검을 쓰는 것을 무서워하는 토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뭐, 다른 것을 다 지키지는 못해도, 하나만 잘 지키면 돼.”
웬만해선 엄마 말을 듣지 않는 것.
그렇다고 엄마의 말을 모두 다 어길 수는 없지만, 들어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만 구분해도 나라와 가문을 살릴 수 있다.
주안은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고, 이것만 신경 써도 비참한 미래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주안은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 * *
주안은 머리라도 식힐 겸 그리고 토미나 만날 겸 기사들의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우락부락한 기사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안이 싱긋 웃으며 다가가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세라타, 오늘도 여기 있었어?”
“아? 도, 도련님…….”
주안이 다가와 말을 건 것도 깜짝 놀랄 일이지만, 친근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에 세라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허둥거렸다.
그 곁에는 아직 건강을 찾지 못한 세라타를 위해 하녀가 한 명 있었지만, 주안이 세라타의 곁에 서자 그녀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다.
“몸은 좀 괜찮고?”
“네……. 많이 좋아졌어요. 다 도련님이랑 안젤라 님 덕분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얼른 건강해지면 돼. 알겠지?”
“네, 네…….”
세라타는 얼굴을 잔뜩 붉히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고, 깨어 있는 시간이 길지도 않았던 세라타였다.
하지만 집중적인 치료를 받으며,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서 그런지 한 달가량이 지난 지금은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물론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서서 걷는 것은 조금 힘들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침대에만 누워 있지 않아도 되었으며,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지도 않았다.
세라타의 이런 건강한 모습에 만족한 듯, 주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세라타와 하녀를 데리고 연무장 한쪽에 마련된 의자로 향했다.
세라타와 함께 편하게 앉은 주안은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또래 소년을 보며 미소 지었다.
“토미는 오늘도 열심히 구르는구나.”
“피터 기사님은 오빠를 너무 심하게 대하시는 거 같아요…….”
“으음……. 확실히 기사들의 훈련이라는 게 힘들긴 하지. 게다가 피터 아저씨는 황실 근위대 소속이기도 해서 그런지, 더 심하긴 해.”
일반적인 기사의 훈련도 상당히 힘들지만, 황실 근위대는 인간이 아닌 병기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기본적으로 랭크 5의 기사가 아니라면 입단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그들에게도 황실 근위대의 훈련은 고되었다.
그들은 확실히 인간으로서, 기사로서 훈련하기보다는, ‘황실을 지키는 검’이라는 병기로서 완성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황실의 검이자 병기라는 집단에 있던 피터다.
비록 지금은 공작가로 시집을 온 안젤라의 호위를 위해 황실 근위대를 탈퇴했지만, 그 실력만큼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런 피터가 토미에게 시키는 훈련은 이제 막 검을 잡고 배움에 나서는 아이에게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그나마 제국법으로 인해서 미성년자 아이에게 날이 선 검을 쥐여주어서는 안 되고,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시키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기에, 그 선을 잘 지키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으음……. 너무 심하다고 말을 해야 하나.”
“꼭, 그렇게 해주세요. 네? 도련님…….”
“으응……. 한번 말은 해볼게.”
하지만 피터가 과연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는 솔직히 좀 회의적이었다.
마땅치 않아 하던 피터는, 최근 토미를 가르치는 것에 푹 빠진 듯했다.
처음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 내어 아주 기초적인 운동을 하는 방법만 알려주었지만, 최근에는 점차 본격적으로 검을 가르치는 듯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요즘에는 주안의 하인을 자처하며 따라다니는, 토미의 개인 시간보다 피터의 곁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진 듯했다.
지금도 발목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며, 목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그 검술이 나올까.”
“네?”
“아, 아무것도 아냐.”
세라타가 주안의 중얼거림에 갸웃했지만, 주안은 애써 웃어주며 얼버무렸다.
사실 검성 시절 토미의 검술은 서방 대륙의 검이 아니었다.
출신이 서방 대륙인 이 땅의 제노폴 제국이었을 뿐이지, 토미가 쓰던 검술은 동방 대륙의 검술이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토미의 스승은 동방 대륙의 검사였기 때문이었다.
서방 대륙의 검이 육체를 극단적으로 훈련시키고, 외적인 부분을 강화하여, 육체와 검의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힘의 검술이라면, 동방 대륙의 검술은 외적인 부분보단 내적인 부분을 더욱 중요시하며, 빠름과 날카로움을 중시하는 속도의 검술이었다.
두 검술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다고 평가하긴 사실 어렵지만, 각각의 검술에는 뚜렷한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서방 대륙의 검술은 재능이 있건 없건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최상위의 단계에 오르기가 힘들 뿐 좀 더 보편적인 검술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말 그대로 높은 단계, 랭크 7과 랭크 8의 단계에 오르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래의 기사와 검사는 많았기에, 적당한 실력을 갖춘 기사나 검사는 서방 대륙이 더욱 많다고 볼 수 있었다.
