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카데미의 무공교관 120화
총력전
날이 밝자 제국군은 도시 점령을 시도하는 대신, 방향을 돌려 그대로 철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대의 총책임자였던 게일을 비롯한 초인 전력까지 잃은 마당에, 굳이 무리해서 이 지역을 공략할 필요가 없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적들이 물러간다!”
“우리가 승리했노라!”
“와아아악-!”
도시를 지켜냈다는 사실에 연합군은 모두가 만세를 부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비록 아르마니아의 도시에서 조국의 영웅들이 아닌 외국의 초인들 칼릭스와 알론드가 주축이 된 싸움이었다지만, 어쨌거나 병력 우위에서 밀리던 연합군이 제국군을 물리친 그림이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승전보는 그리 오래 기억되지 않았다.
대륙 곳곳에서 발생한 제국과의 전투에서, 연이은 패배의 소식들이 무더기로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아르마니아의 두 번째 수도나 마찬가지인 힐테리아가 수성에 실패했습니다. 도시는 점령당했고, 수비를 책임지던 로베르츠 공께서 전사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북부 지역의 대부분이 제국 놈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남부도 위기인 건 마찬가지이오. 아르마니아를 중심으로 간신히 전선이 지탱되고는 있지만, 계속되는 패배에 사기는 바닥이고 보급선조차도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소.”
“제국의 전력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어찌 들려오는 전황이 전부 패전뿐일 수가 있나.”
누군가의 한탄에 연합군의 수뇌부들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지전이 모조리 패배로 돌아가는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다.
“소모성의 자원이라곤 하지만 일시적으로 초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이 있다니…….”
“제국이 설마 진심으로 제국 통일을 노리고 출병을 했겠느냐 싶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힘을 갖추고 있다면 정복의 야욕을 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군.”
“어쩌면 좋겠소? 벌써 몇몇 작은 국가들은 지휘 체계를 잃고 제국에 흡수당했거나, 연합에서 이탈해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고 있는 실정이오.”
“허어…….”
아르마니아의 그랜드 마스터 한 사람이 전사함으로써, 연합 측 초인은 숫자가 6명으로 줄어들었다.
제국 또한 칼릭스의 손에 대마도사 게일의 목이 날아감으로 초인의 수가 줄었다지만, 기존 초인들과 별개로 한시적 그랜드 마스터라는 특수한 전력의 숫자가 몇이나 되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 상황.
비록 반쪽짜리라곤 해도 그런 가짜 초인들이 한자리에 여럿 모이게 되면, 연합군의 초인들은 각개격파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초인들이 몸을 사리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주도권을 적에게 내어주고 밀리기만 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연합군이 불리하기만 한 사태이기에, 각지에서 통신마법을 통해 회의를 진행하던 수뇌부들은 이렇다 할 좋은 의견을 내지 못하고 다들 입을 다물었다.
“수명을 대가로 힘을 발휘하는 능력이라면, 그쪽 전력이 대부분 소비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되지 않을지…….”
“어차피 전쟁을 초인으로만 치를 수는 없는 법이잖소. 병사들 없이는 점령지의 통제를 유지할 수 없으니.”
“그도 그렇지. 제국군의 수가 많다곤 하지만, 저들이 짓밟고 온 그 넓은 땅들을 전부 지배하에 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결국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으니, 우리 연합군이 힘을 모아 몇몇 요충지들만 지켜낸다면…….”
“요충지라.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게요?”
누군가 던진 마지막 질문에, 각국의 대표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다들 자신들의 조국에 유리한 방식의 의견을 내놓았다.
당연히 제대로 합의가 될 리가 없었다.
“북부와 남부 지대는 어차피 이미 제국의 손아귀에 넘어간 거나 마찬가지잖소. 차라리 중부 쪽에 전력을 집중시킵시다.”
“무슨 헛소리를! 한번 내어준 땅을 되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본국이 입는 피해를 귀국에서 보상해 주기라도 할 거냔 말이오!”
“크흠! 어차피 중부가 뚫리면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니, 가장 많은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잖소.”
“우리 벨루나이는 그 의견에 찬성입니다.”
“찬성은 얼어 죽을! 서부 국가들이야 아직 제국 놈들의 침공을 제대로 맛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중부 지역을 방패로 삼고 싶겠지!”
“어허! 그 무슨 무례한 망발인가!”
좀처럼 희망이 보이질 않는 전쟁.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병력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애초에 다들 자신들의 국토를 먼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니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합군 내부의 균열이 커져가며 결속이 무뎌져 가는 동안에도.
제국군은 차근차근 각국의 도시들을 점령해 가며, 대륙일통을 향한 진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 * *
“영주님!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음. 제가 국외에서 꽤 오래 돌아다니긴 했지요.”
“제국군의 동향에 대해서 매일같이 안 좋은 소식만 전해져 왔었습니다만, 정말 그렇게 심각한 상황입니까?”
몇 달간의 바깥 생활 끝에 귀국하여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칼릭스는, 자신의 심복인 닐슨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문제 해결을 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사태가 더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모양이군요.”
제국군의 침공으로 연합군은 거의 와해되었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었으며, 이미 대륙의 땅 절반 이상에는 제국의 깃발이 꽂히게 되었다.
연합의 남은 세력들이 중부를 틀어막고 필사적인 저항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전선이 뚫려 서부 지역까지 전장이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연합군에서 중심을 잡으며 애써 그들을 이끌어 버텨보려던 칼릭스조차도, 결국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다가 본국인 알펜시아로 복귀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
“그래도 당장은 우리 알펜시아가 전화에 휩싸이진 않을 겁니다.”
“엇, 무언가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도 여태껏 집어삼킨 땅들이 자신의 덩치보다 몇 배는 크다 보니,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소화를 시키느라 전쟁 자체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아……. 딱히 희망적인 이야기는 아니었군요. 시간이 지나면 결국 대륙 전체가 제국의 주둥이 속으로 삼켜지게 될 테니……. 저희 알펜시아 역시 버텨낼 재간이 없겠지요?”
“전력의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시간이 20년…… 아니, 하다못해 10년 정도만 더 있었더라면……! 후우!”
칼릭스에 의해 체질 개선을 겪은 알펜시아는, 지금도 아카데미 사업을 통해 수많은 인재들이 양성되며 국력을 빠르게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국가사업의 단위로 병력을 강성하게 키우기 시작한 지가 고작해야 몇 년이 지났을 뿐이니, 아직은 저 제국의 저력에 대항하기엔 시기상조일 수밖에 없었다.
모국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자신과 관련된 사업들을 둘러본 칼릭스는, 암울하기만 한 미래를 예상하며 크나큰 고민에 빠졌다.
‘지금의 흐름대로라면 대륙 전체는 결국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겠군. 그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 알펜시아의 저항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
대륙의 각 지역에서 패자로 군림하던 강대국들이 차례차례 쓰러지고, 적지 않은 수의 나라들이 전쟁을 포기하고 무조건적인 항복 의사를 밝히며 제국에 흡수되었다.
연합군도 반쯤은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금에 와서, 국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행동일지 의문이었다.
물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기사이자 귀족 된 자의 의무이지만.
그로 인해 국민 수백만 명의 목숨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게 정말로 올바른 결정일까 싶다.
‘유명무실해진 연합군 병력이라도 한곳에 밀집되어 총력을 기울인다면, 힘들긴 해도 제국과 결전을 벌여볼 만할 텐데. 그게 아니고서야 현 알펜시아의 힘만으로는, 제국에 맞서서 얻을 수 있는 게 멸망이라는 결과뿐이겠지.’
차라리 국가가 해체되어 흡수당하더라도, 항복을 통해 백성들의 삶이나마 보전하는 게 옳지 않을까.
매일같이 그런 고민을 하면서 제국의 동태에 관한 소식에 귀를 기울인 채, 칼릭스는 피가 마르는 듯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와중 연합 내의 강대국이란 위치 때문에 더욱더 철저히 제국의 집중 공격을 받고 무너진 다른 나라들과 달리, 알펜시아처럼 서부 지역에 위치함으로써 아직까지 무사한 축에 속하는 벨루나이로부터 뜻밖의 연락이 전해져왔다.
-칼릭스 공. 제국의 황제가 중부의 점령지를 통해 이동 중이라는 정확을 포착했소.
“황제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륙 통일의 업적을 달성할 서부지역에서의 마지막 격전은, 황제 본인이 직접 지휘함으로서 마무리하겠다는 의도가 아니겠소?
“으음. 확실히 그런 의도라면 황제가 친정을 나설 만하겠군요.”
-지금의 마지막 기회요. 황제가 서부의 전선으로 진입하는 순간을 노려, 연합군의 모두가 힘을 합쳐 그자의 목을 쳐야만 하오.
“제국의 머리를 친다라…….”
벨루시아에서 알려온 소식에 칼릭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현실성이 없는 계획은 아닌 것 같긴 했다.
황제를 제거한다고 해서 제국의 무력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황가를 거의 신처럼 숭배하며 수백 년간 하나의 핏줄이 지배해 온 제국의 혼란을 유도하는 효과만큼은 확실할 터.
‘황제의 죽음은 제국의 입장에서도 큰 충격일 테니, 곧바로 전쟁을 재개하긴 어려울 것이다.’
운이 따라준다면 차기 황제가 될 후계자들의 권력 다툼 같은 이유로, 혼란을 수습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잠시 시간을 버는 것일 뿐이지 결국 언젠가는 다시 제국에서 정복의 야욕을 드러내게 되겠지만, 현재의 위기를 모면하고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연합국들의 입장에선 감지덕지이다.
항복과 결사 항전 사이에서 매일 고민을 거듭하던 칼릭스 또한, 벨루나이 측의 제안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연합군의 전부가 총력을 기울여 매달릴 수만 있다면, 황제를 제거하고 제국군에 큰 타격을 입혀 적들을 회군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마지막 승부처가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저희 또한 힘을 보태도록 하지요.”
-탁월한 결정이오! 우리 벨루나이와 귀국이 주도하는 작전이라면, 나머지 국가들도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연합의 사활이 걸린 마지막 전쟁이 될 테니 그렇겠지요.’
마도국가로 유명한 벨루나이에서 마법사들이 총력을 기울여 황제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적합한 전장을 골라 황제를 칠 기회를 노리기로 결의가 되었다.
세부적인 작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칼릭스와 알론드는 다시 한번 조국을 떠나 벨루나이로 이동했고, 반쯤 무너진 연합에 속해 있던 국가들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병력을 파견하여 서부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