반대로 동방 대륙은 그 내적인 면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실행에 옮기는…… 어떻게 보면 연구와 재능을 통해 발휘하는 검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재능이 없다면 애초에 검을 잡을 수도 없었고, 잡는다 해도 어중이떠중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적인 깨달음을 얻어야만 대성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낮은 단계의 검사가 서방 대륙의 반의반에도 못 미칠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아니, 서방 대륙의 기사라는 계급과 비교할 만한 동방 대륙 무사 계급의 수는 눈을 의심하게 할 만큼 큰 차이가 났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 숫자를 의미 없게 만드는 실력이 있었다.
낮은 수준의 실력을 지닌 무사의 숫자가 서방 대륙에 비해 적다고 해도, 높은 단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반대가 되었다.
오히려 처음 검을 잡고 내면을 쌓는 부분이 어렵고 느릴 뿐이지, 높은 단계에 올라서는 무사들은 서방 대륙이 배 이상은 되었다.
그래서 높은 단계의 실력자는 동방 대륙이 우세했지만, 중간층 이하 기사의 숫자는 서방 대륙이 압도했다.
서방 대륙의 랭크 7의 기사가 채 30이 되지 않는다면, 동방 대륙은 60이 넘는다는 의미였고, 대신 그 아래 단계의 숫자는 동방 대륙보다 서방 대륙이 열 배 이상 많았다.
단순히 높은 랭크의 기사와 무사가 싸운다면 서방 대륙이 어이없이 밀릴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란 숫자놀음이라는 말처럼 압도적인 기사의 숫자를 보유한 서방 대륙이 전쟁에선 절대 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 서방 대륙과 동방 대륙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사실 다 의미 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 전쟁은 없지. 단지, 서로 더럽게 견제할 뿐이지.’
과거이자 미래에는 이런 서방과 동방의 기 싸움이 일어났지만, 실제로 전쟁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서로 보이지 않는 칼을 휘두르며 수면 아래에서 세력 싸움을 했을 뿐이다.
“뭐, 그래도 토미의 재능이면 우리 검술로도 대성할 수 있을 거야.”
“정말요?”
“아, 응. 피터 아저씨가 저렇게 진지하게 토미를 가르치는 걸 보면, 절대 재능이 없는 게 아냐.”
“헤헷.”
오빠를 칭찬해서 그런지 세라타가 귀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열세 살의 세라타는 잘 먹지도 못하고, 심각한 영양실조와 병으로 침대 신세만 진 탓에 또래 아이들보다 더욱 체구가 작고 왜소했다.
지금은 살이 좀 오르고 건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또래 아이들보다는 어려 보였다.
그래도 푸석푸석하던 하얀 머리카락에는 생기가 돌아왔고, 토미와 마찬가지로 빨간 눈은 반짝이며 보석처럼 빛났다.
“오빠는 요즘 정말 즐거워 보였어요. 피터 기사님 때문에 매번 힘들어하며 방에 들어와도, 항상 웃었어요.”
“피터 아저씨의 답답한 점은 안 닮아도 되는데……. 훈련받은 날은 내 하인 일은 안 해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듣더라.”
사실 저런 훈련을 하고 난 뒤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것인데도, 토미는 늘 훈련이 끝나면 씻은 후 주안의 하인 일을 하러 왔다.
근육통으로 온몸이 아파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하인의 일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답답할 정도로 외골수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도 오빤 하고 싶은 일을 하셔서 그런지 정말 행복해 보여요.”
“하고 싶은 일이라……. 세라타 넌 하고 싶은 일 있어?”
“전, 건강해지는 거예요. 건강해져서 오빠 걱정 안 시키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응, 그건 곧 이루어지겠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는 세라타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고, 일상적인 일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대신관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기에 주안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주안에게 세라타가 물었다.
“그러는 도련님은 뭘 하고 싶으세요?”
“나?”
“네.”
세라타의 말에 주안이 곰곰이 생각하다,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응, 그냥 우리 집을 잘 지키는 것. 경비견 같은 거?”
“풋, 아하하. 그럼 멍~ 멍~ 하고 짖기도 하시겠네요?”
“멍~ 멍~”
“아하하하.”
주안이 강아지 소리를 내자, 그게 또 재미있던 것인지 세라타가 배를 잡고 웃었다.
세라타뿐만이 아니라 곁을 지키고 있던 하녀도 작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내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난, 진짜 경비견이라도 되고 싶어.’
집안과 가문 그리고 제국까지 망하게 만든 죄를 지었기에, 차라리 그런 경비견이라도 되어 집을 지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지금 주안의 목표는 단 하나다.
집을, 가문을 지키는 것.
그것만을 목표로 다시 살아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